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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주호는 일왕의 항복 방송을 들으려고 라디오 옆에 앉았다. 하지만 찌지거리는 잡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안테나를 손으로 쥐어 보았다. 그러자 잡음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일왕의 음성은 약간 떨리는 듯했다. 임주호는 안테나에서 손을 놓지 않고 일왕의 연설을 마음 졸이며 들었다.

"나는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 상황을 깊이 성찰한 결과,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기로 하여 이를 충량한 신민들에게 고한다. 나는 제국 정부가 미영중소 4개국에 대하여 포츠담 선언의 내용을 수락한다는 뜻을 통고하도록 지시했다.

제국 신민들의 강령과 만방의 공영을 위한 노력은 선조들이 우리에게 부여한 성스러운 의무로 우리 가슴에 새겨져 있다. 제국은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위하여 영미 양국과 전쟁을 했으나 나의 뜻한 바와 다르게 타국의 주권과 영토를 침해하게 되었다.

개전한 지 어언 4년이 되는데, 육해군의 투혼, 전쟁 종사자들의 근면, 그리고 일억 신민의 최선에도 불구하고 전국은 호전되지 않고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았다. 그에 대하여 적은 새롭고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유래가 없는 희생자를 냈다. 그래도 교전을 계속한다면 결국 우리 민족은 멸망을 초래할 뿐 아니라 인류 문명의 파괴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억조의 적자를 보전하고 선조의 영전에 용서를 구하겠는가? 내가 제국 정부로 하여금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게 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나는 제국과 함께 동아시아의 해방에 협력한 제 맹방에게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 신민으로서 전장에서 전사한 장병들, 직분을 다하다가 순국한 사람들, 비명에 간 사람들과 유족 생각에 주야로 괴롭다. 집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도 걱정이 된다. 앞으로 제국이 짊어져야 할 고난도 결코 적지 않다. 나는 신민이 느끼는 착잡한 심정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시대의 소명과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요인을 참고 받아들여서 앞으로 다가올 만난을 극복하여, 다음 세대에 평화의 길을 열어주고자 한다.

언제나 충량한 신민들과 함께 국체를 호지해 온 나는 신민들의 단결과 성실에 다시 호소한다. 감정의 표출은 불필요한 소요 사태를 야기하고, 동포들과의 분규는 혼란을 자초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자제력을 잃은 행동은 시국을 혼란하게 하여 대도를 그르쳐서 국제적인 불신을 초래할 것이니, 나는 이를 가장 경계한다.

모든 신민은 먼 장래를 내다보면서 신주의 불멸을 믿고 대를 이어 한 가족처럼 결속을 다져야 한다. 미래 건설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자. 성실성을 배양하고 고매한 정신을 육성하자. 세계의 진운에 뒤처지지 않게 제국에 주어진 영광을 고양시키도록 단호한 결의로 매진하자."

임주호는 조용히 비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고는 호텔 지배인을 불러 물었다.

"좀 나가보고 싶은데 괜찮겠지요?"

지배인은 거리에 사람들이 몰려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호텔에서 나온 그는 서울역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주 뜨거운 여름 날씨였다. 그는 땀을 흘리면서도 오랜만의 거리 외출에 상쾌함을 느꼈다. 자유를 누리며 산다는 것의 의미를 그는 새삼스럽게 자각했다. 그는 노동수용소에서 나와 한 달째 호텔에 마련한 비밀방에서 은신해 오고 있던 중이었다.

위안부 이야기를 하던 노동수용소의 일본인 상사

한 달 전쯤 노동수용소에 있었을 때, 임주호는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는 매일 점심이면 북으로 날아가는 B-29기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 있는 일본군은 미군 비행기를 향해 어떠한 공격도 하지 못했다. 그쯤 되면 일본은 전쟁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전세가 악화되면 그들은 너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때를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임주호는 뚜렷이 조심할 일도 없을 뿐더러, 또 유달리 조심하고 싶은 심정도 아니었다. 그는 오후 노동을 마치고 조선인 학생 40명과 한 방에 앉아 있었다. 30대 젊은 상사가 술에 만취되어 들어왔다. 그는 유익한 무용담을 들려주겠다고 말했다.

"내가 만주에 근무할 때, 한 중국인 지주의 집이 있었는데 그게 뭔지 알아?"

임주호는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상사는 자기가 묻고 자기가 대답했다.

"위안소였어. 마당에 면한 방이 셋이었는데, 방문 앞에는 늘 열댓 명의 병사가 줄을 서 있었지. 그들은 기다리다 못해 킬킬대며 소리쳤어. 야! 빨리 해. 해 떨어진다. 어두워지면 일을 끝낸 여자들이 방에서 나왔지. 그년들의 위세는 대단했어. 뭐라고 했는지 알아? 나도 너희들 못지않은 애국자야. 나는 너희들과 다른 방법으로 덴노를 섬기고 있어. 그러니 까불지들 말아. 이렇게 되쏘고는 세면장으로 가는 거 있지?"

임주호 생각에 상사는 참으로 야비한 일본인이었다. 그는 얼마 안 있어 일본이 망하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울 터였다. 그런데 지금 만주에서 있었던 추잡한 무용담이나 늘어놓고 있다니…. 임주호는 사람은 일단 어느 정도 두뇌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일본인 상사가 불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칼슘 주사를 맞아온 임주호는 날로 건강이 쇠약해졌다. 그래서 그는 걸핏하면 노동에 나가지 않았다. 노동에 많이 빠지는 사람에게는 호출이 있었고 그곳에 가면 심한 모욕과 함께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

어느날 임주호에게 마침내 호출 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자포자기 심정으로 감독관실 문을 노크도 없이 열고 들어갔다. 그런데 그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

"자네 부친이 돌아가셨어. 휴가는 닷새일세."

임주호는 집으로 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다시 수용소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호텔에 비밀방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책을 읽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은신 생활을 하다가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게 된 것이다. 그는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마치 잠을 자다가 일찍 깬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만세 부르는 거리의 군중들

임주호는 경성 거리의 복판에 서 있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광통교, 똑바로 가면 경성부청이었다. 그는 광통교 방향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며 몰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경성부청쪽으로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곳에는 아직도 일본 군인들이 총검을 들고 있었다.

그는 왼쪽길로 걸어갔다. 그러자 경성우체국이 보였다. 그는 길 건너에 있는 미쓰꼬시 백화점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며 남대문 방향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그는 길을 건널까 하다가 우체국 다음에 있는 메이지 제과점으로 들어갔다. 그는 며칠 내로 간판을 바꿔 달아야 할 제과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부드러운 빵 하나와 얼음과자를 시켜 먹었다.

땀을 식힌 임주호는 길을 건너 서울역 쪽으로 걸었다. 길가에 세브란스 병원이 있었다. 모자를 쓴 간호사들이 창가에 서서 군중들이 몰려다니는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병원 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군중에 휩쓸리는 것이 보였다. 환자복을 입은 채 길로 나와 구경하는 이도 눈에 들어왔다.

임주호는 인도를 통해 걸었다. 그가 세브란스 문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처녀 하나가 병원 문 밖으로 나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임주호와 마주친 그녀도 선뜻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임주호를 병원의 직원이거나 젊은 의사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임주호에게, "안녕하세요"라고 덤덤히 인사를 건넸다.

임주호는 조금 의아했지만 일단 인사부터 받고 보았다. 그녀는 김수임이었지만 임주호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네. 반갑습니다."
"서울역 광장에 가시는 거지요?"

임주호는 정겹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군요. 저도 지금 광장에 나가 보려던 참인데."

두 사람은 서울역 방향으로 함께 걸어갔다. 서울역 광장은 만세를 부르러 나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대한독립만세!"
"조선해방만세!"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의 실상과 이에 도전한 매혹적인 한국인들이 소개됩니다. 이 소설은 약 195회 정도까지 연재될 예정입니다.



태그:#항복방송, #위안부, #대한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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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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