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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가지고 '문학, 철학,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지성인으로서의 기본이라는 생각을 늘 하며 살았다. 물론 그 생각대로 살지는 못했다. 나는 문학을 읽을만큼 깊은 상상력을 가지지 못했으며, 철학 책의 첫 페이지부터 나에게는 수면제였고, 지금의 신문을 장식하고 있는 역사말고 먼 옛날의 이야기는 너무 재미가 없었다. 그래도 근근히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흉내를 냈던, TV의 다큐멘터리는 녹화를 해서 볼만큼 열심히 봤었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어느새 서른도 넘겼지만 여전히 대학 시절의 '그 생각'은 또렷하게 나에게 남아있다. 얼마전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몇 권 구입하면서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이란 책을 끼워넣은 것도 이런 부담감의 연장선상에서였다.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의 초상
▲ 서예 유성룡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의 초상
ⓒ 유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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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전같이,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 흥미를 가지고 있기에 얼마전 '이산 정조대왕'도 재미있게 읽었었다. 이 책 또한 유성룡이라는 인물의 족적을 통해, 그 시대의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책이기에 기대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400페이지가 넘는 책 두께가 부담스럽긴 했지만, 처음부터 술술 넘어가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역사분야의 대중적 글쓰기로 명성을 날리는 저자 이덕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할까?

유성룡을 읽은 후 내 소감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특별한 유성룡, 동시에 보편적인 유성룡"이다. 유성룡은 매우 특별한 사람이다. 우선은 이른 나이에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생활을 초창기부터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핵심보직을 거친 엘리트다.

그는 똑똑한 만큼 행정, 경제, 외교, 국방 등 국가운영의 전반에 걸쳐 돋보이는 식견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성룡이 살던 시대는 임진왜란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암울한 시대. 유성룡의 이러한 특별함은 진가를 발한다. 연약한 국가, 질서가 무너진 국가, 백성이 조정을 신뢰하지 않는 혼돈의 국가였던 그 시절의 조선에서 중심을 잡아야 할 왕마저 민심을 수습하고, 위기를 극복하기는 커녕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도망갈 궁리로만 머리가 가득차 있었다.

그렇게 비겁하고, 책임감 없고, 백성은 안중에도 없는 왕을 '모시고' 재상 유성룡은 민심을 모으고, 제도를 개혁하고, 강대국들과 맞서 위기를 헤쳐간다. 이러한 시절에 돋보이는 유성룡의 특별함은 능력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저 보신하며 벼슬과 재물을 보전하는 것이 많은 '영감'들의 지상과제였던 시절, 유성룡은 홀로 왕과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또한 나라의 운명보다 자신들의 기득권이 더 소중했던 양반들과도 각을 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자신 또한 많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리며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유성룡은 그렇게 삶을 유지해가는 많은 사람들속에서 툭 튀어나와 그렇게 특별하게 자신의 소신과 실력을 펼친다.

이러한 유성룡의 특별함은 '모난정이 돌맞는다'는 속담을 증명하듯이, 오히려 대의와 책임을 저버린 왕과 권력자들로부터 찍히는 계기가 되고, 결국에는 숙청을 당하게 되는 빌미가 된다. 이 어이없는 일 속에 나는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인가? 모나지 않는 삶, 아니면 그래도 유성룡의 삶?

유성룡의 이런 특별함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은 보편적인, 너무나도 보편적인 유성룡의 모습에서 찾는다. 특별함의 원동력이 보편에 있다니 이상한 말같기도 하지만, 유성룡의 삶에서 이런 특별함과 보편성의 통합을 발견한다. 이 책 제목에 붙어있는 '설득과 통합의 리더'라는 헌사에서 적어도 통합이라는 것은 유성룡의 삶에서 매우 절절하게 구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가 왕에게 찍히면서, 양반들의 질시를 받으면서, 강대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용감하고도 특별한 행보를 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그가 자신의 온몸에 녹여낸 보편성에 있다. 기득권자들, 권력자들, 그리고 이해관계자들의 특수함과는 다른 특별함으로 신분제를 타파하고, 서민들에게 불합리한 조세제도를 뜯어고치고, 강대국과의 관계에서도 무조건적인 굴종이 아니라 할말을 하는 외교를 펼친 것은 사람은 누구나 존귀하다는 보편적 진실을 받아들이고, 대의라는 당위 앞에 자신의 이해관계를 개입시키지 않으며, 진실 앞에는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보편에 충실한 인간에게서만 추출될 수 있는 결과인 것이다.

그의 관심은 특수한 이익에 있지 않았다. 그는 공부한대로, 배운대로, 옳다고 믿는바대로 손과 발을 움직였고 입을 벌렸다. 그런 그의 보편성은 역설적이게도 특별함을 만들어냈다. 보편성 없이 사리를 탐하는 자들이 당연시되는 이상한 보편의 사회에서 보편을 추구한 그의 삶은 매우 특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핏줄로 승계되는 왕을 빼고는, 그 사회의 인간이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올라간 재상 유성룡. 그와 같은 사람이 둘러싸이게 되는 이익과 이해의 포위망속에서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든 인간의 한계에 보편성이라는 이름으로 치열하게 부딪혀 특별한 삶을 살았던 유성룡. 그 보편성을 겸손하고도, 절도있게 소통하며 설파하고자 했던 그의 삶은 책 제목대로 '설득과 통합'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늘의 유성룡 어디없는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권오재의 블로그 '오재의 화원'(vacsoj.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유성룡 - 설득과 통합의 리더

이덕일 지음,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2007)


태그:#유성룡, #리더, #보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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