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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골나이를 찾아가는 남녘엔 어느새 봄볕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샛골나이'는 다시면 샛골 일대에서 무명 짜는 일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한다. 즉 샛골은 옛지명이고, '나이'라는 말은 베짜기라는 의미의 '길쌈'을 뜻하는 말이란다. 우리 나라의 무명은 1년생 초목인 목화에서 나온다. 목화에서 씨앗을 빼고 난 솜을 솜타기와 고치말기, 실잣기, 무명날기, 베매기, 무명짜기 등의 순으로 짜낸 전통직물인 것이다.

방금 작업을 하던 것처럼 모든 재료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 길쌈 작업장 방금 작업을 하던 것처럼 모든 재료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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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 배웠듯, 목화는 문익점 선생이 중국의 원에 갔다가 붓통에 숨겨 가지고 돌아 온 10알의 씨앗에서 비롯된 그 면화다. 문익점은 이것을 장인 정천익에게 주었고, 그 10알 중에 겨우 한 알만 싹이 텄다고 한다. 그리고 그 한 알이 10년 안에 전국으로 퍼졌고, 백성들은 누구나 따뜻한 면직물을 입게 되었다.

다시면 동당리 청림마을 입구에 샛골나이 팻말이 있었고, 마을 안 고삿길 안쪽으로도 샛골나이 팻말이 있었다. 담장을 끼고 들어가 집안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기척이 없었다. 그냥 올 수는 없고 조심스럽게 대청마루 미닫이 문을 열고 '아무도 안 계신가요?' 하고 불러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누구시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냥 돌아서려는 찰나였다. 문을 열고 나온 분은 남자 어르신, 최 할아버지였다.

아직도 작업중인 것처럼 생생한 풍경이었다.
▲ 길쌈 작업장 아직도 작업중인 것처럼 생생한 풍경이었다.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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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씨를 뺀 솜.
▲ 솜 목화씨를 뺀 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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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샛골나이 취재 좀 하려고 하는데 미리 연락을 못하고 와서 죄송합니다. 여기(길쌈 작업실)라도 좀 볼 수 있을까요?"

어르신은 귀찮아하는 기색없이 방을 열어주시며 장인께서는 잠깐 출타 중이시라고 했다. 방안에는 방금 길쌈을 하다가 나간 것처럼 모든 장비가 갖춰져 있었고 바구니에는 솜이 담겨 있는 등, 길쌈에 필요할 듯한 소소한 재료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우리가 방안을 둘러보자 어르신은 직접 나서서 벽에 부착된 사진을 가리키며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셨다.

길쌈하는 사진을 일일이 손으로 짚어가며 설명해주시는 어르신.
▲ 길쌈 장면... 길쌈하는 사진을 일일이 손으로 짚어가며 설명해주시는 어르신.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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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해놓은 무명...
▲ 길쌈 전시해놓은 무명...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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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의 생산은 음력 3월 말에 보리밭의 보릿골 사이에 목화씨를 뿌리면서 시작되지. 목화씨는 씨를 뿌리기 전 오줌동이에 잠깐 담가 두었다가 꺼내어 아궁이의 재를 묻힌 다음 햇볕에 잘 말렸다가 써요. 이렇게 해서 4개월 정도 지나 솜을 수확하는데 그 솜에는 목화씨앗이 함께 들어 있으니까, 저 씨아를 돌려서 씨와 솜을 분리해야 되지. 씨를 빼낸 솜은 우선 손가락 굵기의 고치모양으로 만들어서, 실을 만들어요. 그게 '실잣기'인데, 그건 '물레'로 해요. 이때 손놀림에 따라서 실의 가늘기와 모양이나 빛깔이 결정되고, 그 실을 다시 '무명날기'라는 걸 해서 씨실과 날실로 만들어 무명을 짭니다."

베틀에 앉은 노진남 장인...
▲ 샛골나이 베틀에 앉은 노진남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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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틀에 앉아 베짜는 일을 시연해보는 노진남 장인...
▲ 샛골나이 베틀에 앉아 베짜는 일을 시연해보는 노진남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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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은 설명이 막 끝났는데, 운 좋게도 노진남 장인이 돌아오셨다. 그냥 설명만 듣고 돌아가야 하나보다 했는데 오신 것이다. 장인이신 노진남(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 28호) 할머니는 나주 '샛골나이' 기능보유자다. 장인께서는 불시에 닥친 불청객인데도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리고 잠깐이나마 베틀에 앉아 '이렇게 하는 거라고 길쌈하는 걸 보여 주셨다. 그러나 옷감을 사려는 사람들은 전혀 없단다. 문화재청에서 해마다 주문해가는 것외엔.

어린 시절, 우리집에도 목화를 심었다. 혼기에 처한 언니들이 많아 혼수 이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어린 마음에도 목화밭은 참 보기가 좋았다. 송이송이 하얗게 쏟아져 나온 솜들이 아주 탐스럽게 달려 있었다.

우리는 그저 이불솜으로 쓰는 거라 첫단계인 씨아를 돌려 씨를 빼낼 뿐인데도 온식구가 매달려 며칠을 해야 했는데, 일일이 실을 만들어 무명을 짜낸다니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영산강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에 서 있는 정자.
▲ 석관정 영산강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에 서 있는 정자.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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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영산강 옆에 있는 석관정을 찾아갔다. 석관정은 영산강과 고막강이 합류되는 지점의 나루터 경관이 수려한 절벽 위에 서 있었다. 함평이씨 함성군 이극해의 증손 석관 진충공이 1530年 창건했다는 정자다. 바로 건너편 야트막한 산에는 금강정이라는 정자가 서 있어 그것 또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자에 서서 영산강을 바라보니 바로 앞 나루터에 빈 배가 매어져 있었다.

영산강 나루터에 매어져 있는 빈배...
▲ 영산강 영산강 나루터에 매어져 있는 빈배...
ⓒ 이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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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샛골나이 작업실에서 노진남 장인이 오시기 전 사진을 일일이 손으로 짚어가며 설명하시던 최 할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

"이 힘든 작업을 생각하면 이 무명 한 필에 몇 백만원은 받아야 돼. 그런데 찾는 사람도 없어."

그러나 이 작업을 이어가는 게 어디 돈으로 따질 일이던가. 일은 고된데 돈은 안 되고. 어쩌면 아무도 전수받지 않으려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돈이 있어야 대접받는 세상이니. 그러니 저 나루터에 매어져 있는 빈배처럼 참 쓸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저 효용성에 따라 박재로만 남을 그 배틀과 물레 등, 길쌈에 관한 모든 것들이 말이다.


태그:#샛골나이, #무명, #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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