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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집은 2층이라서 쪽마루처럼 사용하는 테라스에 나가면 서해안고속도와 금강대교 위를 질주하는 차들, 그리고 나당 연합군에게 항거하다 숨져간 백제의 충절 오성인(五聖人)의 묘가 있는 오성산(227m)이 한눈에 들어온다. 

 

금강을 지키는 수문장처럼 우뚝 서 있는 오성산 아래로는 백로들이 공중회전을 하며 먹이를 찾고, 늦가을이면 가창오리의 군무가 장관인 철새 조망대와 맛 좋기로 소문난 '철새도래지 쌀' 생산지 십자들녘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집 바로 앞 논에서는 보름 전에 심은 모들이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춤추고, 도로변 고추밭도 보이는데, 당장에라도 몇 개 따다가 상추쌈과 함께 된장에 푹푹 찍어 먹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그런데 어제 그제에 이어 오늘도 고추밭 고랑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는 아주머니가 보였다. 밭고랑도 깊이 파고, 줄도 잘 세워서 심어놓았으니까 먹고 싶을 때 따먹으면 됐지, 무엇 때문에 사흘을 계속 밭에 나왔는지 궁금해서 나가보았다.

 

고추가 아들 같다는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사람이 다가가는 줄도 모르고, 막내아들 목욕시키듯 고추나무 가지를 어루만지며 잔가지를 쳐주면서 잡초를 뽑고 있었다. 가까이서 얘기하려고 고랑 사이로 들어가는데 아주머니 엉덩이에 달린 둥근 깔개가 발길을 잠시 멈추게 했다. 

 

엉덩이에 찰싹 달라붙은 깔개를 보는 순간 웃지 않을 수 없었고, 작은 탄성이 터지기도 했다. 못 보던 물건이고, 동물원 원숭이 엉덩이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집에서 아저씨가 만들어준 것으로 알고 '발상이 기막히다.'고 생각했는데, 농약 집에서 구입했다는 얘기를 듣고, 농사에 어두운 나 자신을 책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저기 빨간 기와지붕 2층에서 사는데요. 어제도 그제도 나오셔서 일하시는 걸 봤는데 오늘도 나오셨네요. 고추농사가 그렇게 할 일이 많습니까?"

"예 어저끼랑은 이 근방 꼬치들이 못 나가지고 잘 크고 영글게 혀달라고 땅이다 양분으로 비료(요소)도 주고, 풀도 뽑고 혔는디, 오늘은 풀도 풀이지만, 가쟁이 쳐 줄라고 나왔어유. 그리야 꼬치가 잘 열링게, 어떻게 혀유, 촌이 살응게 허야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는 걸 보니까, 집이 이 근처가 아니어서 힘드시겠어요. 저하고 비슷한 것 같은데 아주머니는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저는 올해 예순인데."

"나는 신일곱이고 남편은 예순 싯인디, 예순이라니, 핫따! 많이 드셨네. 나보다 아랜 줄 알었등만. 저쪽 모텡이 돌아가서 고목나무가 있는 강정리 사는디유. 거그가 친정이지유. 동네 사람들은 촌이로 시집을 못 가게 허는디, 일만 허는 집으로 와가꼬 힘드네유, 시집와서 연태까지 농사만 지었응게유. 그려서 지금은 후회헌당게··(웃음)."

 

"그래도 제가 볼 때는 아들도 최소한 둘 셋은 될 것 같네요. 지금은 어른이 되어서 효자 노릇을 할 것이고, 아저씨(남편)도 잘 해주실 거니까 그동안 고생한 보람을 느끼시겠는데요. 아주머니 얼굴에 그렇다고 쓰여 있습니다.(웃음)"

"하이고! 무슨 말씀을··(겸연쩍은 표정으로), 아들 둘에 딸 하나 봤쥬, 애들이랑 신랑은 힘들다고 못 허게 말리는디 어치께 그럴 수 있간듀. 하나씩 영그는 꼬치를 보믄 꼭 자식 같은디, 거기다가 시집와서 일허는 욕심만 늘어가꼬 올해도 신랑 허고 쌈 쌈 혀감서 심었거든유. 참! 저그 아저씨네 옆집 사는 하영태씨가 집안 오빠 돼유. 참 좋은 양반이쥬."

 

아주머니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금방 밝은 표정으로 바꿔 말을 이어나갔다. 시의원을 지낸 하영태씨가 집안 오빠인 것이 무척 자랑스러운지, 마을에서 인심을 얻어 당선된 과정과 집안에서도 존경받는 이유 등을 설명해주었는데, 점잖고 인품이 뛰어나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듣고만 있기가 뭐하기에 주워들은 얘기까지 합해서 아주머니 장단에 맞추었다. 중고등학교 선배이고, 지난 어버이날에도 노인회관에서 식사하면서 인사를 드렸다고 하니까, 친밀감이 더 느껴지는지 "이리저리 알고 보믄 몰로는 사람이 없당게유."라며 일하는 중에도 흠뻑 웃음을 지었다.

 

 

"여름에 고춧잎을 살짝 삶아서 고추장에 무쳐먹으면 상큼하고 개운한 맛이 그만인디"라고 하니까 "아자씨는 천상 촌이서 살어야겄네유"라면서, 그해 수확한 고추씨를 다음해에 심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병충해에 강하고 고추가 많이 열리는 종자를 골라 심기 때문에 수확량은 늘었지만, 고추 맛은 물론 고춧잎 무쳐먹기도 어렵다며 아쉬워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고 하지만, 자주 다니기가 어려우실 텐데, 아주머니는 남들보다 고추밭에 자주 나오시는 것 같네요. 사람들 보면 텃밭이나 옥상에도 심어 놓고 먹고 싶을 때 하나씩 따먹고 그러던데."

"그럼유, 손이 많이 가쥬. 자잔고 타고 오믄 집이서 가찹기도 허지만, 꼬치들이 걱정됭게 이르케 가끔씩 나와봐야쥬. 그리고 꼬치농사가 별것 아닌 것 같어도 꼴로 볼 것 아녀유. 올해도 2천포기 가량 심었는 디 딸이랑 동상네랑 나눠주고 친분친분 팔기도 헐거그든유. 잘 허믄 1년에 몇 백만 원은 벌응게유, 도마도 따러 댕기는 일당(품삯)보담 못 허고, 이것저것 제 허믄 남는 게 없어서 탈이지."

 

"고추농사 말고 논농사도 짓나요?"

"그르믄유. 논농사도 짓고 나무농사도 짓고 허는디 남는 것이 없어유. 촌이서 살응게 그냥 농사져서 먹고 사는 거쥬. 그리고 여그는 고모네 밭이에유. 우리 밭은 산이 있는디 사람들이 없는 밭이다 심으믄 꿩이랑 산비둘기들이 꼬치를 조지대싸서 여기다 심는 거쥬."

 

한쪽 밭고랑에는 짚을 깔아 놓았기에 고모부가 심은 고추밭과 경계를 표시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웃으면서 짚을 깔아 놓으면 농약을 하지 않아도 풀이 나지 않고 병충해 피해도 없어서 좋은데, 혼자는 힘이 달려서 못했고, 고추농사를 말리는 남편에게 짚 깔아달라고 부탁도 못 했다면서 웃었다. 

 

 

"작년 11월이던가요. 첫눈이 많이 내린 날 아침에 마을 풍경이 아름다워서 사진을 찍었거든요. 그런데 돌아다니면서 보니까, 배추와 고추가 심어져 있는 이곳에도 소복하게 쌓였더군요. 눈 쌓인 배추와 고추밭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사진을 찍어놓았습니다. 그때까지도 빨간 고추들이 열려 있더군요."

"딴 건 몰라도 머헐라고 풍신난 배추 사진을 찍었댜. 허기사 새가 많응게 그렁가 여기로 사진 찍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드라고유·· 꼬치는 일 년이믄 한 다섯 번 따먹고, 따먹을 적마다 묶어줘야 허는디 그때까정 달려있었든 개비네유."

 

"그때는 임자가 없는 줄 알고 배추도 뽑아먹고 고추도 따가려고 했는데 아주머니가 주인이었군요. 그럼 눈 쌓였던 배추는 어떻게 하셨어요?"

"꼬치는 다 따다 먹었지유. 아자씨가 몰로싱게 그렇지, 우리가 1년에 꼬치가루를 70-80근씩 먹어유. 딸네도 주고 서울 사는 동상들이 가지가기도 허고, 짐장도 담거먹어야 헝게유. 작년 짐장도 배추를 한 2백 포기 넘게 혔응게유. 쪼꼼 힘은 들지만, 그르케 헒서 사는 게 시상 아니겄어유."

 

얘기가 끝날 때까지 표정이 밝았고, 속에 담고 있던 사연들을 거침없이 표현해준 아주머니에게 오늘 주고받은 얘기와 사진을 인터넷 신문에 소개하려고 밥도 먹지 않고 나왔다며 올해도 많이 수확하시라는 덕담과 인사를 건네고 돌아왔다.

 

고향을 한 번도 뜬 적이 없고, 결혼해서 농사만 지었다는 50대 아주머니, 그는 일손이 바쁜 모내기 철에는 못 줄을 잡고, 어머니 대신 막걸리 심부름을 하는 등 어려서부터 어른들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농사일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순박한 농촌 아주머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와 한겨레필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고추농사, #십자들녘, #오성산, #금강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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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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