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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춥다
1월과 2월은
언제나 저녁부터 시작되고
그 언저리
불도 들지 않는 방
외진 몸과 외진 몸 사이
하루에도 몇 번씩
높은 물이랑이 친다
참 많이도 돌아다녔어요, 집 나선 지 이태째라는 참머리 계집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부서진 손톱으로
달을 새긴다
장판 깊이 박히는 수많은 달
외항을 헤매이는 고동소리가
아련하게 문턱까지 밀리고
자거라, 깨지 말고 꼭꼭 자거라
불 끄고 설움도 끄고
집도 절도 없는 마음 하나 더
단정히 머리 빗으며
창밖 어둠을
이마까지 당겨 덮는다
<밀물 여인숙> - 최갑수

발
▲ 통 발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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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날카로운 암초에 그물이 찍-걸리면 그냥 작살이 나는 암초밭표식과 어군 이동 경로들과 어획량의 적고 많음의 코스 등이 기록되어 있는 갈매호 어장도에는 북한 경비정들이 자주 출동하는 지점과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영종도 구역 등 어지럽게 작도 되어 있었다.

도수철은 한 손으로 가려운 머리 속을 긁고 한 손가락으로는 군사분계선(NNL)을 따라가 보았다. 소청도 앞바다에 별점들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보았다. 며칠 전 G 함대함 미사일 시험발사로 몇 척의 남한 배들이 가라앉은 지점이었다.

북한 경비정이 철통 같이 지키고 있으나 중국 어선은 안방처럼 들락거리며 그물을 끌고 있었다. 이게 무슨 미친 짓거리인가 말이다. 그야말로 '곰은 재주가 넘고 돈은 중국 떼놈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간다.' 식이다.

도수철은 바다에 풍덩 뛰어들어 황금 꽃게 어장을 모조리 그물 속에 쓸어 담고 싶었다. 도수철은 마누라가 젊은 놈과 배가 맞아 도망간 뒤, 모든 것이 허망하고 살기 싫어 죽으려고 바다 속으로 무작정 걸어들어 갔지만, 물속에 머리끝이 잠기기도 전에 아들 경호 생각에 나서 도로 헤엄쳐 나왔던 것이다.

생각만 해도 머리의 뚜껑이 열릴 일이었다. 마누라와 함께 달아난 영식은 다름 아닌 친 동생처럼 챙겨주며 뱃일을 가르쳐 준 도수철이 데리고 있던 부하였다. 아무튼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 것이다.

머리털 검은 짐승은 거두어주는 게 아니었다. 짐승보다 못한 놈… 천애 고아로 이배 저배 타며 일엽편주처럼 떠돌았다고 하여, 도수철은 정말 내 살붙이처럼 대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아들애 같은 놈과 줄행랑 친 마누라가 더 원망스러웠다. 그래 아무리 눈이 뒤집혔지만, 남편이 아끼던 부하와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도수철은 그 생각만 하면 호흡이 거칠어지고 현기증이 일어났다.

그리고...바다
▲ 바다 그리고...바다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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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그러니까 벌써 10년도 넘었다. 도수철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그날도 남포 다방을 찾았다. 차를 시켜 마시니 어느 날처럼 다방문을 열자, 말숙이 호들갑스럽게 반겨주었다. 그리곤 도수철 곁에 자석처럼 붙어서 갖은 아양을 떨었던 것이다. 도수철은 원래 과묵했다. 그런데 말숙과 있으면 더 말이 없었다. 늘상 그랬던 것처럼 마담과 레지들에게 둘러 싸여, 시시컬렁한 블랙유머를 나누는 남포다방 마담과 레지들에게 비싼 쌍화차를 한 자리에서 몇 번이나 사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말숙이 오랜만에 두 사람만 오붓하게 촛불이 밝혀진 '오페라 레스토랑'에서 칼질을 하고 싶다고 해서 거금의 양식을 저녁으로 사먹고, 정말 하나도 웃기지 않는 삼류 코메디 영화도 보고, 달빛이 쏟아지는 밤바다가 보이는 맥주집에 들렀다가, 말숙이 팔목을 잡아끄는대로 끌려들어 온 여인숙 주인이 두 사람을 알아보고 오랜만에 왔다고 친절히 반겨 주었던 것이다.

솔직히 막막한 바다에서 얼마나 그리워 했던 여인의 냄새인가. 싸구려 향수냄새 물씬 풍기는 여인숙 늙은 주인여자가 돌아가신 노모처럼 푸근했던 것이다. 그래서 도수철은 상당히 취했는데도 맥주 서너병과 마른안주 사다달라고 만원짜리 지폐 서너장을 건네주고 받아온 맥주를 홀짝이며 마시고 있는데, 욕실에서 오래도록 샤워를 하고 나온 말숙이 물방울이 툭툭 떨어진 머리를 닦지도 않고 도수철의 품속을 파고들며 흐느끼며, 이제 더 이상 떠돌기 싫고, 당신을 기다리기도 싫다고 나 같은 여자와 결혼할 수 있다면 결혼하자고 말했다. 도수철은 아무 대답 하지 않고, 말숙의 어깨만 다독여 주었다. 도수철은 내심 말숙과 한두 번 살을 섞은 사이도 아니고 해서, 이렇게 만날 때마다 화대를 치룰 게 아니라 차라리 결혼을 하는 게 좋겠다 싶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 동료들이 말숙을 두고  걸레 중에 상 걸레라고 빈정거리는 소리가 약간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뭐 제 삼자가 두 사람 인생을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 싶고, 말숙이 외 그동안 다른 여자는 생각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도수철은 말숙에게 결혼식을 올릴 돈으로, 차라리 인천 시내에 괜찮은 전세집도 한 칸 마련하자고 했고, 말숙도 결혼식은 나중에 올려도 된다고 했던 것이다. 도수철이 돈을 건네자 말숙은 좋아라 냉장고 텔레비젼을 사들여 아기자기 신혼살림을 차렸던 것이다. 도수철은 행복해 하는 말숙을 보자, 여자의 과거 따위는 바다와 같아서 배가 지나간 자리가 남지 않는 법이라 여겨졌다. 정말 오순도순 행복했다. 생각과 달리 말숙의 살림솜씨는 정말 나무랄 것이 없었다. 사람 사는 게 이런 것인가 싶었다. 말숙은 다음 입항 때 돌아와보니 아들, 경호를 낳았다.

도수철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더 느껴졌다. 아내와 아들과 떨어져 있기 싫어 국내어선만 탔으나, 국내 어선은 수입이 적어 생활비가 쪼들리기 시작했다. 도수철은 돈을 많이 벌려면 우선 자격증인 면장을 따야 했다. 그래서 열심히 면장공부를 했지만, 중학교 밖에 나오지 않는 학력으로는, 해사전문영어가 너무 어려웠다. 나쁜 짓인 줄 알지만, 도수철도 삼백 만원이란 거금을 투자해서 대리시험을 부탁했다. 이렇게 3급 면장을 땄다. 아내와 아들과 헤어지기 싫었지만, 가족의 미래를 위해서도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아내를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원양어선을 타게 되는 날, 우르르 동료들을 데리고 집에 갔다. 그런데 영식을 대하는 아내의 얼굴빛이 사뭇 달랐고, 함께 자리한 영식의 얼굴은 돌처럼 굳어졌다. 동료들은 두 사람을 두고 흰 소리를 늘어놨다. 그제야 두 사람이 심각한 사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그날 밤 말숙은 영식이가 오래도록 자신을 짝사랑해 왔다는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아무래도 자신을 못 잊어 하는 것 같다고 이제 결혼을 했으니, 어떻게 해 줄 수도 없다는 애매한 소리를 했다. 도수철은 아내, 말숙의 고백에 그저 씁쓸했다.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그리고 이년 후 포클랜드에서 오징어채낚기어선을 타고 돌아와 보니 아내는 없었다. 아들 경호도 없었다. 매정하게도 편지 한 장 남기지 않고 돈 될 만한 것들을 모두 팔아치우고 줄행랑을 친 것이었다. 원양어선에서 생고생하며 보내준 돈도 자취가 없었다.

도수철은 뱃사람들의 마누라가 대부분 바람은 피우지만 가정은 지킨다는 말을 은근히 믿고 있었다. 아무리 눈이 뒤집혀도 가정을 지켜 줄 거라 믿었다.  이가 뿌드득 갈렸다. 아들 같은 어린놈과 붙어먹다니…….

혹시나 해서 아내의 친정인 경북 영천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아내의 친정의 주소에 사는 사람은, 김말숙... 그런 사람은 여기서 산 적이 없다고 했다. 된통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김말숙 이름이 정말 본명이 맞는가 싶었다. 다방 레지들 모두 가명 쓰는 걸 알면서도 주민증 한번 확인하지도 않은 자신이 천치바보 같았다.

진작 혼인신고를 해야 하는데, 혼인신고를 미루고 경호의 출생신고는 서너 살 먹은 뒤에 하는 게 좋다는 이상한 이유를 갖다 대면서 결혼 신고를 기피했다. 가만히 생각하니 경호는 자신을 닮은 데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쩜 영식의 씨앗이겠다 싶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이를 데리고 줄행랑 칠 턱은 없는 것이다.

혹시 그래도 싶어 인천 시내 보육원을 샅샅이 다 뒤졌다. 아들 경호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한동안 술을 먹지 않으면 제 정신으로 견딜 수가 없었다. 왜 멀고 먼 포크랜드까지 가서 가정을 잃어버렸는가 싶었다.

배는 더 이상 타기 싫었다. 돈도 떨어지고 이곳저곳 공사판을 돌아다니며 입에 풀칠을 했다. 고기 잡는 일은 훤했지만, 육지 일은 일머리가 달라 도무지 일에 몸이 맞지 않았다. 다시 어선을 탔다. 만사 잊어버리고 열심히 도수철은 마누라와 아들을 잊기 위해 묵묵히 일만 했다.  <계속>

의 승천
▲ 부표 의 승천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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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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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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