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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항상 스스로 예리하고 날카로운 독수리의 눈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의 작은 언어 표현 실수도 꼭 지적하고 바르게 고치고 나서야 직성이 풀릴 만큼 일상의 작은 대화에서도 세심함과 꼼꼼함을 발산하는, 즉 어리바리함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3년 전 쯤으로 기억한다. 경상도에서 10년 정도 살다가 경기도 송내 중앙병원 부근으로 이사를 온 지 얼마 안 됐을 무렵이었다. 아버지 직장 문제로 당분간 임시로 살게 된 것이었고, 그땐 줄곧 대학교 기숙사 생활을 하던 터라 송내라는 새 집 주변은 항상 낯선 곳일 수밖에 없었다.

그 무렵 어느 날, 아주 오랜만에 친구와 서울 강남역 근처에서 만날 일이 있었다. 거의 1년 만에 연락이 닿은 것이라 반가운 마음에 날이 새는 줄 모르고 그간에 있던 소식을 안주 삼아 이야기 꽃을 피웠다. 조금 늦게 만난 탓도 있지만 시간은 어느새 훌쩍 흘러 새벽 3시가 가까워졌다. 이튿날이 주말이었지만 아침 일찍 서로 할 일이 있어 늦게나마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인심 좋은 택시 기사 아저씨 덕분에 1만원을 깎아 택시를 잡아 탔다

친구가 서울 목동 근처에 살고, 나는 경기도 부천시 송내역 부근에 살았다. 해서 강남역에서 같이 택시를 타서 친구가 먼저 내린 뒤, 우리 집으로 가기로 했다. 새벽 시간이라 택시비에 할증료가 붙어서 강남역에서 목동을 들러 송내로 가면 대략 택시비가 최소한 4만원은 나올 듯 싶었다.

하지만 당시 두 사람 모두 학생 신분이라 카드가 없고, 둘이 가진 현금은 3만원이 전부였다. 새벽 첫 지하철을 기다리려면 대략 2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방도를 찾아야했다. 새벽에 가족을 깨워 택시비를 들고 나와 있으라 하기엔 너무 염치없고 부끄러운 짓이었다. 결국은 용기를 내어 택시를 한대 세워서 기사 아저씨께 얼굴에 철판을 깔고 부탁했다.

'기사님, 정말 죄송한데요, 목동 들렀다가 송내 중앙병원까지 가려는데 저희가 정말 3만원이 전부라서 그런데 좀 태워주시면 안될까요?'

인상 좋으신 기사 아저씨는 잠시 머뭇거리시더니 이 시간엔 요금이 더 나오지만 미리 사정을 말했고 학생들이라니 허락하셨다. 늦가을이라 바깥 새벽 공기가 매우 차서 따뜻한 택시 안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물론 기사 아저씨는 다름 아닌 천사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친구가 목동역 근처에서 내리고 다음 만남을 기약한 뒤 나는 최종 목적지인 우리 집으로 향했다.

'아저씨, 이제 송내 중앙병원으로 가주세요.'
'아, 송내 중앙병원요? 네에~'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기사 아저씨가 흔쾌히 우리 사정을 봐 주신 것에 먼저 진심으로 감사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무 죄송하여 집으로 가는 내내 가시 방석에 앉은 부담으로 나도 모르게 아저씨의 말동무가 되어 드리면서 쉴새 없이 장단과 흥을 맞추고 있었다.

'택시 하시다 보면 많이 힘드시죠?'
'말도 마요, 사람들은 가만히 운전만 하면 편한지 아는데 우리는 택시를 3D 업종이라고 불러요. 하루 10시간 이상 매일 운전하다 보면 다리에 관절이 안 움직일 때도 있어요. 그렇다고 운동을 할 시간도 없고...'

기사 아저씨는 이런 저런 인생 경험담도 들려주시면서 집으로 가는 20여분 내내 호탕하게 웃기도 하고 술취한 몹쓸 손님들을 상대할 땐 스트레스 때문에 죽고 싶을 만큼 힘들다고 혀를 차며 한탄을 하기도 하셨다.

끊임없이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시간은 짧게만 느껴졌고 어느새 택시가 멈춰섰다.

'여기 송내 중앙병원이네요. 학생 덕분에 재미있게 운전하고 왔네요. 잘 들어가요.'
'하하 무슨 말씀이세요 아저씨,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뵐 일은 없겠지만 이 은혜 평생 간직해서 나중에 돈 벌면 꼭 저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돕고 살면서 은혜를 갚을게요.'

택시비 1만원을 깎아주신 아저씨가 솔직히 정말 눈물나도록 감사하기도 했지만 연신 120도로 인사를 하며 연설도 아닌 것을 몇 번이나 공약처럼 다짐까지 하며 아저씨께 인사하는 내 모습이 조금 가식적이진 않나 싶어 닭살이 돋았다.

드디어 송내 중앙병원에 도착해서 우리 집 아파트를 찾아봤지만...

어찌됐건 송내 중앙병원 앞에서 내리긴 했는데 무언가 느낌이 이상했다. 이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집 주변에 익숙하지는 않았고, 아무리 새벽 4시 즈음 깜깜한 어둠 속이라지만 중앙병원 입구가 내가 봐 왔던 것과 조금은 달라 보였다. 또 맞은편에 떡 하고 있어야 할 우리집 아파트와는 사뭇 다른 모양의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이상하네, 분명히 송내 중앙병원이 맞다고 했는데... 에이~ 내가 이사한 지 얼마 안되서 잘 모르나 보지... 병원 반대 쪽에서 내린 건가?'

내가 술이 취한 것도 아니고, 많이는 아니지만 택시를 타고 송내 중앙병원 앞을 몇 번이나 와 본 적도 있는데 뭐가 잘못될 리는 없었다. 나는 차가운 새벽 공기를 정면으로 맞으며 병원 한바퀴를 뛰듯이 돌았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분명히 내가 봐왔던 그 병원이 아닌 것 같았고 우리집 아파트 단지는 영영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 인상 좋은 아저씨가 내가 지리를 잘 모른다는 것을 알고 나를 골탕을 먹이려고 이상한 곳에 세우고 갔다는 말이야?'

20분간 건물을 맴돌아도 답이 나오지 않자 이제는 별에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내가 내린 곳은 분명 송내 중앙병원이 맞다고 하는데...

친구한테 전화해서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는데 이게 웬 말인가? 밤새 켜 놓은 핸드폰마저 배터리가 깜빡이더니 전원이 나가버렸다. 이판사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도로 변에 비상등을 켜 놓고 주차된 차를 발견하자 오아시스나 발견한 듯 단숨에 달려가서 운전기사분에게 황급히 물었다.

'저기, 실례한데요, 여기가 송내 중앙병원 아닌가요?'
'예, 맞아요. 송내 중앙병원'
'맞죠? 아, 이상하네... 감사합니다.'

분명히 맞았다. 송내 중앙병원. 나는 아파트 단지를 바라봤다. 희미하게 보이는 아파트 이름은 분명 우리 집 아파트가 아니었다. 그것 참 귀신 곡할 노릇이었다. 추위는 온데 간데 없고 어이없다는 듯 실소까지 터져 나오며 나는 혼잣말로 뭐라 중얼대며 씩씩대고 있었다.

그리고 또 10여분이 또 흘렀을까? 저 멀리서 경찰차 한대가 오고 있었다. 이때다 싶어 손을 마구 흔들었고 경찰차가 서자마자 창문이 열렸다. 누구보다 경찰 아저씨는 이곳의 정확한 지역을 알 것이며, 어찌됐건 풀리지 않는 이 어처구니 없는 상황을 해결해줄 유일한 구세주 같은 사람이라 생각되었다.

'저기, 여기가 송내 중앙병원 아닌가요?'
'네, 맞아요. 송내 중앙병원.'
'그렇죠? 맞죠? 참 이상하네...'

그때였다.

'저기요, 혹시 인천 송내 중앙병원 말씀하시는 거에요? 여긴 성내 중앙병원인데...'

그렇다. 경기도 부천시 송내는 인천과 경계지점에 있어서 보통은 인천 송내라고 불린다. 1초만에 지금까지의 모든 미스터리가 허무하고 잔혹하게 풀리면서 무거웠던 내 어깨 위에는 대략 10배는 더 되는 짐이 다시 얹혀지면서 나는 심각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출발지 표시가 된 곳이 택시기사가 착각한 '성내 중앙병원'(현 아산병원), 도착지는 부천시 송내역. 두 곳 거리는 40km가 넘는다.(네이버 지도 캡처)
 출발지 표시가 된 곳이 택시기사가 착각한 '성내 중앙병원'(현 아산병원), 도착지는 부천시 송내역. 두 곳 거리는 40km가 넘는다.(네이버 지도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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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에서 10년을 살면서 내 억양에 사투리가 많이 밴 것이었고, 내 '송내' 발음을 사람들은 '성내'로 들은 것이다. 그리고 정말 우연의 일치인지 서울시 강동구 성내에는 아산병원이 있고 그 예전 이름이 '중앙병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보통 '성내 중앙병원'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내가 그토록 외쳐된 '송내 중앙병원'이 '성내 중앙병원'으로 둔갑되어 나는 송내에서 한참 먼, 즉 처음 내가 택시를 잡아 탔던 강남역에서도 훨씬 더 집 반대 방향으로 택시를 타고 날라온 것이었다.

술에 만취되어 실수를 한 것도 아니고, 경상도 발음의 문제와 공교롭게도 비슷한 지역 이름, 같은 건물 명칭으로 나는 1만원을 깎아 택시를 탄 게 아니라 전혀 불필요한 시간과 체력을 마구 소비하면서 제3의 세계로 온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폰 배터리는 나가고, 돈은 다 떨어진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나는 5시가 넘은 시간을 확인하고 가까운 지하철 역으로 무거운 몸을 움직일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으며 넘길 만한 해프닝이자 사고 아닌 작은 사고였다. 하지만 당시 내게 갑자기 닥친 칠흑 같이 어둡고 차가운 새벽에서 풀리지 않는 수수께기 속 40여분의 시간은 그다지 만만하지는 않은 것이었다.

나는 그날 결국 첫 지하철을 타고 오랜 여행을 떠나 아침 7시가 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요새도 간혹 택시를 타고 '신촌'을 '신천'으로 잘못 알아듣고 내게 되묻는 기사님들을 볼 때마다 잊혀질 만한 '성내 중앙병원'의 웃지 못할 추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덧붙이는 글 | <저, 사고쳤어요> 응모글



태그:#택시, #송내, #중앙병원, #택시비, #막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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