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손을 뻗어도 소용없다. 발을 허우적 대는 것은 더 위험한 일이다. 서서히 빠져드는 몸. 그곳에는 나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이 보인다. 발버둥치지만 점점 더 절망으로 이끌 뿐이다. 개미지옥이다. 벗어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깔때기 모양의 모래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 커다란 입이 혀를 날름 내밀어 잡아먹어 버린다.

지옥이다. 벗어나려고 해봐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비유를 '개미지옥'과 연결한다. 아주 적절하다. 발버둥치다 결국 잡아먹히는 결말의 현실과 어찌 그리 잘 연상이 되는지. 대기업 사장으로 퇴임한 저자가 지금의 4가지 개미지옥 같은 현실을 진단하고 제시한 해법은 이견이 충분히 있을 듯하지만, 직접 돌아다닌 경험을 바탕으로 한 현실의 비판에는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좀 나누어서 먹고 살자. 그래야 지금보다는 여럿이 행복해질 것이 아닌가. 대꾸조차 하지 않고 고개 돌린 채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지금의 '귀족'들은 '국민'에게 존경받지 못한다. 4대강의 눈물을 온갖 술수와 그럴듯한 수사로 가리고 자기편과 힘 있는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함에 더 귀 기울이는 정권. 악어의 눈물처럼, 뒤로는 짓누르고 가면 쓴 얼굴이 "사랑합니다."를 외치는 광고로는 지금의 민심이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책표지
 책표지
ⓒ 위즈덤하우스

관련사진보기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단어 '칼레의 시민'은 영국과 프랑스간의 전쟁이 한창이던 14세기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와 칼레 시민이었던 생피에르에 얽힌 일화다.

에드워드 3세가 칼레시에 진군하여 전 시민을 몰살하라는 명을 내리자 아량과 자비를 베풀어달라는 요청이 줄을 잇는다. 결국 관용과 자비로 6명의 시민을 선발해오면 그들만 처벌하겠다는 가혹한 명을 내린다.

누가 사형대에 자진해서 서겠는가. 투표를 해서, 제비뽑기를 해서, 범죄자·사형수를 내세울까. 칼레시의 큰 부자 생피에르는 자진해서 나선다. 그 뒤를 잇는 정치가, 부자, 법률가 등의 귀족들. 7명이 되자 처형장에 늦게 나타나는 자를 제외하기로 약속한다.

날이 밝자 생피에르가 보이지 않는다. 어찌된 일인가 모두가 궁금해 하는 사이 소식이 들린다. 그는 집에서 자결했다. 자신이 죽어서 나머지 지원자들의 용기를 북돋으려는 의로운 죽음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시민들. 이를 알게 된 에드워드 3세는 형을 중지하고 시민모두에게 살수 있는 권리를 주게 된다.

우리의 귀족도 과거엔 그런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지금,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존재하는가. 돈 있는 자들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면죄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고 법을 집행하는 이들은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줄을 선다. 돈이 있으면 힘센 나라의 국적을 얻기위해 원정출산을 당연하게 여긴다.

여기 한국, 불타는 망루에서 절규하는 힘없는 이들의 지옥이거나, 하루 20시간 책상에 기대어 '암기노동' 하는 학생들이 존재하는 지옥으로 가고 있는 중간계쯤이 아닐까.

태어나서 말배우기 시작하면 온갖 교재의 압박에 유치원에서 영어를 시작하고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두세 학원을 거쳐 바쁜 일정을 자랑하는 우리 '어린이들'. 놀이를 모르고 공부는 벌써 지겨운 것, 힘든 것, 평생을 지고 가야 할 것으로 인식하는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학을 들어간다고 해도 나아질 것은 없다. 또 다시 취업을 위해 엄청난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

보통 수십 대일의 경쟁을 거치는 일자리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고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비인간화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아주 제격인 곳이다. 이런 곳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내 집을 마련한다는 것은 꿈같은 이야기다. 운이 좋은 자식들은 부모님이 주신 돈에 억 단위의 대출을 보태 겨우 세 식구 몸 누일만한 공간의 전세마련 할 수 있는 곳이 서울이다.

졸업 후 갚아야 할 등록금 대출이 있는 이라면 집을 위한 돈을 모으는 것은 꿈도 못 꾼다. 주거에 대한 불확실성을 안고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직장생활을 통해서 자아성취를 이루는 것은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어버린다. 집 가지고 돈을 통장에 모아 놓았어야 할 지금의 40대· 50대들은 노후에 대한 불안으로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이는 곧바로 사회 불안을 조장한다. 앞으로 생길 많은 노인들을 저출산으로 점점 줄어가는 젊은 세대들이 책임져야 하는 일은 심각한 노소간의 갈등을 조장한다.

사교육, 청년실업, 내 집 마련, 불안한 노년 의 네 개의 개미지옥을 제시한 저자는 심각한 갈등과 분열된 사회를 살고 있는 현실에서 국가를 운영하는 리더들이 좀더 적극적으로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칼레의 시민을 제목으로 낸 것은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먼저 손 내밀어 행동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사회를 이끌어가는 높은 분들이 좀더 포용하고 이해하는 자세를 가져야 양극화, 계층화된 지금에 신뢰라는 희망의 싹을 틔울 수 있다. 의식의 전면적인 개혁과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비정규직에게 오히려 정규직보다 임금을 더 주고' 지배층이 사회를 위해서 자신의 재산을 내 놓을 줄 알아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적극 찬성한다.

덧붙이는 글 | 누가 칼레의 시민이 될것인가/ 이계안 지음/ 위즈덤하우스/ 12,000원



누가 칼레의 시민이 될 것인가?

이계안 지음, 위즈덤하우스(2009)


태그:#칼레의시민, #이계안, #4개의개미지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는데로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데로 살기 위해 산골마을에 정착중입니다.이제 슬슬 삶의 즐거움을 느끼는 중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