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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설연휴 때 이야기. 설날 밤 늦게까지 형님댁에 있다가 돌아와 새벽에야 잠들었는데 거실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날도 추운데 손전화로 하지, 누가 아침부터 일반전화를 했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며 받았더니 형수님이었다.    

"어제 떡이랑 반찬이랑 싸놓았는데 왜 안 가져갔어요. 어설플 테니까, 아침 식사는 '안나 엄마'(아내)랑 집에 와서 하세요. 쇠고깃국이랑 있으니까···."
"알았습니다. 금방 갈게요."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사주겠다는 친구 전화보다 더 반가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설날 다음날이어서 반찬도 푸짐하고, 아내가 쉬는 날인 것을 알고 전화했던 모양이었다.

형수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닮아서, 제사나 명절 때 다녀가는 형제와 조카에게도 음식을 싸주고, 지금도 제사가 끝나면 조기나 박대 한두 마리에 떡 몇 조각이라도 이웃에 돌릴 정도로 나눠 먹는 걸 좋아한다.

전화를 끊고 방에 들어오니까, 아내는 그때까지 꿈나라에서 헤매고 있었다. 펑퍼짐하게 누워 늦잠으로 휴식을 만끽하는 아내 모습이 우습고, 한편 애처롭기도 했다. 그래도 아내를 깨워 사정을 얘기했더니 "그럼 가야죠!" 하면서 벌떡 일어나기에 고양이 세수만 하고는 집을 나섰다.

아내가 운전하는 차가 금강 담수호를 끼고 시원하게 달리는데, '형수 전화의 힘이 이렇게 큰 것인가?' 하고 놀랐다. 아침 먹으러 오라는 한 마디가 명절 오후부터 며칠은 가슴을 파고드는 허전함과 쓸쓸함을 상쾌하게 반전시켜 주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TV 시청하다 이루어진 '진도 여행' 

형님댁에 도착하니까 형수는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곧바로 아침상이 차려졌고, 형님 내외와 둘러앉아 아침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TV를 시청하다 이름난 맛집이 화제가 되었는데 아내가 기사식당 얘기를 꺼냈다. 자기는 기사식당 백반이 맛있더라는 것.

물살이 급한 울돌목 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 제2 ‘진도대교’
 물살이 급한 울돌목 위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사장교 제2 ‘진도대교’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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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작년 9월에 아내와 진도에 다녀오다 음식에 대해 설명까지 들으며 맛있게 먹었던 기사식당이 생각났다. 해서 "우리 진도에나 다녀옵시다! 작년에 안나 엄마랑 먹었던 기사식당에 들러 백반도 사먹고···"라고 했더니 모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진도대교 옆에 '기사식당'이 있는데 음식이 맛깔스럽게 나온다며, 시원하고 담백한 콩나물국과 양념 돼지고기구이, 토하젓, 사각사각 씹히는 열무김치 맛이 일품이고, 겨울에는 파래 비슷한 '감태'가 상에 오른다고 하니까 형님도 구미가 당기는 모양이었다.

듣고만 있던 형수도 "나도 목포랑 진도는 한 번도 못 가봤어요!"라고 말하는 걸 보니까, 싫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내가 형수를 바라보며 "개운한 남도 음식도 먹어보고, 진도 경관도 좋으니까 형님도 가시지요!"라며 박자를 맞추었다.

한가한 설 연휴라서 그런지 의견이 쉽게 모아졌다. 생각지 않았던 여행인데 무엇을 준비하겠는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아내가 운전하는 차에 형님과 형수님을 모시고 정오 조금 못되어 군산을 출발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운전 이야기, 영화 이야기, TV드라마 이야기, 탤런트 이야기가 나오고, 이명박 대통령까지 화제에 올랐는데, 이거다, 저거다, 아니다. 그렇다. 그렇지 아니하다. 된다. 안 된다. 토닥토닥···. 이런 게 다 사는 재미이고, 행복 아니겠는가.

아버지만큼 미웠던 형님, 그러나 지금은

사실 어렸을 때부터 형님을 좋아하고 가까이 지내온 것은 아니다. 곁으로 바짝 다가가고 싶은 마음은 꿀떡 같았지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아버지처럼 귀하고 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부모를 따라 놀러 온 옆집 애들에게는 과자나 과일을 집어주면서 자식들은 문간방으로 몰아냈다. 안방에서 들리는 대화를 엿들으며 "난순네 아줌니가 진짜 우리 엄니라고 허든디, 그 말이 맞는 개비네!"라고 탄식할 정도로 미운 아버지였다.

그런데 형님도 아버지처럼 친구나 후배에게는 잘해주면서 정작 친동생인 나는 마당 구석에 처박힌 헌 빗자루 보듯 했다. 나를 정겹게 부르는 형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자랐으니까. 그러니 아버지와 비슷하게 생각될 수밖에.

형님하고 설악산에 다녀오다 동해안 바닷가에서(1975년11월)
 형님하고 설악산에 다녀오다 동해안 바닷가에서(1975년11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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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 것은 약관의 나이를 넘겨 형님과 술자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75년11월에는 함께 설악산에 다녀올 정도로 가까워졌다는 것. 지금도 하늘인 내려준 축복으로 받아들이는데, 한 분뿐인 형님이고,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작용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형님에게 대들기는커녕 말대답 한 번 하지 않고 살아온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한편,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일까? 예순이 넘긴 나이에도 형님과 음식점에 가거나 여행을 할 때마다 자랑스럽고 행복감을 느낀다.

설 명절 연휴에 형님, 형수, 운전하는 아내와 농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좌우로 펼쳐지는 산야를 감상하며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까? 아침까지도 생각지 않았던 여행이어서 더욱 상쾌했는지 모른다.

형님 내외를 모시고 원거리 여행은 오랜만이었는데 흐뭇했고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옥에 티라고 할까. 눈에 띄는 물체만 있으면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카메라 렌즈를 고정하는 나의 촬영욕심 때문에 일이 벌어졌다. 그냥은 돌아오기 싫었던 취재욕심도 한 몫 했을 것이고. 

 이날(2월15일) 팽목항은 입춘을 시샘하는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 무척 추웠다. 여기까지는 모두 기분이 좋았다.
 이날(2월15일) 팽목항은 입춘을 시샘하는 바닷바람이 세차게 불어 무척 추웠다. 여기까지는 모두 기분이 좋았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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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에 도착해서 밥부터 먹기로 하고, 기사식당을 찾았는데 진도읍을 지나 오후 3시쯤 팽목 항을 거쳐 소치(小癡) 허련(許鍊 1809-1892) 기념관이 있는 '운림산방'(雲林山房)에 도착할 때까지 영업하는 기사식당을 찾지 못했다. 

무안휴게소에서부터 형님이 운전대를 잡았는데, 워낙 배가 고파 운림산방을 들어가지 못하고 출발하려고 했다. 해서 "매표소에서 궁금한 것 몇 가지 물어보고 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도깨비에게 홀렸는지 자꾸 안으로 끌려 들어가 소치 생가와 기념관을 들러 나오는 바람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형님이 화가 단단히 났던 모양인데, 차가 출발한다는 아내 전화를 세 번씩 받을 때까지 해설가 설명과 사진촬영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형수는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밥부터 먹자고 했다. 그러나 형님은 "지금 이 상태에서 먹으면 체한다!"며 군산에 가서 먹겠다고 했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설 연휴라서 그런지 집에서 입술이 아프도록 설명했던 진도대교 옆에 있는 기사식당은 물론, 근처 식당들도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옆집 아저씨에게 물어보니까 주인은 하고 싶지만, 종업원이 없어서 영업을 못 할 거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군산에 가서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진도에서 목포를 거쳐 서해안 고속도로에 진입해서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데 형님이 "함평 휴게소에서 비빔밥 먹고 가자!"라며 입을 열었다. 형님 제의가 얼마나 반갑고 기쁘게 들렸는지 모른다.

한식당 코너에서 해물 순두부 백반 3개, 해물 비빔밥 한 그릇을 시켜 먹으면서 대화가 오갔고, 웃음이 터지기도 했는데, 기분이 얼마나 좋았던지 식대 2만 3천 원을 내고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녁 7시 넘어 형님댁에 도착해서 헤어질 때까지 대화가 끊기지 않았으니까.

6천 원짜리 백반 사먹으려고 군산에서 진도까지 간다면 누구나 깜짝 놀랄 것이다. 나부터도 펄쩍 뛰면서 제정신이냐고 힐난할 것이니까. 그러나 내면에 깔린 깊은 사연을 안다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지난 설 연휴 때 형님 내외분 모시고 다녀온 것처럼.


태그:#형님,형수, #진도여행, #기사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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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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