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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의 한복판, 갈바람에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벌레 먹고 빛 바랜 낙엽들이 나그네의 옷깃을 스치듯 미끄러져 내리는 요즘 같은 날은, 그리운 사람들이 더욱 그립습니다. 십여 년 전인 2001년 3월 11일 72세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안석교 선생님이 참 그립습니다.

안석교 선생님은 한국에서 최고 대학이라 일컬어지는 대학의 물리학과와 동 대학원을 수석 졸업하고 학부 학생들을 가르치던 와중, 우리나라 국비 장학생으로 선정돼 독일정부에서 주는 독일 국비 장학생(DAAD)으로 1958년 이곳, 게르만의 나라 독일에 오셨습니다.

맨 좌측 부터 안선생님, 나그네, 그리고 유학생들
▲ 지난세기 90년대 중반, 알프스 자락에서 맨 좌측 부터 안선생님, 나그네, 그리고 유학생들
ⓒ 조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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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한 의학도에서 핵물리학자로

지난 2001년 <민족21> 5월호에 실렸던 기사에 따르면, 1958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최고 엘리트들을 선발해 '원자폭탄개발의 특명'을 주고 미국과 독일로 유학보냈습니다.

그 유학생 무리에 안석교 선생님도 있었습니다. 안 선생님은 독일에서 하이덴베르크 교수의 촉망받는 제자로 유학생활을 했습니다. 원래는 의학도였으나 들판으로 실습나가 개구리로 해부연습하며 피를 보는 생활이 겁나, 핵 접근이 가능한 이론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꾼 심성 약한 분이었습니다.

안 선생님은 유학시절, 가난하지만 우수하고 심성 착한 유학생들을 도우면서 하루라도 빨리 학업을 마치고 귀국, 후학들을 가르치며 나라에 도움 되는 일을 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정권 연장의 일환으로 조작된 '동백림사건'에 연루돼, 귀국의 기회를 놓치고 망명의 길을 택했습니다.

독일난민수용소 시절 나는 수용소 당국의 허가를 받고(수용소가 속해 있는 지역을 떠나 다른 도시로 여행을 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함) 뮌헨의 안석교 선생님을 찾아 뵈었습니다. 지난 시간의 편린들을 꺼내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 볼까 합니다. 다음은 제가 쓴 수기의 일부입니다(수기는 제가 3년간의 망명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그 동안 살아온 삶을 정리한 것이랍니다).

-1997년 8월 17일-

존경하는 안 선생님 댁에 큰 맘 먹고 다녀왔다. 안 선생님은 뮌헨의 초라하기 그지없는 아파트에서 부인과 단 둘이 사신다. 애석하게도 자녀가 없기 때문이다. 안 선생님은 순박하기 그지없는 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별세계 사람처럼 천진하고 착한 분이다. 올해로 연세가 예순 아홉, 고희를 눈 앞에 둔 나이임에도 경이롭고 신기하게도 세파의 때가 묻지 않은 무공해 농산물 같으신 분이다. 그리고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환한 웃음을 간직하고 계셨다.

안 선생님은 이승만 정권 때 물리학 전공의 국비장학생으로 독일에 유학 오셨다. 물리학을 전공하기 전에는 잠깐 의과대학을 다닌 적도 있었다. 그런데 들녘에 나가 개구리를 잡아 잔인하게(?) 해부하기도 하고 항상 피를 보고 살아야 하는 생활에 적응을 못할 것 같아 전공을 바꾸었다고 한다.

지금도 의아하기 짝이 없는 것은 당시 한국의 정보기관이 어떤 생각으로 순박하고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분을 공작의 대상으로 삼았는지 하는 것이다. 한때 뮌헨 지방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학생들 사이에, '뮌헨에 유명한 빨갱이가 있으니 조심하라'는 언질이 주어졌다고도 한다.

참으로 고소를 금치 못하겠다. 미국의 매카시 망령이 원귀가 되어 한국을 거쳐 독일까지 날아왔는지도 모르겠다. 단언하건대, 안 선생님을 만나지 못하고 귀국한 뮌헨 지방의 유학생들은 이전투구와 아집, 황금만능이 판을 치는 공해 천지의 세상에서 신선한 무공해 산소를 호흡할 절호의 기회를 포기한 것에 대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안 선생님은 북한이 경제 제재와 봉쇄, 그리고 초유의 자연재해로 수많은 아이들이 굶어 죽어갈 때 순수한 인도적 차원에서 아끼고 아낀 사재를 거의 털어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북한당국이 수백만 달러의 거액을 들여 미국의 뉴욕타임스에 체제 선전 광고를 낸 것을 알고는 '아이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데 저게 무슨 짓이고'하면서 혀를 끌끌 차셨던 분이다.

안 선생님은 대자연의 산을 연인을 대하듯 아끼고 좋아하는 분이기도 하다. 지금도 두고 온 조국의 산하가 그리울 때면 뮌헨 주변의 알프스 자락을 찾고는 하시는데, 일흔의 나이에도 3000미터가 넘는 험한 봉우리들을 등정하는 열성을 갖고 있다. 젊은 시절, 마음고생 등으로 해서 완치되기 어려운 병에 걸렸으나 산의 정기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병마는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줄행랑을 쳐 버렸다고 한다.

알프스의 산속에서 고향산천을 그리며

알프스 정기를 마시면서 형성된 안 선생님의 장딴지 근육은 가히 독보적이다. 마치 육체미 세계 챔피언의 우람한 가슴처럼 좌우로 쫘악 벌어진 장딴지 근육은 걸을 때마다 울룩불룩 거리며 춤을 춘다. 안 선생님은 한때는 뮌헨공대에 적을 두고 연구활동을 하셨지만, 지금은 속세를 떠난 도인처럼 알프스 자락을 벗삼아 정말, 아주 작은 공간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다.

안 선생님의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소개한다.

숨이 막힐 정도로 정말 조그만 공간에는 2인용 침대가 대부분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코딱지 만한' 침실 하나, 한 사람이 겨우 설거지를 할 정도로 비좁은 부엌과 서재겸 응접실 겸 식당과 사랑방을 겸하는 4평 남짓한 방 하나가 전부이다.

안 선생님은 산행을 하지 않은 날은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이 서재겸 식당에서 보낸다. 창가 모퉁이에는 거져 주어도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을 수십 년 된 고물 책상이 있고, 맞은 편 모퉁이에는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다. 역시 수십 년 된 골동품이다.

안 선생님 댁에서 유일하게 귀티(?)나는 피아노는 부인 한계일 여사의 몫이다. 부인은 피아노 전공 음악도로 독일에 유학왔다. 장수에게는 칼이 생명이듯 음악도였던 부인에게는 피아노가 생명 아니겠는가. 그래서 안 선생님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피아노가 좁은 서재의 한 쪽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부인은 그 피아노로 지금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오색 무지개 영롱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기도 하고, 울적하거나 이국의 생활이 고달플 때는 건반을 두드리면서 망향가를 부르기도 한다. 나머지 공간은 너덜너덜한 낡은 소파와 20년이 넘었다는, 희미한 화면 때문에 눈이 아린 고물 텔레비전 한 대가 차지하고 있다.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접고 펼 수 있도록 고안된 '고물' 식탁도 하나 있다.

지금은 어느 집에나 있기 마련인 전축은 물론 그 흔한 카세트라디오 한 대 없다. 처음 안 선생님 댁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집안을 둘러보고는 혀가 한 자나 빠질지도 모른다. 부유한 의사 집안의 큰아들로 자랐고, 해외 유학생이 손꼽을 정도로 드물던 시절 집안과 나라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국비 장학생으로 선택된 분의 생활공간이 너무 초라하다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난장에서 중고 물품을 파는 사람들. 직업적인 상인도 있고 그냥 집에서 쓰다가 버리기는 아까운 물건을 팔러나온 이들도 있다. 어른들은 자릿세를 내지만 아이들은 자릿세가 공짜다.
▲ 게르만 나라의 벼룩시장. 난장에서 중고 물품을 파는 사람들. 직업적인 상인도 있고 그냥 집에서 쓰다가 버리기는 아까운 물건을 팔러나온 이들도 있다. 어른들은 자릿세를 내지만 아이들은 자릿세가 공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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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철도 이체에가 지나가는 다리 밑에 '벼룩이'가 감히 폴짝거린다. 폴짝폴짝, 벼룩시장에 오시오.
▲ 벼룩시장 광고판 고속철도 이체에가 지나가는 다리 밑에 '벼룩이'가 감히 폴짝거린다. 폴짝폴짝, 벼룩시장에 오시오.
ⓒ 조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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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평범한 어느 가정을 둘러본들 안 선생님 가정만큼 검소한 집이 있을까. 문명의 이기라고는 고물 텔레비전 한 대가 고작인 비좁은 공간에서 두 분은 책도 읽고 피아노를 치며 식사도 한다. 손님이 방문하면 이곳은 접대실이 되기도 하고, 바닥은 그대로 손님들의 침실이 되기도 한다.

아래를 보며 사는 삶이란...

물욕과는 거리가 한 참이나 먼 안 선생님. 아직도 아잇적 천진함을 얼굴 가득 간직하고 있는 안 선생님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멀리서 찾아와 두 분만의 협소한 공간을 유린하기도 한다. 겸손하고 따뜻하며 편안하기 그지없는 웃음기 가득 머금은 눈매, 그리고 소탈함, 순박함 등이 자연스레 배어 있는 안 선생님의 모습에서 독일 유수의 대학 핵물리학 박사 출신이라는 으스댐이나 권위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안 선생님이 즐겨 이용하는 교통수단은 자전거다. 그 자전거라는 것도 거저 가져가라고 해도 망설이는 고물이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자동차보험처럼 자전거보험도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단다(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험에 들지 않고 대충 타고 다님). 우리의 고지식한 안 선생님, 고물 자전거도 자전거라고 보험에 들었단다. 어느 날 내가 '이제는 저따위 고물은 버리고 새 자전거를 하나 사시라'고 했더니 특유의 천진한 웃음을 환히 지으면서 하시는 말이 걸작이었다.

"조형!(안 선생님은 아들뻘 되는 필자에게도 하오체를 쓰셨다) 글쎄, 나도 이젠 나이도 들고 해서 산행이 점점 힘들어져요. 그래서 그리 가파르지 않은 곳까지는 자전거를 이용하고 있는데, 내 자전거는 너무 낡고 성능도 떨어져서 새 자전거를 장만했으면 합니다. 근데 자전거 가격이 너무 비싸단 말이요.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 중이지요.

누가 저놈의 자전거를 훔쳐갔으면 싶은데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세워 놓아도 거들떠 보지도 않으니 말이야. 저놈을 누가 훔쳐가야 보험금을 받아서 새 자전거를 장만할 수 있겠는데. 하하하."

"아이고, 선생님. 그럼, 저 고물자전거를 누가 훔쳐갈 때까지 기다리면서 그 고생을 하겠다는 겁니까? 순진도 하셔라. 저런 고물을 어느 거지가 훔쳐가겠습니까? 눈 딱 감고 더 이상 고생하시지 말고 새 자전거 하나 장만하십시오."

얼마나 천진한 분인가. 나는 그런 안 선생님을 누구보다 존경한다. '그것은 천진한 게 아니고 바보다'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자전거를 아주 먼 곳에 버리거나 호수 등에 처박아 버리고 도둑 맞았다고 신고하면 간단한 일을 가지고...'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안 선생님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내가 안 선생님을 존경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정도를 벗어나는 언행을 하지 않으신다는 데 있다. 어떻게 보면 좀 고지식하기도 하지만, 돈벌이와 입신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이기주의가 만연한 세태에서 안 선생님 같은 고지식한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앞당겨질 것이라고 나는 감히 단언한다.

나는 그런 안 선생님에게 자전거를 한 대 사 드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고, 또 설사 여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넙죽 받을 분이 아니었기에 안타까움만 간직하고 있을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안 선생님은 거의 모든 생활도구들을 벼룩시장에서 구입한다.

독일은 어느 도시를 막론하고 정기적으로 적당한 공터에서 중고 물품을 파는 난장이 열린다. 독일 사람들의 오랜 검소가 가져다 준 풍속도라 하겠다. 그곳에 가면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생활필수품이 쏟아져 나온다. 안 선생님이 몇 년째 신고 산행하는 등산화는 2마르크(약 1유로)를 주고 샀다고 한다. 똑같은 새 등산화를 상점에서 사려면 수백 마르크를 주어야 한다.

등산화뿐만 아니다. 배낭, 등산복, 모자, 지팡이 등 안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물품들이 난장에서 구입한 것들이다. 잘만 고르면 새것에 버금가는 물건도 고를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난장의 단골 고객인 안 선생님은 이젠 중고 물건 고르는 전문가가 됐다. 고국의 부유한 형제자매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기절초풍하겠지만 말이다(안 선생님은 9형제 중에서 기둥이었고 가장 기대주였다).

다른 도시에 사는 지인을 방문할 때면 버스비를 아끼려고 기차역에서 십수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지인의 집까지 배낭 속에 넣고 다니는 빵조각으로 끼니를 대신하며 걸어가는 분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게 가난한 분인가?'하거나 '정말 지독한 구두쇠로군'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안 선생님은 여유가 많은 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새 자전거 한 대 사지 못할 만큼, 또 버스비가 없을 만큼 가난하지는 않다. 중고 물건을 수선해서 쓸 만큼, 손바닥만한 방 하나에서 수십 년을 살아올 만큼 찢어지게 가난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지독한 자린고비 임에 틀림없군'하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도 있겠다. 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결론이다. 안 선생님 자신에게는 자린고비가 '형님'할 정도로 인색하다. 먹는 것, 쓰는 것, 입는 것, 여가비로 지출하는 것 등에 들어가는 경비에는 정말 전전긍긍하신다.

물론, 여기까지는 자린고비가 형님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자신의 몸에 헌 옷이나 입히고, 자신의 입에 딱딱한 빵 조각이나 물리는 천대(?)를 하면서 절약한 돈은 아낌없이 주변의 어려운 사람이나 때로는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의 아이들에게 돌려주신다.

나는 안 선생님 댁을 방문할 때마다 집안의 초라함에 괜히 주눅들고는 한다.

이렇게 초라하게 사실 분이 아닌데···. 모든 가능성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 핍박 받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본인 스스로도 가난하게 살아가시는 분, 그러나 마음만은 언제나 부자인 분, 그러면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시는 분, 화려한 경력과는 달리 순박함을 간직하고 계시는 분, 그런 안 선생님에게 노동자, 학생들은 물론, 조국의 많은 명망가들도 초라하기 그지없는 자그마한 안 선생님의 서재 바닥에서 잠을 자고 갔다.

'지금 병상에 누워 계시는' 우리 시대의 걸출한 어른이신 리영희 선생님도, 오래 전에 타계한 유인호 선생도, 안 선생님의 조그만 서재 신세를 졌던 분들이다. 나는 산을 좋아하시는 안 선생님과 언젠가는 한라산과 백두산을 함께 등정할 꿈을 간직하고 있다.'(이상)

싸늘한 시신 붙들고 통곡, 오늘일처럼 기억 생생

넋이나마 고향산천의 하늘을 훨훨 날으소서. 그리운 님이여!
▲ 산을 좋아해서 산으로 돌아간 자연인, 그러나 여기는 이녁의 땅 넋이나마 고향산천의 하늘을 훨훨 날으소서. 그리운 님이여!
ⓒ 조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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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선생님은 2001년 3월 11일, 고국에 두고 온 어머니와 형제자매, 고국산천을 그리워하며 망향가를 불러보고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알프스 산행에 나섰다가 하산하면서 실족, 유명을 달리하셨습니다. 당시 나는 몇몇 젊은 지인들과 한걸음에 달려가 안 선생님의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신을 붙들고 서러운 통곡을 토해냈던 기억이 오늘처럼 생생합니다.

깊어가는 가을,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온몸으로 아래를 보며 살다간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태그:#자연인, #원자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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