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0월의 마지막날, 하회마을전수회관에 들어서니 공연장이 사람들로 꽉 차있다. 가족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 단체로 놀러온 아저씨·아주머니 관광객들, 생김새가 다른 외국인들 모두가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보기 위해 모여 앉았다.

2년 전 안동하회마을을 방문한 이후 두번째로 찾는 것이지만,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처음이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상설공연으로 이뤄지고 있지만 안동하회마을에 간다고 언제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년 중 따뜻한 봄이 시작되는 3월부터 추운 겨울이 시작되는 12월까지만 공연이 이뤄진다. 그것도 매주 세번 수, 토, 일요일 오후 2시 하루 한차례만 관람이 가능하다. 입장료가 없어서 날짜와 시간만 잘 맞춘다면 누구나 볼 수 있다.

많은 인파가 모여 다닥다닥 붙어앉기는 해야 하지만 다행히 사진찍기 좋은 위치를 찾아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어느정도 장내 정리가 끝나고 나면 공연팀의 대표자가 나와 하회별신굿탈놀이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해준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녹취를 했지만 그것마저도 처음부터 하지 못해서 공연 후 산 소책자에 기초를 두고 정리를 해보자면 이렇다.

'안동하회마을에는 선유줄불놀이와 하회별신굿탈놀이, 이 두가지의 민속놀이가 전해져오고 있다. 선유줄불놀이가 양반들이 즐기는 놀이었다면 하회별신굿탈놀이는 상민들에 의해서 즐겨지던 탈놀이이다.

예전 우리 선조들은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면 신의 노여움을 샀다고 여겨 주민들이 중심이 된 굿판을 벌이곤 했는데 하회별신굿탈놀이도 그와 같은 주술의례이다. 또한 상민들은 이 탈놀이를 통해 당시 지배계층의 허구성이나 불교계의 타락성을 풍자하며 불만을 해소하기도 했다.

하회별신굿탈놀이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별신굿을 하기 앞서 신내림과정으로 행해지던 강신(降神), 신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의례인 별신(別神), 함께 즐겼던 신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는 송신의례인 당제의 과정이다. 이 세가지의 과정 중 안동하회마을에서 보여지는 공연은 두번째 의례인 별신과정이다.'

한국어에 이어 유창한 영어로 설명을 끝낸 사회자가 퇴장하고나면 별신굿탈놀이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성황신 맞는 '각시광대'에 이어, 암수 주지의 싸움

하회별신굿탈놀이 무동마당
 하회별신굿탈놀이 무동마당
ⓒ 최지혜

관련사진보기


첫번째 마당은 무동마당이다. 징, 북, 장구 등을 들고 풍악을 울리며 놀이패가 들어오고 뒤이어 무동꾼의 어깨위에 올라탄 각시광대가 들어온다. 각시광대가 무동을 타는 것은 성황신을 마을로 맞이하는 것을 상징한다. 각시광대를 현신으로 내세운 이유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하회탈에 관한 전설이 있다.

허씨들이 마을에 들어와 살 때 마침 원인을 알 수 없는 우환이 계속되었는데 그때 산신령이 허 도령의 꿈에 나타나 탈을 만들어 춤을 추면 신의 노여움이 풀리고 마을이 평안을 찾을 것이라며 단, 아무도 모르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허 도령은 산신령이 일러준대로 동네 어귀 으슥한 곳에 움막을 짓고 탈을 제작하게 되었는데, 허 도령을 흠모하던 한 여인이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찾아가 탈을 제작하는 것을 보고 말았다. 이에 허 도령은 그 자리에 피를 토하고 죽었고 여인은 죄의식에 자결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 여인의 혼을 위로하고자 각시탈을 현신으로 내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허 도령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한 때문인지 각시탈의 얼굴엔 표정이 없고 우울하다.

하회별신굿탈놀이 주지마당
 하회별신굿탈놀이 주지마당
ⓒ 최지혜

관련사진보기


무동마당이 끝나고 나면 주지마당이 시작된다. 주지는 사자의 형상에 새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상상속의 동물이다. 암수 한쌍이 삼베 포대기를 뒤집어 쓰고 등장하여 춤을 추며 정답게 놀다가 싸움이 난다. 머리를 들이대며 한판 싸움이 끝난 후에는 결국 암컷이 수컷 위에 올라타며 승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싸움에서 암컷이 이기는 것은 다산과 풍농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노부부의 '청어 다툼'에도 담긴 당시의 시대상

하회별신굿탈놀이 백정마당
 하회별신굿탈놀이 백정마당
ⓒ 최지혜

관련사진보기


총총 걸음으로 뛰어나온 초랭이가 주지를 쫓아내고 나면 사나워보이는 인상만 봐도 신분이 딱 드러나는 백정이 짚으로 엮은 바구니를 들고 어깨춤을 추며 등장한다. 이마에 있는 큰 점이 인상적이다.

잠깐의 시차를 두고 뒤이어 소 한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나타난다. 관객들 주변을 맴돌며 한쪽 다리를 들고 오줌보를 갈겨대는 모습에 관객들의 웃음이 터진다. 점잖을 빼고 있던 외국인 노신사까지도 이 부분에서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그것도 잠시. 관객들을 희롱하던 소의 운명도 백정의 손에 끝나고 만다. 몇번의 망치질에 소는 바닥에 고꾸라지고 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배를 가른다. 순간 관객석에는 침묵이 흐른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거침없는 손을 주시하고 있을때, 그는 빨간 염통을 꺼내들고는 관객들에게 흥정을 붙인다. 반응이 시원찮자 바구니에서 비장의 카드를 빼내든다.

"우랑사이소~"

생김새로 보아 우랑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하지만 일부 짓궂은 관객이 모르는 척 질문을 던진다.

"그게 뭐요?"

그런 반응에 너무도 익숙해 있을 백정이 그 말에 당황할 리 없다.

"소불알이요."

공자도 자식 놓고 살았다고 하며 자식을 볼려면 양기가 있어야 되고 양기가 세려면 바로 이 소불알을 먹어야 한다며 관객들을 꼬드긴다. 이 같은 대사는 겉으로는 성을 금기시하면서 뒤에서 몰래 성을 즐기는 유교체제의 도덕성을 비판한 것이다. 백정은 관객들의 쌀쌀한 반응에 포기를 한 듯 춤판이나 벌이겠다며 망치와 칼을 들고 춤을 추고 그렇게 백정마당은 끝이 난다.

하회별신굿탈놀이 할미마당
 하회별신굿탈놀이 할미마당
ⓒ 최지혜

관련사진보기


한이 담긴 할미마당이 시작된다. 허리가 굽어지고,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할미가 조용히 등장한다. 눈은 단추구멍처럼 작고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며 이가 다 빠져 입은 휑하니 뚫려 있다. 이마는 푹 패여서 그야말로 볼품이 없는 모습이다.

할미는 베를 짜며 베틀가를 읊조린다. 시집 간 지 사흘 만에 과부가 되어 겪은 삶의 고통과 애환을 관객들을 향해 뱉어낸다. 베틀가가 끝나고 나면 어디선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할마이, 어제 내가 장에 가서 사온 청어는 다 먹었나?"
"어제 저녁에 당신 한 마리 내가 아홉 마리, 오늘 아침에 내가 아홉 마리 당신 한 마리 한 두름 다 먹었잖소."

이 노부부의 청어 먹는 다툼도 역시 시대상을 반영한다. 청어 한 두름을 독식한 할미의 대응은 가부장적 권위를 부정하고 남녀 간의 상하관계를 비판하는 것이다. 힘없는 몸놀림으로 베를 짜며 관객들의 동정심을 유발한 할미는 쪽박을 들고 동냥을 한다. 이 할미의 마음에 동해서인지 관객들의 지갑은 쉽게 열린다. 통크게 만원짜리 지폐를 내주는 아저씨가 있는가 하면 아이들의 손에 천원짜리를 쥐어주는 엄마들도 있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는' 초랭이의 활약

하회별신굿탈놀이 파계승마당
 하회별신굿탈놀이 파계승마당
ⓒ 최지혜

관련사진보기


기분이 좋아졌는지 돈이 가득 담긴 쪽박을 들고는 덩실덩실 춤을 추던 할미가 퇴장하고 나면 고운 자태의 기생 부네가 등장한다. 샛노란 저고리에 파란 치마를 걸친 부네는 계란형 얼굴에 연지곤지를 찍고 있으며 반달모양의 순한 눈매가 인상깊은 전통적인 미인형이다.

하회별신굿탈놀이에 등장하는 여성탈들은 남성탈들과 달리 턱이 분리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문화해설사는 이 이유에 대해 여자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살았던 그 당시의 시대상을 표현한다고 설명한다. 부네 역시 조그만 입을 차분하게 다물고 옅은 미소만 띠고 있을 뿐, 말을 하지 않는다.

흥에 겨워 춤사위를 펼치던 부네가 갑자기 용변에 급해 주변을 살핀 후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치마를 걷고 볼일을 본다. 그때 길을 가던 스님이 우연히 이 광경을 목격하고 만다.

"여보 각시, 사람 괄세 하지마소. 일가산에 사는 늙은 중이 이가산 가든 길에 삼로노상에서 사대부녀를 만나 각시 오줌 냄새를 맡고 욕정이 치밀어서 칠보단장 안해도 팔자에 있는 동 없는 동 그거 구별할 게 뭐입니껴?"

욕정을 참지 못하고 부네에게 치근덕거리는 스님의 모습에서 당시 불교와 스님들의 타락성을 볼 수가 있다. 주위를 맴돌며 부네를 유혹하는 것에 성공한 스님은 그녀를 들쳐업고 빠져나가고 이 광경을 초랭이가 목격한다.

주지마당에서 잠깐 등장했던 초랭이는 동그랗게 파인 눈에 주먹코, 삐뚤어진 입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는 생김새다. 하지만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하라'는 옛말은 초랭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탈놀이판에서 여인네와 놀아나는 중을 비난하고, 양반을 희롱하는 역할을 순전히 초랭이의 몫이다.

외국인과 함께 즐기는 하회별신굿탈놀이
 외국인과 함께 즐기는 하회별신굿탈놀이
ⓒ 최지혜

관련사진보기


스님의 타락상을 목격한 초랭이는 친구 이매를 불러내 목격한 사실을 일일이 열거하지만 순박하기만 한 이매는 믿지 않는다. 파계승마당과 양반선비마당의 중간에 끼어있는 이매가 등장하는 마당은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압권이다.

초랭이의 요청에 싫은 듯 억지스럽게 춤사위를 시작하는 이매는 관객을 놀이판으로 적극적으로 이끌어낸다. 백인, 흑인, 황인 등을 모두 놀이판에 합류시켜 함께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 속에서 뜨거운 피가 끓어오른다. 지구촌이 하나됨을 느끼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리의 탈놀이가 있다.

하회별신굿탈놀이 이매탈
 하회별신굿탈놀이 이매탈
ⓒ 최지혜

관련사진보기


이매탈은 턱이 없다. 전설에 의하면 허 도령이 탈을 만들다 죽어버리는 바람에 마지막으로 만들고 있던 이매탈을 미처 완성하지 못한 이유라고 한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매탈이 더욱 맑고 천진난만해 보이는 미소를 자유롭게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꽹과리 소리에 귀막던 나도 빠져버린 하회별신굿탈놀이

하회별신굿탈놀이 양반선비마당
 하회별신굿탈놀이 양반선비마당
ⓒ 최지혜

관련사진보기


이매와 관객들이 하나된 신명나는 한판이 끝나고 나면 양반과 선비가 거만한 걸음걸이로 등장하며 양반·선비마당이 시작된다.

양반탈은 하회탈의 대표격으로 양반 특유의 여유로운 웃음을 짓고 있으며 선비탈은 툭 튀어나온 인상이 불만에 가득찬 표정이다. 둘은 춤을 추다가 서로 학식이나 지체가 더 높다며 자존심대결을 펼친다. 양반이 사서삼경을 깨우쳤다하면 선비는 육서팔경을 깨우쳤다며 맞선다. 둘의 대화를 듣고있으면 어이없는 헛웃음이 툭툭 튀어나온다.

뒤이어 백정이 아직도 팔지 못한 우랑을 들고 등장하여 그들에게 흥정을 건다. 처음에는 거들떠도 안보던 그들은 양기에 좋다는 말에 서로 자기 것이라며 또 싸움이 붙는다. 그들이 하는 짓이 유치하기 짝이 없다.

하회별신굿탈놀이의 마지막 마당에서는 신분을 내세워 군림하는 당시 지배계층들을 비난하고 풍자함으로써 상민들의 억눌린 감정을 해소한다. 이렇게 숨가쁘게 지나온 여섯마당을 끝으로 하회별신굿탈놀이는 끝이난다.

하회별신굿탈놀이 출연진들 인사
 하회별신굿탈놀이 출연진들 인사
ⓒ 최지혜

관련사진보기


굿, 마당놀이, 탈놀이 등 평소에 관심조차 없었던 것들이었다. 나는 어디선가 꽹과리 소리가 들려오면 시끄럽다고 귀를 막는 한국인답지 않은 한국인이다. 그런 내가 말한다. 안동하회마을을 가게 되면 꼭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보시라. 그 내용에 감탄하고, 그들의 몸짓에 반하며, 한국인임에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다.


태그:#안동하회마을, #하회탈, #하회별신굿탈놀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