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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11월 10일이요?"


순간 가슴이 철컥 내려앉았다. 고단했던 호주 워킹홀리데이의 종착점이었던 여행이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왔는데 숙소가 11월로 예약되어 있었다니… 우리가 프레이저 아일랜드에 도착한 날은 정확히 12월 10일(2009년)이었다. 예약을 담당한 친구의 잘못인지 여행사의 잘못인지는 알 수 없지만 버스에 배까지 타고 6시간을 꼬박 걸려 섬에 도착한 우리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었다.

고래가 많기로 유명한 하비베이. 여기서 배를 타고 30분을 가야 프레이저 아일랜드에 도착한다.
▲ 하비베이(Harvey Bay) 고래가 많기로 유명한 하비베이. 여기서 배를 타고 30분을 가야 프레이저 아일랜드에 도착한다.
ⓒ 이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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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이라도 주세요"

여행사와의 실랑이가 시작됐다. 여행사는 계속 내 친구에게 책임을 물었다. 친구가 분명 11월으로 예약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됐다. 친구가 예약을 하러 간 날이 11월 22일인데 우리가 예약을 원한 날이 11월 10일이라니. 이미 이용이 끝난 날의 방을 예약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 않은가. 대답은 안하고 계속 서류만 검토하던 여행사는 한 시간의 긴 통화끝에 결국 우리에게 사과를 했다. 리조트 측과 상의해서 다른 방으로 대체해 준다고 했는데 마침 12월은 호주 여행의 성수기라 남은 방이라고는 구석지고 작은 방들뿐이었다. 이미 섬에 들어온 우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방이라도 주세요". 우리는 힘없이 짐을 풀었다.

사하라 사막보다 모래가 많은 세계에서 가장 큰 모래섬 

간단히 자연보호교육을 받은 후 사륜 구동차를 타고 섬 투어에 나섰다. 호주 퀸즐랜드주의 동쪽에 위치한 프레이저 아일랜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모래섬이다. 100만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모래가 퇴적되어 세계에서 가장 큰 모래섬이 되었다고 하는데 섬 전체가 모래로 되어 있어 걸어다니면 길이 푹푹 꺼진다. 걷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라서 관광객들은 20~30명씩 나뉘어 사륜구동차를 타고 이동한다. 그렇게 섬을 둘러보자 "어라?"하는 생각이 든다. 모래섬이라고 해서 사막같은 황량한 섬을 상상했는데 큰 열대나무들이 여기저기 우거져 있기 때문이다. 가이드의 말을 듣고보니 원래 이 섬은 큰 열대우림과 200여개의 호수로 유명하다고 한다. 바다로 둘러쌓여 있는 섬 안에 또 수많은 호수와 열대나무라니… 왜 프레이저 아일랜드가 신비로운 섬인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곳곳에서 이런 열대나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섬 안의 열대우림 곳곳에서 이런 열대나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이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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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오길 잘했어!"

하늘을 뚫을 듯 높이 솟아 있는 열대나무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더니 그 사이에 하늘을 품은 호수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무슨 섬에 나무만 잔뜩 있냐고 툴툴대던 친구가 그제서야 함박 웃음을 짓는다. 호주를 떠나기 전 호주 반바퀴 여행을 계획한 우리에게 사실 프레이저 아일랜드는 마지막까지 뺄까 말까를 고민했던 여행지였다. 모래섬에 별 거 있겠냐는 친구와 세계문화유산이 그냥 됐겠냐는 내가 팽팽히 맞서다 결국 가위바위보로 정해진 여행 코스다. 하지만 호주에서 1년을 보내며 늘 바다만 봐왔던 우리에게 호수는 묘한 매력을 풍겼다. 우리가 처음 만난 호수의 이름은 와비 호수. 코알라가 먹는 나무로 유명한 유칼립투스 나무들로 둘러쌓여있다. 살짝 손을 담궈보았더니 놀랍게도 그 물 속이 너무 따뜻하다. 운이 좋으면 호수안에 살고 있는 연어, 거북이와 수영할 수 있다는데 우리에겐 다음 호수가 기다리고 있어 짦은 만남을 뒤로 한 채 떠나야 했다.

에메랄드 빛을 내는 고요한 와비호수의 모습
▲ 와비호수 (Lake Wabby) 에메랄드 빛을 내는 고요한 와비호수의 모습
ⓒ 이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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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간단히 샌드위치로 점심을 때우고 다음 호수로 향했다. 우리는 내심 기대에 부풀었다. 프레이저 아일랜드 여행을 계획하며 이 호수의 사진을 본 적 있는데 첫 눈에 "우와"라는 감탄사밖에 나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하얀 모래와 투명한 물빛으로 유명한 이 호수는 맥켄지(Mckenzie) 호수다. 감탄하고 뭐고 할 시간도 아까웠던 친구와 나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는 사진 서너 장만 찍고는 바로 호수에 뛰어들었다. 맥켄지 호수는 프레이저 아일랜드를 찾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물의 온도가 따뜻해 수영을 하기에 적합하고 물안경 없이도 물 속을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기 때문이다. 또, 섬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에서는 식인상어의 출몰이 잦아 수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리조트 내부의 인공 수영장이 아니면 호수에서 수영을 즐겨야 한다.

함께 호수를 찾은 관광객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다.
▲ 맥켄지 호수 (Lake mckenzie) 함께 호수를 찾은 관광객들이 수영을 즐기고 있다.
ⓒ 이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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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지키고 있는 낡은 배 하나

2시간이 넘게 물 속에서 놀았더니 배가 출출해진다. 물 밖으로 나왔더니 어떻게 알았는지 가이드가 따뜻한 핫초코와 머핀을 준비해 놓았다. 우리와 같은 사륜차를 탄 세계 곳곳에서 온 관광객 20여 명과 함께 간식을 즐긴 뒤 우리는 바다로 향했다. 섬이 커서 그런지 75마일이상 해변가가 길게 이어진다. 그래서 이름도 75miles Beach(75마일 해변)이다. 해변가를 따라 쭉 가다보면 장고의 세월은 견딘 듯한 난파선 한 대를 만나게 된다. 마헤노 난파선은 1905년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만든 배로 1차 세계대전 때 일본에 팔려서 병원선으로 이용되다가 1953년 7월 사이클론에 의해 난파되어 이 섬에 떠내려왔다. 이 난파선이 있는 곳은 프레이저 아일랜드의 푸른 바다와 묘하게 대비를 이루며 관광명소가 되었다. 호기심 많은 독일 남자가 배를 만졌다가 가이드에게 혼이 났는데 그도 그럴 것이 만지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부식해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와 맞닿아 있는 난파선이 묘한 풍경을 자아낸다.
▲ 마헤노 난파선(Wreck of the Maheno) 바다와 맞닿아 있는 난파선이 묘한 풍경을 자아낸다.
ⓒ 이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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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생각나는 그 곳, 프레이저 아일랜드

섬 곳곳을 구경하다 밤 늦게 리조트로 돌아온 우리는 식사를 마친 뒤 바로 곯아 떨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다음 여행지인 골드 코스트로 떠나기 위해서 아쉽지만 서둘러 프레이저 아일랜드를 떠나야 했다. 1박 2일로 짧게 여행한 곳이었지만 1년이 지난 지금도 종종 생각이 나는 곳이다. 날짜가 잘못 예약되어있던 리조트에서의 아찔한 순간과 맥켄지 호수의 따뜻함, 수영 후 즐겼던 머핀의 달콤함도 자꾸만 그리워진다. 아쉬움이 남는 짧은 여행이라 더 기억에 남고 애틋한건지 오늘도 나는 여행하며 찍었던 사진을 보며 프레이저 아일랜드를 떠올려 본다.


태그:#프레이저 아일랜드, #호주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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