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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여성, 여성을 말하다'는 세대별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인물 르포입니다. [편집자말]
두 달 전, 선혜(가명·18)는 대학 수시모집 전형에 응시하고 싶다고 했다. 막 고3 새학기를 시작한 3월 초였다. 다시 만난 5월 중순, 상황이 바뀌어 있었다. 선혜는 중간고사 성적표가 곧 나온다고 걱정하는 등 일상적인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최근에 취업면접을 봤거든요. 붙었는데 엄마한테 말 안 했어요"라면서 신상의 변화가 대수롭잖다는 듯 말을 꺼냈다.

"담임 선생님이 어느 날 원서종이를 주시더니 이것만 작성해서 오래요. 전 무슨 회사인지 몰랐어요. 그냥 좋은 회사래요. 연봉이 2100만 원이 넘는다고…. 월급 180 정도 받는 거잖아요. '아, 그 정도는 괜찮다' 해서 원서를 넣었어요. 선생님이 이메일로 원서 접수한 후에 어디냐고 물어보니까 그제야 선생님도 회사 홈페이지를 딱 열었는데 속옷회사였던 거예요. 선생님이 미안하다면서 사무직이나 생산직인 줄 알았는데 판매직이래요. 속옷을 팔아야 한다는 건데 전 그것도 모르고 원서를 넣었고 면접 날짜 나왔잖아요. 취소를 못 하잖아요."

그렇게 실업계고 3학년 선혜는 올해 학교로 의뢰 온 첫 취업면접에 응시했다. 그의 학과는 웹디자인과지만 그는 그와 전혀 무관한 속옷 판매직 면접을 봤다. 실업계고에서 전공 살려 취업하던 시절은 옛일이 됐다. 선혜 역시 "그건 성적 맞춰 택한 것뿐"이라며 전공을 개의치 않는다. 그의 반 친구들 중 웹디자인에 관심 있는 애는 "한 명뿐"이란다.

외모, 성적, 성별에 따른 차별은 가족 안에도 있어

선혜 말고도 세 명의 학교 친구가 같은 회사 면접을 봤다. 선혜는 "이력서 칸을 웬만큼 채울 수 있는 애들이 뽑힌 것 같다"고 선택기준을 추측했다. 그는 고등학교 들어와서 영어단어경시대회 등 영어 관련해서 여러 번 상을 탔다. 글짓기를 잘 해 백일장에서 받은 상이 많은 친한 친구도 함께 면접을 봤다. 그 친구는 어떤 회사인지, 어떤 일인지 다 알면서도 원서를 냈다면서 선혜가 친구의 사정을 전한다.

"걔네 집은 엄마, 아빠가 다 있는데 가족이 가족 같지 않고 집안관계가 불안불안하대요. 특히 얘가 3남매 중 둘째인데 그러다보니까 샌드위치로 당하는 거예요. 언니가 공부를 잘해서 4년제 대학에 다닌대요. 게다가 예쁘고 날씬한데 얘는 키도 작고 좀 통통한 편이거든요. 그래서 비교가 되고…. 또 막내는 남자애여서 걔는 걔대로 예쁨을 받다 보니 빨리 집에서 나오고 싶대요."

외모, 성적, 성별에 따른 차별은 바깥 사회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가족 안에서의 차별이 더 뿌리 깊다. 하지만 선혜 친구의 이런 절박함이 면접관들에게까지 전달되지는 못했다. 응시자 7명씩 들어가서 본 집단면접에서 선혜의 친구는 너무 긴장했다. 면접관들과 그와의 대화는 단 15초만에 끝났다.

선혜가 그 다음이었다. '면접이 어떤 건지 경험이나 쌓자, 붙어도 가기 싫으면 가지 말자'고 편하게 생각하고 갔던 선혜는 짧게 어느 학교에 다니는 누구라고만 자기소개를 했다. 그런데 면접관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성적, 가족관계 등을 확인하고 봉사경력란에 적힌 내용을 궁금해 했다. 선혜는 매주 금요일 혼자 사는 노인분들에게 도시락 배달을 하고 있다. 중3 때 봉사시간이 필요해서 시작했는데 봉사시간을 채운 후에는 "그냥 나오기 뭐해서" 지금껏 계속 하고 있단다.

다른 이유도 있다. 시골에 혼자 계신 외할머니가 생각나서다. 자신이 여기서 하는 만큼 시골에 계신 외할머니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을 거라 믿는다. 그렇게 "우리 외할머니한테 간다"는 마음으로 금요일마다 도시락 배달을 간다. 그것 때문에 면접 점수를 높게 받은 것 같다고 선혜가 시원스럽게 합격이유를 분석한다.

아빠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됐던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들의 공포를 다룬 영화 영화 <앵그리맨>
 폭력적인 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들의 공포를 다룬 영화 영화 <앵그리맨>
ⓒ 앵그리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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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혜에게 외할머니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존재다. 일곱 살 때까지 외가에서 자랐다. 외할머니가 단순히 유년시절을 돌봐줬기 때문만은 아니다. 외가를 떠나온 이후 그의 삶이 악몽 같았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올라와서 선혜는 도시 아이들과 어울리는 게 힘들었다. 학교생활도 낯설기만 했다. 선혜 아빠는 그런 선혜를 더 엄하게 대했다. 선혜는 "아빠가 남자애처럼 키웠다"고 표현했다. 초등학교 1, 2학년밖에 안 된 아이에게 몇 시간씩 엎드려뻗쳐를 시켰던 아빠다. 빗자루가 부러질 때까지 맞았던 적도 수없이 많다. '일기를 안 썼다'와 같은 사소한 문제가 무차별한 매질의 명분이었다. 그 매질이 선혜에게로만 향했던 건 아니다. 엄마는 물론 선혜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여동생도 아빠의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선혜는 "아빠하고 살았을 때, 아빠하고는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얘기했어요"라고 말했다가 정정한다. "아니, 아예 얘기하는 거 자체를 못 했어요. 왜냐, 아빠의 기에 짓눌려 버리는 거예요."

처음 만났을 땐 엄마와 아빠가 이혼했다고만 했던 선혜는 두 번째에야 부모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줬다. 선혜 엄마에게 아빠는 첫남자였다. 아는 언니의 소개로 만났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글 읽는 것도 서툰 엄마다. 선혜는 "엄마가 이 남자 아니면 누굴 또 만날까 싶어서 결혼한 것 같다"고 짐작했다. 선혜 표현대로라면 "그렇게 어린 것도 아닌" 스물 셋에 선혜 엄마는 결혼했다.

선혜와 여동생이 유년을 외가에서 보낼 정도로 그의 엄마, 아빠는 바빴다. 작은 봉제공장을 운영했다.

"아빠가 공장했다고 하면 다들 집이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죠. 아빠는 술, 담배, 경마 이런 쪽에 돈을 무슨 후원하듯이 썼어요. 아빠 지갑은 한 달에 딱 하루, 돈 들어오는 날만 차 있죠. 다른 날은 텅텅 비어있고…. 그래서 집도 그 집에 몇 년째 살고 있고요."

선혜네는 단칸방에 산다. 화장실도 집 바깥에 있다. 그래서 선혜는 밤에 '절대' 화장실에 안 간다. 처음 만났을 때 선혜는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내 방이 있었으면 좋겠어요"라고 소원을 말했다.

아빠가 봉제공장 사장인 건 얻을 것은 없고 피해만 주는 일이었다. 아빠는 선혜 자매에게 만날 라벨을 자르라고 했다. 옷에 넣는 심지와 천을 심지 하나, 천 하나 식으로 겹쳐놓고 다리미로 지지는 일도 했다. 몇 천 장씩 하다 보면 손은 감각을 잃어갔다. "직원들은 다른 더 중요한 일 해야 하니 너희가 이걸 도와라. 돈 줄게" 했던 아빠는 그렇게 일한 선혜 자매의 손에 몇 천 원을 쥐어줬다.

일만으로도 힘들었던 자매에게 아빠의 폭력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지금은 잠을 자는 밤이 좋은데 그때는 집에 네 식구가 있는 게 제일 싫었어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아빠가 폭력을 휘두르다 보면 어떤 걸 던질지 몰라요. 공장을 하다 보니 쇳덩이가 많잖아요. 그걸로 머리 엄청 맞았어요. 엎드려뻗쳐 몇 시간씩 시키면 이마에서 땀이 눈물 떨어지듯이 뚝뚝 떨어져요. 그렇게 진을 다 빼놓은 상태에서 또 때리니까…. 이건 완전히…. 그때 신고를 했어야 하는데…."

손목 그은 것보다 엄마, 아빠가 그 마음 몰라줘서 더 아파

열다섯도 안 되는 어린 소녀에게 아빠는 범접하기 힘든 거대한 벽이었다. 경찰 신고 등은 꿈도 못 꿨다. 학교 갔다가 중간에 '땡땡이' 치고 나오기 등의 소심한 반항을 했다. 엄마한테 주걱으로 맞은 날엔 가출도 감행했다. 그런데 중1때라 "개념이 없어서" 동네를 돌아다니다 엄마 눈에 띄어 다시 잡혀갔다. 그 뒤로도 몇 번 집을 나가기도 했지만 마음이 약해 엄마의 돌아오라는 연락에 돌아왔다.

마음은 약한 선혜였지만 자기 몸을 학대하는 데는 주저함이 없었다. 자살시도를 여러 번 했다. 수면제는 구할 수 없고, 뛰어내리는 건 고소공포증이 있어 못 했다. 무조건 아픔이 있는 걸로만 했다. 손목을 긋는 것과 같은….

아픔에 무뎌진 몸이었다. 선혜가 말한다.

"어렸을 때 과자를 먹고 싶은데 가위가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칼을 갖고 와서 손 위에 과자 봉지를 두고 막 칼질을 해댄 거죠. 그런데 봉지가 안 뜯어져요. 또 어디서 피가 뚝뚝 떨어져요. 보니까 손가락이 아예 뼈가 보일 정도로 돼 있는 거예요. 근데 전 그 정도의 아픔도 몰랐던 거잖아요. 자살하려고 했을 때도 그렇게 큰 아픔이었을 텐데 그땐 몰랐어요."

몸보다 마음의 아픔이 더 컸다. 자살시도 실패 후 병원에서 3일 동안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가뜩이나 밤을 무서워하는 선혜를 혼자 남겨두고 그의 엄마, 아빠는 집으로 갔다. 지금도 선혜는 엄마, 아빠가 그때 왜 그랬는지 이해가 안 된다. 울면서 "왜 그랬냐?"고 묻기도 했지만 제대로 된 대답을 못 들었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아빠와 엄마를 내쳤다. 엄마한테 적극적으로 이혼하라고 하지 않았던 이유도 집에서 마음이 떠났기 때문이었다.

"저 혼자 살기 바빴죠. 집에선 '니네들 싸워라, 난 알 바 아니다' 생각했어요. 친구랑 집을 탈출할 궁리만 하고…."

ⓒ 최지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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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선혜의 엄마가 이혼을 결심한다. 10여 년을 남편에게 걸핏하면 맞아오면서도, 남편이 그의 공장에서 일하는 선혜 동생 친구의 엄마와 바람이 난 걸 알면서도 유지해 왔던 결혼생활이었다. 선혜가 중3이었던 어느 날, 아빠가 또 매를 들었다. 동생에게 집식구들만 아는 얘기를 밖에 한 사람이 너냐고 물었다. 동생의 "아니"라는 대답을 그의 아빠는 믿지 않았다. 저녁 무렵 시작된 주먹질은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계속됐다. 맞는 게 너무 힘들어 동생은 그냥 자신이 했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아빠는 계속 때렸다. 그나마 끝까지 안 했다고 했을 때보다는 적게 맞았을 거라고 선혜 자매는 위안을 삼았다.

다음날 엄마와 함께 병원을 찾았다. 선혜에게 탈모증세가 나타났다. 머리가 쉴 새 없이 빠졌다. 동생의 상태를 살핀 의사는 일반검진으로는 안 되고 CT촬영(컴퓨터단층촬영)을 해야 한다고 했다. 검사를 마친 의사는 머릿속에 있는 어떤 관 중 한쪽이 망가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아무리 애들한테 맞았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을 거다, 집안에서 맞은 거라면 병원에서 신고해 주겠다고.

며칠 후 학교에서 어김없이 땡땡이 칠 준비를 하고 있던 선혜에게 누군가 찾아왔다는 연락이 왔다. 그는 선혜를 집이 아닌 엄마가 피신해있는 기관으로 안내했다. 아빠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학교도 가지 못한 채 1주일 동안 그곳에 있었다. 옆방에서 하는 얘기가 다 들리고, 새벽부터 기도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그런 곳이었다. 그나마 근처 중학교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게 해 줘서 거기서 책도 보고, 컴퓨터도 할 수 있었다. 선혜는 그것마저 없었으면 거기서 그냥 나갔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선혜는 답답했던 시설생활 1주일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상습적인 가족 폭행과 다른 사건이 겹쳐 선혜의 아빠는 '거기(교도소)'에 들어가게 됐다. 엄마, 아빠의 이혼도 이루어졌다.

(2편에 계속)

덧붙이는 글 | 월간 <노동세상> 6월호에도 게재됩니다.



태그:#여성, #실업계, #여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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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엔 이야기가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기록자. 스키마언어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아이들과 즐겁게 책을 읽고 글쓰는 법도 찾고 있다. 제21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문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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