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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을 나갔다가 뭔가 좋은 냄새가 나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윽한 향기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동네 인근의 꽃 도매상이었다. 워낙에 시든 꽃만 갖다 놓는 집이라서 몇 번 사곤 발길이 뜸했던 곳인데 어쩐 일인지 새로운 꽃들이 그득하고 제법 싱싱해 보이는 것들이 많았다. 더 망설이고 할 것도 없이 가게 문을 쑥 밀고 들어서선 구경을 시작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몽오리가 동글동글한 동백이었다. 반질반질한 윤택에 그 불타는 빛깔하며, 그간 활짝 핀 동백꽃만 보아왔던 터라 꼭 맛있는 과일 같아서 한참을 바라봤다. 그 옆에는 꽃꽂이용으로 개량된 통통하고 제법 실한 강아지풀이 진짜 강아지 꼬리처럼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고, 이름은 모르겠지만 송송이 펴서 저들끼리 한 다발을 이루는 보랏빛 꽃들하며 이리저리 눈 둘 데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저걸 살까? 아니야 저게 더 예쁜데.'

혼자 들떠서 이것저것 고르다가 곁에서 좀 전의 향긋한 향내가 폴폴 나기에 쳐다보니 흰 꽃을 몇 개 달고 있는 풀 덩이가 수북한 것이다. 뭣인고 하며 눈을 떼려는 순간 풋풋한 향은 약이라도 올리듯 살살 코끝을 간질이더니 열어둔 문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코를 확 치고 지나가는 것이다.

일순간 딱 얼어버린 채 눈을 꿈뻑여 보니 큼직하고 하얀 꽃송이가 무성한 잎 사이로 살포시 얼굴을 내밀었다.

"어? 치자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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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자꽃 .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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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그 하얀 얼굴은 '응'하고 내게만 속삭이며, 결혼하고 근 몇 년 만에 외출한 주부처럼 말간 민낯을 내민다. 화려한 전문직 친구들이 모인 동창회에 가서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그런 당당한 여성처럼.

"나 있지, 그냥 저냥 살아. 그래도 예전엔 한 미모했잖아. 뭐, 아직은 봐줄 만하지?" 하는 품새로 방긋 웃는 게 여간 참신한 게 아니다. 가식 없지만 그것이 오히려 강한 매력이 됐다고나 할까? 더구나 가게 안으로 이끈 것도 실은 치자꽃이었는데 어찌 지나칠 건가!

더 망설이고 할 것도 없이 치자를 한 다발 달라고 청했다. 주인은 아직 봉오리가 펴지지 않은 걸 골라서 신문지에 둘둘 말아준다. 갓 울타리에서 우적우적 베어온 것처럼 실하고 매끈한 그것을 들고 집에 와선 여기저기 나눠서 수북하게 꽂아두었다.

하룻밤 자고 나니 치자는 힘차게 솟아올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한 봉오리가 열려서는 흰 꽃이 얼굴을 확 내밀더니 거실에 온통 치자 향이 가득하다.

"하! 이것 참."

올해는 치자로 해서 소소한 추억이 많이 생겼다. 얼마 전에 마트에서 치자 열매를 가져다 놓았기에 '어쩜 이리 내가 꼭 찾던 걸 구비해 놨나' 하며 반가이 사가지고 와서 오이랑 이것저것 넣어서 피클을 만들 때 고운 색깔을 내기도 했다.

이제 치자꽃을 거실에 들이고 보니 계절이 듬뿍 느껴지는 것이, 아마도 올해 여름은 혼자서 오래오래 기억할 향기로운 추억으로 남을 듯하다. 꽃도 예쁘고 향기도 좋고 활용도도 많은 치자, 어느 자리에서든 기쁨을 선물하는 치자를 보며 나도 그런 사람이 되리라는 작은 다짐도 해보고, 혼자만의 소소한 기쁨에 미소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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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자 열매로 색깔을 낸 피클 .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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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자꽃 .
ⓒ 조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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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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