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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외교 전문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북한의 권력 3대 세습이 어려울 것이라고 본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전문은 2009년 9월 28일 주한 미국대사관이 자국 국무부에 보고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와 9월 24일 점심을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김 전 대통령은 북한의 권력 승계 문제,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 등에 관해 의견을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이명박 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전문에는 김 전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상호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말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 대목에서 김 전 대통령은 재직 시절 경험을 반추했다. "내가 대통령일 때 북한에 쌀을 줬는데, 북한의 유일한 반응은 더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북한에 무언가를 줬을 때) 우리는 대가를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김 전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기 아들들 중 하나에게 권력을 넘기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따라서 우리는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중국-북한 문제와 관련해 김 전 대통령은 "중국이 북한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재직 때 장쩌민 당시 중국 국가주석과 서울에서 정상회담을 했던 일을 거론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장 주석이 '북한에 대해서는 중국보다 한국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며 북한 상황을 모르는 척했다고 기억했다. 이어 '장 주석은 겉으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다"고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 대북 정책 긍정... "한국에는 강력한 행정부 필요"

 

김 전 대통령은 세종시, 개헌 등 국내 정치 현안에 대한 생각도 이야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 이 대통령이 "전임자인 노무현 대통령이 세운 계획을 축소"하려 하고 있는데, "(상황을) 잘 다루지 않는다면 (이 문제가) 중대한 정치적 폭풍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김 전 대통령은 개헌에 찬성했다. 전문에는 김 전 대통령이 한국의 헌법을 미국 헌법과 더 비슷한 형태로 바꾸자는 생각을 지지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이 대통령 재임 기간 중에 개헌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고 봤다.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의 권력 균형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에 관해 합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미국대사관은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 운동에 찬성하던 1980년대에는 "행정부가 약한 의원 내각제"를 선호했지만 이제는 "의원 내각제는 한국에서 작동하지 않을 것이며 이 나라에는 강력한 행정부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고 자국에 보고했다.

 

김 전 대통령은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국 외교 전문에 이전에도 등장한 적이 있다. 올해 상반기에는, 미국대사관의 2006년 7월 전문에 반기문 당시 외교부 장관이 김 전 대통령에 대해 '다혈질이고, 대부분의 정책 사안에 대해 지식이 상당히 제한적이고 시각이 보수적'이라고 평가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얼마 전에는 김 전 대통령이 2008년 4월 알렉산더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국대사에게 '1994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북한의 영변 핵 시설을 폭격하려는 계획을 말린 것을 후회한다'고 이야기했다는 내용도 공개됐다.

 

냉탕과 온탕 오간 YS 집권기 대북 정책

김영삼 대통령 집권기는 남북관계에서 급격하게 냉탕과 온탕을 오간 시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2월 취임식 때 "어떤 동맹도 민족보다 우선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에 더해 취임 직후인 1993년 4월에는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를 북한으로 돌려보냈다.

 

북한에 대한 포용 정책을 분명히 한 취임 선언과 비전향 장기수 송환은 당시 뜻밖의 일로 받아들여졌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할 수 있는 행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던 야당 시절에도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여당 못지않게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라이벌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색깔 공세에 시달린 것과 달리,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념 문제로 공격받은 적이 거의 없었다.

 

대통령 취임식 몇 달 전까지도 김 전 대통령은 그러한 자세를 견지했다. 당시 <경향신문>(1992년 11월 13일자)은 이렇게 보도했다. "김(영삼 민자당) 총재는 최근 대선 유세 때마다 지난 1960년 남파된 고정 간첩에 의해 살해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했다. (……) 이러한 개인사 때문만은 아니지만 대북 인식은 보수적이다. (……) 안보에 관한 한 정부 측과 거의 같은 인식을 해왔으며 주한미군 문제에도 시비를 건 일이 없다. 때문에 야당을 할 때에도 비교적 군부로부터 거부 반응을 불러일으킨 적이 드물다."

 

이러한 행보와 달리, 취임을 즈음해 북한에 대해 전향적인 모습을 보이던 김영삼 대통령은 핵 문제가 터지자 대북 강경책으로 돌아섰다. 북한도 이에 강경하게 맞서면서 긴장이 고조됐다. 이에 더해 미국이 북한에 대한 폭격 계획을 세우면서 한반도에는 전쟁 위기가 고조됐다.

 

시민들이 전면전 위기를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1994년 남북 실무 접촉 때 북측 대표가 이른바 '서울 불바다' 발언("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은 불바다가 된다")을 한 사실이 전해지면서 시민들이 쌀, 라면, 부탄가스 등 생필품을 사재기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화생방전에 대비해 방독면을 쓴 사람 모형이 서울 시내의 백화점에 전시되기도 했다.

 

위기 상황에서 방북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을 만난 후 전쟁 위기는 잦아들었다. 남북정상회담 일정도 잡히면서 화해 국면으로 접어드는 듯했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앞두고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다시 상황이 바뀌었다. 남한에서는 김 주석 조문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조문 파동). 김영삼 정부는 조문단의 방북을 허용하지 않았고, 그 후 남북 관계는 다시 냉랭해졌다. 남북 관계가 본격적인 화해 분위기로 접어든 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다.


태그:#위키리크스, #김영삼, #김정일, #이명박, #장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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