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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민박의 만고상청루와 자유의 종
 산골민박의 만고상청루와 자유의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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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사로 내려가는 길에는 잣나무 군락이 무성하다. 길에는 푹신한 잣나무 잎이 깔려 있다. 조금 더 내려가 평평한 지역에 이르니 억새군락이 펼쳐진다. 억새는 나무가 없는 개활지에서 자라는 경향이 있다. 모두들 피곤한 다리를 펴고 땅에 편하게 앉는다. 10㎞ 가까이 걸었으니 다리도 좀 쉴 때가 되었다. 산속에 가끔 보이는 집에서는 겨울 채비에 바쁘다. 잠시 후 우리는 산골민박에 닿는다.

달밭골을 넘으면서 우리는 산 속에 있는 집을 몇 채 보았다. 옛날 화전민들이 살던 집으로 주거지 개념이다. 이에 비해 산골민박은 주거지 겸 주막 겸 숙박시설이다. 부산 출신으로 서울의 면목동에 살다가 이곳에 정착한 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집이다. 소백산을 찾는 사람들에게 밥도 주고 술도 주고 잠자리도 제공하는 영업장이다. 그런데 이 집에는 나름대로 철학이 있다.

자유의 종이 있고, 만고상청루(萬古常靑樓)가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종은 이곳을 지나는 객이면 누구나 칠 수 있다. 그런데 그곳의 글귀가 정말 의미 있다. 종을 치면 영혼이 깨어날 것이란다.

자유의 종 문구(文句)
 자유의 종 문구(文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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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종소리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평화가 있습니다.
사랑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중한 꿈이 있습니다.
나즈막히 이 종을 한 번 울려주세요!
당신의 영혼이 깨어날 것입니다.

만고상청루 역시 주막에 새겨진 이름치고는 대단하다. 만고에 어찌 그리 늘 푸를 수 있겠냐만, 그 뜻이 예사롭지 않다. 우리는 이곳에 앉아 막걸리를 한잔 기울인다. 오늘은 소백산 정상에 오른 게 아니니까 정상주일 수는 없지만, 소백산 자락길 산행을 마감하는 시점에 술 한잔을 안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술보다 더 눈이 가는 게 있다. 누각의 벽에 걸린 천상병의 시다. 일부만 적혀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좋다.

바람에게도 길은 있다.
나는 비로소 나의 길을 가는데
길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보법탑비는 대체 어디로 간 겨

철판과 쇠줄에 감겨 있는 진공대사 보법탑비
 철판과 쇠줄에 감겨 있는 진공대사 보법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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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민박에서 비로사까지는 계속해서 내리막길이다. 중간에 소백산 자락길 안내판이 보인다. 우리는 지금까지 소백산 자락길 제1코스를 걸었는데, 그 길을 세분하면  선비길, 구곡길, 달밭길이 된다. 달밭길을 내려가자 비로사 일주문이 나타난다. 근자에 세운 것으로 그곳의 소백산 비로사라는 편액은 성산 정해도(鄭海道)가 썼다. 우리는 최근에 지은 월영루를 지나 계단을 통해 적광전 쪽으로 올라간다.

적광전으로 오르기 전 나는 잠시 진공대사 보법탑비 쪽으로 간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보법탑비가 없어졌다. 비신과 이수는 없고, 귀부만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비석을 찾기 위해 주위를 살핀다. 다행히 가건물을 세우고 그 안에 안치해 놓았다. 그런데 이 비석이 철판에 들어가고 그 철판이 쇠줄에 감겨 있다. 보안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숨도 못 쉬겠다. 문화재가 잠시 동안이지만 포박을 당한 꼴이 되었다.

보법탑비는 비로사를 중건한 진공대사(眞空大師, 855-937)의 탑비로 939년(고려 태조 22년)에 세워졌다. 이 비석은 갖은 풍상을 겪으면서 네 조각으로 갈라졌고, 그나마 두 조각은 다른 석재를 갖다 붙여놓았다. 탑의 꼭대기 이수에는 '고진공대사비(故眞空大師碑)'라는 제액이 새겨져 있다. 비신을 제거한 귀부는 귀여워 보일 정도다. 보법탑비는 역사성과 종교성은 뛰어나지만, 조각과 부조라는 측면에서 예술성은 조금 떨어지는 편이다.

진공대사 보법탑비
 진공대사 보법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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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법탑비 내용을 보면 특이한 점이 있는데, <음기>에 적힌 스님의 유계(遺誡) 때문이다. 유계라면 유언으로 남긴 가르침을 말한다. 대사는 먼저 가을 단풍이 맑은 시내에 떨어지는 것처럼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린다. 그리고는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할 것을 부탁한다. 상하가 화합하고 삼가며 예의와 질서를 지킬 것을 강조한다. 대사는 또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수행에 전념하여 큰 인재가 될 것을 후배 승려들에게 당부한다.

"분(分)에 따라 정진하여 때를 쫓고 세상을 순리대로 살되 특별한 궤칙(軌則)은 두지 말고, 평범한 진리를 따르도록 하라. 또 방탕하거나 안일하지 말 것이며, 동량(棟梁)이 되려는 원력 또한 잊지 마라. 옳지 않은 일은 불구덩이를 피하듯 처음부터 행하지 말라.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간에 항상 조심하여 여법(如法)하게 수행토록 하라."

적광전에 오르니 이상하게 생긴 탑이 하나 나타난다. 탑인지 부도인지 아니면 둘의 짜깁기인지 분간할 수 없다. 바로 이 탑이 모순의 극치다. 중간 중간 부재의 조각을 보면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그게 엉터리로 연결되다 보니 그 가치를 잃고 말았다. 탑 앞에 연화문 대좌가 있는 것으로 봐서 꽤나 의미 있는 탑이었을 텐데 아쉽기 이를 데 없다. 처음 탑재를 수습한 사람의 책임이 크다.

적광전의 두 부처님

적광전의 두 부처님
 적광전의 두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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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광전 안에는 두 부처님이 좌정하고 있다. 석조 아미타불 좌상과 비로자나불 좌상이다. 이 두 부처님이 보물 996호이며, 아미타불이 996-1호, 비로자나불이 996-2호다. 일반적으로 법당에는 세 분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데 두 분이라니, 조금 이상하다. 당호가 적광전인 것으로 보아 본존이 비로자나불이고, 극락전에 있던 아미타불이 이곳으로 옮겨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건 순전히 나의 추측일 뿐이다. 통일신라 화엄불교에서는 아미타불과 비로자나불이 나란히 위치할 수 있다고도 하기 때문이다.

이들 두 부처님은 결가부좌한 것을 제외하고는 여러 가지 면에서 상당히 다르다. 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과 머리, 옷 등이 분명하게 구분된다. 아미타불 좌상은 높이가 1.13m이다. 얼굴 표정이 엄숙하고 나발과 육계가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옷은 왼쪽 어깨만을 감싼 우견편단이다. 손은 가볍게 주먹을 쥔 상태에서 손바닥을 위로 하고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있다. 엄지 뿐만 아니라 검지도 맞댄 형태로 아미타인의 상품상생인으로 보인다.

비로자나불 좌상은 높이가 1.17m이다. 작고 동그란 입과 짧은 인중으로 부처님이 상당히 인간적으로 보인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이 자연스런 주름을 이루며 흘러내려 아주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수인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싼 일반적인 형태이다. 이 부처님은 나발에 육계를 갖추었는데 중간에 계주가 약간 드러난다. 두 불상은 선의 특징, 몸의 자세 등으로 볼 때 9세기 후반의 석불로 보인다.

16나한과 당간지주

해학적인 나한상
 해학적인 나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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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광전 옆에는 최근에 지어진 나한전이 있다. 나한전은 법당뿐 아니라 그 안에 모셔진 부처님과 16나한까지 최근에 조성했다. 나한상은 아주 자연스러운 몸짓을 하고 있다. 편히 앉아있기도 하고, 팔을 괸 채 쉬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졸기도 하고, 등을 긁기도 한다. 얼굴 표정도 가지각색이다. 한 마디로 편안하고 재미있다. 이들이 가진 지물(持物)로는 염주, 그릇, 동물, 경(經), 금강저(金剛杵), 과일 등이 있다. 이곳 비로사 나한들은 동물들과 친한지, 열 분의 나한이 동물과 함께 있다.

나한전을 보고 나는 다시 월영루 쪽으로 내려간다. 그런데 처음 보는 범종이 있다. 종에는 불기 2555년 9월 12일이라는 명문이 보인다. 그럼 두 달 전에 이곳에 설치되었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범종을 이곳을 안치하느라 주변의 모습이 상당히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주변이 깨끗해졌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깨진 문화유산들이 어디로 간 걸까? 광배로 보이는 파편들이 많았는데, 찾을 수가 없다. 버리지 않고 어디 잘 보관하고 있길 바랄 뿐이다.

당간지주
 당간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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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계단을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당간지주가 있다. 이 당간지주의 공식명칭은 '비로사 당간지주'가 아니고 '영주 삼가동 당간지주'다. 절 이름을 붙이지 않은 게 조금 이상하다. 이 당간지주는 규모나 장식기법 등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당간의 석재와 조각은 전체적으로 단순하면서도 투박하다. 그래서인지 보물이 못되고, 경북 유형문화재(제7호)가 되었다.

당간지주를 보고 일주문을 나온 우리는 비로소 비로사를 떠난다. 비로사에서 버스가 있는 삼가리까지는 2㎞쯤 된다. 우리는 이 길을 다시 걸어야 한다. 그렇지만 길이 잘 나 있고 내리막길이어서 30분이면 갈 수 있다.

삼가리의 소백산 탐방지원센터를 지나며 풍기로 가는 버스시간을 물으니 4시 5분이란다. 그렇다면 시간이 촉박하다. 우리는 그곳에서부터 뛰기 시작한다. 선두그룹이 다행히 4시 5분이 되기 전에 버스를 잡는다. 그리고 기사에게 뒤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2~3분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다. 기사가 조금은 마땅찮아 하면서도 기다려 준다.

잠시 죽령옛길을 지나며 문화재를 찾다

결국 우리 일행은 20분쯤 후에 이번 답사의 출발지인 풍기역에 닿을 수 있었다. 풍기에서 나는 승용차로 죽령 옛길을 넘기로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제천행 6시 10분 무궁화호를 기다리기로 한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나머지 일행은 시간이 남아서 인삼시장도 구경하고 인견시장도 구경하고, 뒤풀이로 술도 한잔 했다고 한다.

보국사지 석조여래입상
 보국사지 석조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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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령을 넘어 죽령산신당과 보국사지엘 잠깐 들른다. 죽령고개에서는 보국사지에서 가져다 놓은 죽절문 석주가 잘 있나 확인해 본다. 그리고는 풍기 쪽 죽령옛길을 잠시 살펴본다. 나는 다시 고개를 넘어 충북 땅으로 들어선다. 여기서도 나는 5번 국도로 가지 않고 죽령옛길을 따라 내려간다. 그곳에는 최근에 지어진 죽령산신당이 있다. 다자구 할머니 산신당으로 알려진 죽령산신당(충북 민속자료 제3호)이 있는데, 여기 죽령산신당이 또 세워진 이유를 모르겠다.

여기서 다시 마을길을 따라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보국사지를 만날 수 있다. 이곳에는 장육불로 알려진 석조여래입상이 있다. 머리 부분이 떨어져 나갔지만, 손의 조각이나 옷주름을 통해 통일신라시대 양식임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보국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곳에도 4년 전까지는 죽절문석주가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요즘 문화재는 하루가 다르게 사라지니 요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역시 단양군에서 어디다 잘 보관하고 있길 바랄 뿐이다. 이제 늦가을의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영주의 소수서원에서 시작한 소백산 자락길 여행을 나는 이곳 단양의 보국사지에서 마감한다.


태그:#비로사, #산골민박, #보법탑비, #적광전의 두 부처님, #죽령옛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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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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