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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마에 옛길은 사라졌어요

구불구불 덕현리 길
 구불구불 덕현리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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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점마가 무슨 뜻일까? 마을 이름의 유래가 어떻게 될까? 궁금하다. 그런데 그 어디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가 없다. 사람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주시 순흥면 홈페이지에도 설명이 없다. 점마는 덕현리의 끝에 있는 마을로 석천폭포골의 시작이다. 이 골짜기를 따라 북서쪽으로 2㎞쯤 올라가면 석천폭포가 나온다. 석천폭포는 한 여름에 찾는 사람이 많다. 이것이 내가 아는 전부다.

점마에서 덕고개로 내려가는 길은 농로로 콘크리트 포장이 되어 있다. 밭기반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경운기가 다닐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지만 경사가 급해 S자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옆으로는 지붕을 검은 천으로 덮은 비닐하우스가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옹기구와 농자재들이 쌓여 있다. 비닐하우스 뒤로는 집도 있다. 그런데 사는 사람이 없다. 아마도 농사철에만 거주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라 내려간다. 그런데 콘크리트길은 오래 걷다 보면 발과 다리에 부담이 된다. 우리가 부석사 앞에서 이곳 덕현리까지 걸은 거리가 20㎞ 가까이 되기 때문에 피곤하기도 하다. 또 길가에는 특별한 볼거리도 없다. 정말 터벅터벅 걷다 보면 우리의 목표지점인 배점리에 도착할 것 같다. 덕현리와 배점리 옛길은 새로 농로를 내고 도로를 내는 과정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다. 산자락을 따라 마을과 마을을 잇는 옛날 흙길이 그립다.

덕고개 입구 서낭당에 얽힌 이야기

덕현리 버스정류장
 덕현리 버스정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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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마에서 덕고개로 내려가면서 보니 길게 뻗은 덕현리 마을의 집들이 점점이 눈에 들어온다. 덕현리는 400여 년 전 박동수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마을 옆 고개의 머루와 다래 덕에 허기를 면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고개를 덕이 있는 고개라 부르게 되었고, 한자로 표기해 덕현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글쎄, 스토리텔링 치고는 조금 생뚱맞고 썰렁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덕현리 유래에 대해 그 이상 아는 사람이 없다.

덕현리 마을 한 가운데는 버스 정류장이 있다. 이곳에서 우리 회원들은 잠시 휴식을 취한다. 배낭도 내려놓고, 신발끈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물도 한 잔 마신다. 영주에서 이곳 덕현리까지는 버스가 하루 3차례 들어온다. 아침과 저녁에 학생들의 등·하교를 위해 한 번씩 들어오고, 오후 2시에 한 차례 더 들어온다.

덕현리 숲괴 서낭당
 덕현리 숲괴 서낭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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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현리 정류장에서 배점리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나지막한 언덕이 하나 나온다. 이곳 주변에는 소나무들이 심겨 있어 멀리서 보아도 경치가 좋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숲거리로 외부의 사악한 기운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비보 차원의 수구막이다. 가까이 가 보니 소나무만이 아니고 활엽수도 함께 있다. 그리고 숲속에는 서낭당이 있다. 서낭당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계단 끝 언덕 위에 있는 서낭당은 나무로 집을 짓고 함석을 올린 형태다. 안을 들여다보고 싶으나 문이 걸려 있다. 번호키로 되어 있어 도저히 열 수도 없다. 요즘은 서낭당도 번호키로 채워놓는 세상이다. 모셔진 서낭신도 보고, 서낭당의 유래도 알면 좋을 텐데 안타깝다.

성혈사 나한전을 봐야 하는 까닭은...

비로자나불좌상과 나한상
 비로자나불좌상과 나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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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 마음으로 나는 서낭당을 떠난다. 이제 배점리까지 길은 비교적 곧게 이어진다. 그렇지만 나는 덕고개에서 서쪽으로 1㎞쯤 떨어진 성혈사에 가보고 싶다. 이곳 성혈사에는 그 유명한 꽃살문이 있기 때문이다. 꽃살문이 있는 나한전은 보물 제832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나한전 안에 있는 흰색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도 인상적이고, 붉은색, 주황색, 파란색, 연두색으로 표현된 16나한상도 너무 좋다.

유감스럽게도 이렇게 의미 있는 성혈사가 소백산 자락길 코스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러나 나는 성혈사를 소개하고 싶다. 소백산 자락길 제12코스에서 성혈사를 모르면 그 의미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성혈사의 역사는 천년이 넘는다. 그것은 나한전에 있는 석조 비로자나불좌상이 통일신라시대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천년의 역사는 바람 속에 흩어지고, 이제는 크지 않은 아담한 절로 남아 있다. 최근 봉철, 등현 스님 등이 주석하면서 절이 알려지고, 불사도 하면서 그 모습이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다.

성혈사 나한전
 성혈사 나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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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사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3층(후면은 2층)의 기단 위에 세워진 다포식 겹처마 건물로, 단순한듯하면서도 화려한 모습이다. 법당 안에는, 가운데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양쪽에 8나한씩 모두 16나한이 모셔져 있다. 나한전에는 보통 석가모니부처를 주존불로 모신다. 그런데 이곳 성혈사 나한전에는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이 모셔진 게 특이하다. 석조 비로자나불 좌상은 9세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하얀 법신에 검은 머리를 해서인지 뚜렷한 인상을 우리에게 준다. 표정이 순하고 원만하면서도 눈은 약간 날카롭다. 콧수염과 턱수염이 표현되었지만 부처님이 상대적으로 젊어 보인다. 이 비로자나불 좌상이 모셔진 것은 소백산 지역에 성행했던 화엄 사상의 영향 때문으로 여겨진다.

나한전의 위트
 나한전의 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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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자나불 좌상 좌우의 16나한은 부처님의 제자로 최고의 깨달음에 이른 성자이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정법을 지켜 나간다. 이곳 나한전의 나한에는 친절하게도 이름이 적혀 있다. 나한의 이름은 한자의 음가로 읽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우리말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약간 변형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 나한은 대부분 머리와 수염을 깎고 화려한 색의 법의를 걸쳤다.

법의의 색깔은 붉은색, 주황색, 파란색, 연두색의 네 가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들 나한은 기도하고 명상하고 책을 읽고 선정에 든다. 전체적으로 아주 편안한 표정이다. 문화재청에서 발간한 <영주 성혈사 나한전 실측조사보고서(2007)>에 따르면, 이들 16나한은 부산의 모 대학 여자 교수가 최근에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나한의 표정이라든지 채색이 상당히 현대적이다.

꽃살문에 그려진 불교의 세계

나한전의 꽃살문
 나한전의 꽃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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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한전은 정면 3칸으로, 각 칸에 한 쌍의 꽃살문을 달았다. 가운데 칸은 연지수금(蓮池水禽) 꽃살문이고 오른쪽 칸은 솟을 모란 꽃살문이며 왼쪽 칸은 솟을 꽃살문이다. 연지수금은 '연꽃이 핀 연못의 물새'라는 뜻이다. 꽃을 기본 모티브로 해서 정면 세 칸에 각각 다른 문양을 새겨 넣었다. 이 중 연지수금 꽃살문이 가장 화려하고 이야기 거리가 많다.

이 가운데 칸의 연지수금 꽃살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우선 이곳에 연꽃과 새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새의 먹이인 물고기, 게, 개구리가 나온다. 그런데 이것을 먹이의 차원에서 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살생과 육식을 금하는 불교의 계율을 생각할 때, 오히려 공존공생의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리고 용과 동자승도 보인다. 여기서 용은 반야용선으로 죽은 자를 극락정토로 인도한다. 그리고 연잎을 타고 노를 젓는 동자(童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애쓰고 있다.

연지수금꽃살문
 연지수금꽃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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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칸의 솟을 모란 꽃살문은 부귀영화를 표현한다. 모란이 바로 부귀영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 보면 모란은 부귀영화를 나타낸다. 서양에서 꽃 중의 꽃이 장미라면, 동양에서는 꽃 중의 꽃이 모란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란꽃은 화려하면서도 부귀함을 보여준다. 왼쪽 칸은 솟을 꽃살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창살은 원형을 중심으로 그 안에 육변화(六辨花) 무늬를 표현하였다. 이 솟을 꽃살문은 일정한 규칙을 따르고 있어 전체적으로 비례와 균형이 잘 맞는다.

배점리에서 길은 이화동과 삼괴정으로 이어진다

배점리에서 바라 본 덕현리와 소백산
 배점리에서 바라 본 덕현리와 소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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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현리에서 배점리 가는 길 주변에는 농가들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교회도 보이고 지나가는 차량도 가끔 보인다. 그동안 우리가 소백산 자락의 산길을 걸어서 사람과 차량을 별로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배점리로 들어가면서 상황이 조금 달라짐을 느낄 수 있다. 조금은 도시 느낌이 난다고나 할까? 이제 저 멀리 순흥저수지가 보이고, 저수지변 언덕 위로 서양식 지붕을 한 집단주택이 보인다.

이번 답사를 함께 한 영주 사는 회원이, 영주지방 유지들이 사는 집이라고 귀뜸해 준다. 그래서 분양할 때 입주신청자들의 수준을 평가해 입주여부를 결정한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집에서 호수를 조망할 수 있어 좋기는 하겠지만, 신원조회까지 당하고 입주할 마음이 생길까 하는 생각이 든다. 멀리서 보기에는 명당이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데, 내부적으로 그런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해진다.

배점리의 도로는 2리에서 1리로 거의 똑바로 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락길을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조금은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이 길은 이화동을 거쳐서 가게 되어 있다. 이화동은 소백산 자락길 제1코스와 제12코스가 만나는 지점이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소백산 자락길의 종점에 해당한다. 이곳 이화동에서 우리는 신필하가 쓴 죽계구곡 각자가 새겨진 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괴정의 느티나무
 삼괴정의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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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동을 내려와 우리는 배점리의 삼괴정(三槐亭)에 이른다. 삼괴정, 그 이름으로 봐서는 세 개의 느티나무 아래 정자가 있었을 법한데 지금은 없다. 그 대신 배순정려각과 정려비만 있다. 배순, 그는 배점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기게 한 충신백성(忠臣百姓)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제 배순에 대한 제사를 배씨들이 지내길 바라고 있다. 그러고 보니 시대가 바뀌었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소백산 자락길 제11, 12코스에 답사가 끝났다. 총 거리가 21.8㎞로, 7시간 20분이 걸렸다. 오전 8시 30분부터 걷기 시작해 오후 3시 50분에 끝났기 때문이다. 함께한 회원이 모두 19명이었다. 이들의 닉네임이 재미있어 그 이름을 적어 본다. 주막, 문장군, 영경, 마루한, 산들내, 바람, 그림자, 짱돌, 매헌, 사니조아, 화이터, 산여울, 천등산, 1004, 마나님, 장구니, 금수산, 검정고무신, 동해의 푸른. 이들 닉네임에 얽힌 사연은 다음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지난 1년간 소백산 자락길을 완주한 회원은 모두 5명이다. 이들은 소백산 자락길 전구간(143.8㎞)를 완주했다. 그들에게는 소백산 자락길 완보증명서도 발급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절반 정도만 참여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 소백산 자락길]이라는 이름으로 기록을 남긴 구간이 제1,8,9,10,11,12코스다. 전체의 절반정도를 기록한 셈이다. 앞으로 남은 제2,3,4,5,6,7코스도 시간을 내서 답사하고 기록을 남길 예정이다.



태그:#덕현리, #점마, #덕고개, #서낭당, #성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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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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