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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 보물 중 인류문화의 견지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말한다. 국보(國寶)라는 말 자체가 그런 뜻이다. 국보는 곧 '나라의 보물'이니, 세계에 내놓을 만한 인류문화의 유산을 가리킨다.

 

그래서 문화재청 홈페이지는 '보물 중 제작 연대가 오래 되고 시대를 대표하거나, 유례가 드물고 우수하며, 특히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있거나 그가 만든 것을 국보로 지정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정리하면 국보의 자격은 다섯 가지이다. (1) 오래 된 것, (2) 시대를 대표하는 것, (3) 유례가 드문 것, (4) 우수한 것, (5) 역사적 인물과 관련이 되는 것.

 

국보의 숫자는 계속 변한다. 화재 등으로 사라지는 경우도 있고, 가치가 대단한 문화재가 발굴되어 처음으로 지정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11년 현재 우리나라에는 훈민정음, 해인사 팔만대장경, 석굴암, 하회탈, 조선왕조실록, 첨성대 등 315종의 문화재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의성이 자랑하는 '국보 77호' 탑리5층석탑

 

그렇다면 의성에는? 마을 이름도 '탑'이 있는 마을[里]이라고 해서 '탑리'가 된, 금성면 탑리리 1383-1번지에 있는 '의성 탑리 오층석탑(義城 塔里 五層石塔)'이 바로 빛나는 국보이다. 국보 제 77호이며, 1962년 12월 20일에 지정되었다.

 

'빛나는 국보'라고 했다. 인구 400만 명, 250만 명을 각각 넘는 부산광역시와 대구광역시도 다른 곳에서 옮겨와 박물관 유리 속에 가두어 보관 중인 몇 점을 제외하면 국보를 소유하지 못했는데, 인구가 불과 6만여 명에 지나지 않는 의성이 대단한 국보를 지녔다는 사실은 당당하고 뿌듯한 자랑거리이기 때문이다.

 

이제 국보 앞 안내판의 본문을 읽어보자. 일단 전문을 읽고, 이어서 문장이나 구절 단위로 꼼꼼하게 따져가며 그 뜻을 새겨보자. 핵심은, '의성 탑리 5층 석탑'이 어째서 '국보'인지를 아는 것이다. 

 

의성탑리5층석탑

국보 77호

경상북도 금성면 탑리리 1381-1

 

이 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5층석탑으로 높이는 9.6m이다. 각부의 석탑재가 거의 완전하며, 전탑의 수법을 모방하는 한편, 일부에서는 목조 건물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발달을 고찰하는 데 귀중한 유례가 되는 탑이다. (중략) 경주 분황사 석탑 다음으로 오래된 석탑으로 한국 석탑 양식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가운데에 (중략)으로 처리한 내용은 한자어로 된 건축 관련 전문 용어가 특히 많아 안내판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없도록 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조금 뒤 다시 읽어보기로 하고, 우선 쉬운 내용부터 그 뜻을 헤아려보자. 그래도 역시 문장 단위로, 낱말 하나하나를 풀어서 꼼꼼하게 따져가며 읽어보아야겠다. 그렇게 하지 않다가는 문화재 앞까지 가놓고도 수박 겉만 핥다가 발길을 돌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될 테니 말이다.

 

― 이 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5층석탑으로 높이는 9.6m이다. 

 

해설은 탑리5층석탑이 '통일신라' 시대에 세워졌다고 밝히고 있다. 건축 시기부터 가장 먼저 해설한 것이다. 그런데 김원용‐안휘준 공저 <한국미술의 역사>(시공사, 2004년)를 참조한 의성군 홈페이지는 탑리의 이 국보가 만들어진 때를 '남북국(통일신라)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탑 앞 안내판과 홈페이지의 '시대' 표현이 약간 다르다는 말이다.

 

'남북국 시대'는 우리나라가 그 당시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 두 나라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을 나타내고, '통일신라 시대'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 나라로 통일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두 용어는 그 시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역사 인식의 '차이'를 드러낸다.

 

물론 탑이 세워진 시대는, 그 때를 '남북국 시대'라 하든 '통일신라 시대'라 하든 사실은 같다. 전탑의 시조인 경주 분황사탑은 선덕여왕 때인 634년에 세워진 것으로 확인이 되지만, 탑리5층석탑은 정확한 설립 연도를 알 수가 없으므로 안내판은 그냥 '통일신라 시대의 석탑'(홈페이지는 '통일신라 전기')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탑에는 석탑, 목탑, 전탑 세 종류가 있다. 그 중 석탑(石塔)은 돌로 만들어진 탑이다. 그러므로 '탑리 5층석탑'이라는 이름 속에는 그 탑이 나무로 된 목(木)탑이나 벽돌로 된 전(塼)탑이 아니라 돌로 만들어졌으며, 층수가 5층이라는 뜻이 들어 있다.

 

탑은 본래 부처의 사리를 모셔놓고 예배를 드리던 대상물이다. 사리는 '몸'을 뜻하는 인도의 옛말로, 불교에서는 부처가 죽은 후 그 몸에서 나온 '작은 구슬'을 가리킨다. 즉, 탑은 '부처의 묘'이다. 이는 탑이 고대 인도의 스투파(stupa)에서 온 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알기가 쉽다. '무덤'을 가리키는 스투파는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탑파'로 읽히다가 나중에 줄어서 '탑'이 되었다.

 

본래 탑에는 석가모니 부처의 사리를 모셔야 하지만, 불교가 널리 전파되면서 사찰마다 탑을 세워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보통의 절에서는 다른 고승(高僧)의 사리나 불경, 작은 불상 등 공경할 만한 다른 것을 석가모니 부처의 사리인 '진신(眞身)사리' 대신에 탑 안에 모셨다.

 

― 각부의 석탑재가 거의 완전

 

탑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탑이 몇 층이냐 할 때 그 층수를 이루는 부분을 탑신부(塔身部)라 한다. 탑의 몸체 부분인 셈이다. 탑신부의 각층은 몸돌과, 그 위에 지붕처럼 얹힌 지붕돌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탑리5층석탑을 자세히 보면 다섯 개의 몸돌과 다섯 개의 지붕돌을 가지고 있다.

 

탑신부의 아래 부분을 기단부(基壇部)라 한다. 즉, 탑의 층수를 쌓기 위해 기초를 튼튼하게 한 부분이다. 그리고 탑신부의 위에 뾰족하게 쌓인 부분은 상륜부라 한다. 그러므로 안내판의 해설에 있는 '각부의 석탑재(材)가 거의 완전'하다는 내용은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의 돌들이 거의 본래대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 전탑(塼塔)의 수법을 모방

 

'전탑의 수법을 모방'했다는 표현은 탑리 5층석탑이 언뜻 보아 벽돌을 층층으로 쌓아 만든 전탑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실제로 탑리 5층석탑은 언뜻 보면 안동 조탑동 5층전탑(보물 57호)과 많이 닮아 얼핏 보면 그저 전탑으로만 느껴진다. 탑리5층석탑은 전탑을 본떠 만든 모전(模塼)석탑다운 면모를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 일부에서는 목조 건물의 양식을 보이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발달을 고찰하는 데 귀중한 유례가 된다.

 

'일부에서는 목조 건물의 양식을 보이고 있다'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 탑리 5층석탑이 '배흘림' 기법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배흘림 기법이란 나무기둥을 높게 세워놓고 보면 위쪽이 더 넓게 보이고 아래쪽이 상대적으로 좁게 보여 불안감을 주기 때문에 처음부터 위쪽을 가늘게 만들어 안정된 느낌을 주는 방법이다. 목조 건물을 지을 때 쓰는 이 배흘림 기법을 탑리 5층석탑은 1층 몸돌 둘레에 선보인다. 몸돌 사방의 귀퉁이를 이루고 있는 네 개의 돌기둥이 아래는 넓고 위는 좁게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발달을 고찰하는 데 귀중한 유례가 된다'는 표현은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을 때에는 나무탑을 세우다가, 634년에 이르러 중국의 전탑을 본떠 돌을 벽돌 크기로 잘라 쌓아 분황사탑(국보 30호)을 만들었고, 다시 분황사탑에 비해 돌을 더 크게 잘라 탑리 5층석탑을 만들었다는 우리나라 탑의 역사를 말한다.

 

그 이후 돌을 가공하는 솜씨가 점점 발달하게 되면 이윽고 나무를 다듬어 목탑을 만든 것 이상 수준의 석탑이 탄생하게 된다. 탑리 5층석탑은 목탑과 석탑 사이의 중간 발달 단계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분황사 석탑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석탑'이라는 안내판의 표현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돌 가공 기술이 일취월장 발달하여 나무를 깎아 목탑을 만들듯이 자유자재로 돌을 다듬어 석탑을 쌓아내는 경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탑은 통일신라 초기인 682년(신문왕 2)에 완공된 경주 감은사지(址) 3층석탑(국보 112호)과, 그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지금은 경주박물관 뜰에 옮겨져 있는 고선사터 3층석탑(국보 38호)이다. 그리고 감은사지 석탑과 고선사터보다 더 뒤인 751년(경덕왕 10) 무렵에 만들어진 석가탑(국보 21호)과 다보탑(국보 20호)은 석탑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걸작이다.

 

"아하! 탑리 5층석탑이 국보로 지정된 까닭을 알겠다. 우리나라 탑이 목탑에서 전탑을 거쳐 석탑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잘 증언하고 있고, 분황사탑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석탑인데도 무너지거나 부서진 부분이 거의 없이 본래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구나!"

 

이 탑의 본래 이름은 '조문탑'이었다. 조문국이 있던 땅에 세워진 탑이라는 뜻이다. 그 후 이런저런 이름을 거치다가 워낙 탑의 무게감이 대단했던 터라 마을이름이 '탑리'로 바뀌자, 어느덧 '탑리5층석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제 앞에서 '중략'으로 생략했던 안내판의 중간 부분을 읽어보자.

 

- 기단부는 14매의 장대석으로 구축된 지대석 위에 이루어졌는데, 24매의 판석으로 면을 구성하였고,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 2개씩의 안기둥이 모두 별석으로 되어 있다. 덮개돌은 8매의 판석을 결구하여 덮었는데, 부연은 표시되지 않았으며, 덮개돌 상면에는 1단의 굄돌을 놓아 탑의 몸돌을 받치고 있다.

 

안내판의 중간 부분은 이처럼 한자어 일색의 전문 용어로 되어 있어 그 뜻을 헤아리기가 정말 쉽지 않다. 이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사전을 들고 찾아가며 읽어야 할 수준이다.

 

― 기단부는 14매의 장대석으로 구축된 지대석 위에 이루어졌다.

 

기단부는 탑의 아래 기초 부분을 말한다. 장대석(長臺石)은 계단이나 축대를 만들기 위해 길고 편편하게 다듬은 돌을 말한다. 지대석(址臺石)은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땅에 깐 받침돌을 말한다. 따라서 위의 안내문은 '길고 편편한 돌 14장을 땅에 받침돌로 깔고, 그 위에 기단부를 놓았다'는 뜻이다.

 

― (기단부는) 24매의 판석으로 면을 구성하였고,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 2개씩의 안기둥이 모두 별석으로 되어 있다.

 

14장의 편편하고 긴 돌로 바닥을 다진 후 그 위에 24장의 널판(板)지 같은 돌[石]을 세워 붙여 4면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각 면은 모서리에 (편편한 24장의 판석이 아닌) 다른[別] 돌[石] 두 개씩을 안쪽에 기둥으로 세워두었다.  

 

 

― 덮개돌은 8매의 판석을 결구하여 덮었는데, 부연은 표시되지 않았으며, 덮개돌 상면에는 1단의 굄돌을 놓아 탑의 몸돌을 받치고 있다.

 

결구(結構)는 '묶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덮개돌은 8매의 판석을 결구하여 덮었다'는 말은 '8장의 편편한 돌을 묶어 몸돌 위를 덮는 덮개돌로 썼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 덮개돌 끝의 처마를 보기좋게 하기 위해 약간 들어올리지는 않았다. '부연'이 처마 끝을 약간 들어올려 멋을 내는 건축 기교를 말하기 때문이다.

 

'덮개돌 상면(上面)에 1단의 굄돌을 놓았다'고 한다. '괴다'는 '받치다'는 뜻이다. 따라서 덮개돌 위에 한 개의 굄돌을 놓은 것은 무엇인가를 받치기 위한 조치이다. 덮개돌 위에 얹힌 굄돌 위에 다시 얹힐 것은 정해져 있다. 몸돌이다.    

 

이 부분을 알기 쉽게 읽어보자. '기단 위를 덮개돌로 덮었다. 덮개돌은 8장의 편편한 돌을 얽어서 만들었다. 덮개돌의 끝 부분인 처마를 약간 들어올리는 기교는 부리지 않았다. 덮개돌 위에는 1단의 굄돌을 놓았다. 그 후 굄돌 위에 1층의 몸돌을 얹었다.' 

 

모든 문화재는 현장의 안내판을 잘 읽는 것이 중요하다. 답사여행을 의미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내판의 용어들이 주로 한자어로 된 전문어들로 이루어져 있어 그 뜻을 알아채기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미리 관련 서적을 읽고 충분한 배경지식을 축적한 다음 답사여행을 떠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은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이제 안내판의 내용을 가슴에 묻은 채 천천히 탑을 감상할 차례이다. 그러나 작은 언덕 위에 놓인 탑 바로 앞에 다가가 세심히 살피는 것까지는 좋지만, 절대 문화재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낙서'를 좋아하는 우리 민족은 깊은 산골의 기암절벽에까지 자기 이름을 새기는 등 '흔적'을 남기는 데 열중해 왔다. 심지어 폴란드의 소금광산 안에도 들어가면 벽과 오르내리는 계단 손잡이에까지 우리나라 사람의 한글 이름이 '한국 서울 김누구' 식으로 쓰여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탑리 5층석탑 역시 마찬가지이다.

 

1층 탑신 북쪽 면을 보면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大正 十五年 六月 有村正浩 申基燮' 등이다. 1926년에 자기들이 이 석탑을 고쳐 세웠다는 것을 기념(?)하여 파둔 글자들이다. 아무리 수리를 했다 하더라도 제 이름까지 새겨둔다면 그것은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이지 보호하고 보존하는 태도는 아니다.

 

탑신(塔身)에 '무식하게' 글자를 새겨넣은 대표적 사례는 국보 9호인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의 경우이다. 나당연합군을 결성하여 백제를 무너뜨린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탑의 1층 몸돌[塔身]에 '大唐平百濟國碑(대당평백제국비)' 등의 '낙서'를 해놓았다. '큰 당나라가 백제국을 평정한 (것을 기념하는) 비'라는 뜻이다.

 

그 이후 이 탑의 이름은 '평제탑'으로 흔히 알려졌다. 그러던 중 1942년 절터에서 '定林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었다. 옛날 이곳에 있었던 사찰 이름이 '정림사'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해방 이후까지도 국보인 이 탑을 계속 '평제탑'이라 불렀다. 국가의식과 민족정기가 얼마나 흐렸던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물론 지금껏 그렇게 '평제탑'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무식한' 소정방의 행위도 마땅히 규탄받을 일이지만, 스스로의 소중한 문화재를 존중할 줄 모르는 우리의 인식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그 첫걸음이 문화재를 아끼는 일이다. 문화재에 제 이름을 새겨 넣는다고 그것이 어찌 영광이 되겠는가. 두고두고 그 무식한 행위를 꾸짖는 비난에 시달려야 할 터이니, '냄새 나는 이름을 만년에 남긴다'는 뜻의 유취만년(遺臭萬年)의 참뜻을 우리는 문화재 앞에서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것이다.


태그:#국보, #탑리5층석탑, #모전석탑, #의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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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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