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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하나] 20일, 일본 오리오 전철역 주변에서는...  

규슈조선중고급학교 인근 오리오 전철역 부근. 학생들이 짐을 들어주기 위해 대기해 있다가 사양하는 학부모 가족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규슈조선중고급학교 인근 오리오 전철역 부근. 학생들이 짐을 들어주기 위해 대기해 있다가 사양하는 학부모 가족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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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고급학교 인근 오리오 전철역 부근. 대기하고 있는 학생들이 운동회에 참석하는 학부모 가족들의 짐을 들어주고 있다.
 조선중고급학교 인근 오리오 전철역 부근. 대기하고 있는 학생들이 운동회에 참석하는 학부모 가족들의 짐을 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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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9시께 일본 후쿠오카현 오리오 전철역 주변. 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길목을 막고 서 있다. 전철에서 내려 길을 걷던 어른들은 학생들 앞을 지나다 승강이를 벌인다. 몇몇은 학생들을 피해 달음박질을 한다. 가까이 가보니 학생들이 입은 체육복 가슴에 '규슈조선중급' '규슈조선고급'이라고 쓰여 있다. 규슈조선중고급학교 학생들이다. 다툼 소리가 들린다.

"이리 주세요!"
"그냥 놔두라."
"그래도 주세요!"
"일 없다. 일 없대두!"

학교 운동회 보러 찾아오는 학부모들의 짐을 들어주겠다는 학생들과 혼자들 수 있다며 사양하는 학부모들의 '신경전'이다. 빼앗듯 짐을 챙겨든 학생들은 뿌듯한 미소를 짓는다. "성공 했어요"하며 손을 흔들어 보이는 학생도 있다. 학교 입구에 들어서자 "환영합니다"는 글귀가 먼저 방문객을 맞았다.

[풍경 둘] 습지 메워 만든 56년 역사의 규슈조선학교

규슈조선학교 정문.
 규슈조선학교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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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오 전철역은 후쿠오카시내에서 북쪽에 있다. 시내에서 전철을 타면 약 30분 정도 걸린다. 오리오역에서 학교까지는 약 300~400m 정도다. 전철 건널목을 지나 경사가 있는 길이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은 경사가 이어지자 다소 걷기 부담스러워한다. 등굣길을 따라 주택이 듬성듬성 있지만 중심부와 떨어진 곳에 학교가 있다.

학교를 처음 설립한 1956년 4월, 이곳은 당시 아예 인적 없는 산이었다. 재일교포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았지만 누구도 조선인에게 학교 지을 땅을 팔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쓸모없는 산 속 연못을 산 후 나무를 베고 흙을 넣어 다졌다. 판잣집이지만 교포들의 힘만으로 만든 어엿한 '우리학교'였다. 당시 등굣길은 훨씬 가파르고 비가 오면 신발에 진흙이 덕지덕지 묻었을 것이다. 

1956년 4월, 인적 없는 산 속 습지를 메워 동포들 힘으로 규슈조선학교를 세웠다. 사진은 당시 학교 공사 모습.
 1956년 4월, 인적 없는 산 속 습지를 메워 동포들 힘으로 규슈조선학교를 세웠다. 사진은 당시 학교 공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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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새로 건립한 새 학교는 화사하면서도 세련돼 보인다. 한일자(-)로 초급학교와 중, 고급학교가 나란히 늘어서 있다. 오른편에 위치한 기숙사는 아늑한 느낌을 준다. 운동장은 대형 천막 수십 개를 펼쳐 놓았는데도 허전해 보일만큼 넓다. 산과 습지를 일궈 학교를 세운 사람들의 노력과 마음 씀씀이가 느껴진다.

교문 입구 학교를 소개하는 글 속에는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 학교 역사와 민족교육에 대한 자긍심이 담겨있다.

"규슈 일각에 우뚝 솟은 민족교육의 전당 규슈조선중고급학교와 기타규슈조선초급학교에는 후쿠오카현을 비롯한 규슈 7현과 야마구치현의 교포 자녀들이 다닌다. 앞으로 학생들이 향기 그윽한 아름다운 꽃처럼 활짝 피어나 통일조국과 교포사회에서 그리고 조일친선의 훌륭한 역군이 되리라..."

[풍경 셋] 만국기 대신 단일기...화려한 행진

운동회 시작되기 전 운동장 모습.
 운동회 시작되기 전 운동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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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 경기에 앞서 입장식을 하는 학생들.
 운동회 경기에 앞서 입장식을 하는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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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개의 깃발이 펄럭인다. 한국 운동회에서 보는 만국기가 아닌 북한기와 한반도 단일기다. 단일기에는 울릉도는 물론 독도까지 그려 넣었다. 운동회를 즐기러 온 방문객들을 위한 대형천막도 30여 개가 넘어 보인다.

오전 10시. 운동회가 시작됐다. 빠른 리듬의 행진곡이 울리는가 싶더니 학생들이 행진을 하며 절도 있게 입장을 시작했다. 별도의 소조별 입장 시간도 있었다. 축구부, 농구부(롱구부) 등 운동부에 이어 무용부, 가야금부, 취주악무(밴드부), 합창부, 미술부, 민족타악부 등 소조별 행진이 이어졌다. 청군 홍군이 구분이 되도록 나누어 서서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아 모든 관람객들이 학생들 표정까지 한 눈에 볼 수 있게 했다.

축구부는 축구화 신은 경기복 차림이고, 무용부는 독특한 무용복을 입고 있다. 축구부와 농구부 경기복에는 'COREA'라고 새겼다.

약 20여 분에 걸친 행진이 끝나자 교장 선생님이 연단에 올라 운동회를 준비해온 교원들과 학생들을 격려했다. 학생들에게는 "즐거운 하루를 보내 달라"고, 학부모들에게는 "학교사업 발전을 위해 보다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이어 청군과 홍군 학생 대표가 나와 "정정당당히 참여할 것"을 선서했다.

행진이 끝나자마자 심사위원단이 청군에게 행진상 30점을 안겼다. '청군' 학생들의 박수와 함성이 운동장에 울렸다. 행진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행진순서에 따라 동료학생이 나와 독특한 억양의 감칠맛 나는 목소리의 소조별 소개도 귀를 쫑긋하게 했다. 

"취주악무는 음악 속에서 보람을 찾고 노력을 아끼지 않는 소조입니다.... 다음은 중급부 축구붑니다. 작년에 희망배에서 3위이라는 높은 성적을 얻었습니다.... 중앙대회에서 준우승의 영예를 안았던 중급부 롱구부는 올해 3월에도 3위를 차지했습니다.... 고급부 가야금부는 가야금 변창 부문에서 2년 련속 우수작품을 선보여 전국에 이름을 떨치고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전통 있는 소조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졸업생 선배들의 많은 지도와 방조를 부탁드립니다"

[풍경 넷] 고급부 3학년들의 '마지막 운동회'

집단보건체조로 몸을 푸는 학생들.
 집단보건체조로 몸을 푸는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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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부 1학년 학생들이 학부모와 함께 첫 운동회에 참여하고 있다.
 중급부 1학년 학생들이 학부모와 함께 첫 운동회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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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에 앞서 전교생이 '보건체조'로 몸을 풀었다. 근데 많이 듣던 낯익은 목소리와 억양이다. 초중고 시절 "국민체조 시이~작!"에 이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둘! 둘! 셋! 넷!..."하던 비슷한 톤의 목소리 체조반주를 이곳 규슈조선학교 운동장에서 만났다. 체조동작도 거의 흡사하다.

운동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달리기 경기가 시작됐다. 중급부 학생은 100m, 고급부 학생은 120m를 달렸다. 이어 학년별 경기에서는 각기 다른 방식의 경기가 열렸다.

'보호자와 함께' 경기는 중급부 1학년과 고급부 3학년 학생 및 학부모가 경기를 벌인다.
학부모가 눈을 가리면 자녀인 학생이 지그재그 장애물을 피하게 유도한다. 목적지에 마련된 대형판에 도착하면 학부모는 미리 준비한 자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붙인 후 돌아온다. '사진이어 붙이기'인데 경쟁이 치열했다.

중급부가 붙인 대형판에는 부모와 학생들의 어린 시절 함께 찍은 사진이 많았다. 고급부 사진에는 이곳 규슈조선중고급학교 시절 사진이 대부분이다. 경기가 끝나자 사진판 앞에서 학부모와 학생들이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는다. 고급부 3학년 학생과 학부모에게는 마지막 운동회다.

[풍경 다섯] 운동회야? 학예발표회야?

무용부 학생들이 조선무용을 선보이고 있다.
 무용부 학생들이 조선무용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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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부 학생들이 그림그리기시연
 미술부 학생들이 그림그리기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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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잘한다 잘해..."

한국의 여느 운동회와 다른 점을 꼽자면 기량을 뽐내는 시간이다. 한국의 '학예발표회'라고나 할까. 운동장 왼편에 축구부, 오른편에 농구부가 각각 등장해 동시에 기교와 실력을 뽐낸다. 한 학생이 축구공을 드리블하다 어느 순간 슛을 날리자 골키퍼가 몸을 날려 막아냈다.

각 소조별로 주어진 5분 이내에 기량을 선보여야 하는 만큼 속도가 빠르다. 미술부는 미리 큰 용 모양의 밑그림을 그려왔다가 순식간에 10명의 학생들이 공동 작업으로 채색을 마무리했다.  

이 학교 소조의 기량은 일본 전국 학생들과 견주어도 특별하다. 고급부 축구부의 경우 지난해 신인전, 규슈대회, 인터하이예선에서 각각 좋은 성적을 냈다. 제2의 정대세, 안영학을 꿈꾸는 학생들이 있을 법했다. 고급부 농구부 학생들도 각종 선수권대회에서 상위 성적을 거두고 있다.

무용부가 등장하자 박수소리가 더욱 커졌다. 10명으로 구성된 중급 무용부는 중앙예술경연대회 군무와 중무부분에서 은상을 차지했다. 고급부 무용부는 9명으로 지난해 중앙예술경연대회 중무부문에서 은상을 받았다. 춤사위에 빠진 기자를 보고 옆에 있는 한 학부모가 보충설명을 해준다. 

"민족의 맛이 나는 조선무용의 매력을 백방으로 과시하고 있어요. 조선무용은 보면 볼수록 매혹적입니다."    

[풍경 여섯] 운동회는 교포들의 잔치 날

형형색색 도시락.
 형형색색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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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학교 운동회는 동포들간 안부를 묻고 확인하는 교류의 장이다.
 우리학교 운동회는 동포들간 안부를 묻고 확인하는 교류의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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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던 점심시간이다. 각자 준비해온 도시락을 펼치자 밥상이 형형색색 꽃밭이다. 주먹밥에서 각종 전, 튀김, 계란말이, 닭튀김, 과일까지 '음식박람회장'이다. 가정마다 준비해온 요리만 수십 가지로 입에 넣기 아깝다는 생각이 들만큼 화려하다.

"우리학교 운동회는 학교뿐 아니라 교포들의 잔칫날입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교포들이 한 자리에 모이기 어렵습니다. 많은 음식을 준비해 와 서로 음식과 술을 나누고 회포를 푸는 것이죠. 가족들이 먹을 음식만이 아니라 이웃 교포들과 나눌 것까지 장만하다보니 풍성하고 양도 많습니다."   

음식을 서로 권하고 나누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시골 잔칫집 분위기다. 조선학교 운동회답게 막걸리도 등장했다. 간이매점에서는 포천 이동막걸리가 인기다. 오랜만에 만난 교포들이 오가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금세 점심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많은 음식이 남았다.

"오늘 저녁, 내일 아침... 계속 운동회 음식을 먹어야죠."(웃음)

우리학교 운동회는 교포들의 만남의 장이자 잔칫날이었다.  

[풍경 일곱] 홍군-청군, 치열한 응원전

청군 홍군 간 응원전도 치열하다.
 청군 홍군 간 응원전도 치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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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달리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응원하는 학생들.
 이어달리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응원하는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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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전 모습. 격렬한 몸싸움에 기수를 태운 학생들의 표정이 익살스럽다.
 기마전 모습. 격렬한 몸싸움에 기수를 태운 학생들의 표정이 익살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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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경기는 내내 박진감이 넘쳤다. 아슬아슬한 집단체조가 펼쳐지자 관중 대부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마전은 치열했다. 실제 말이 달리듯 기마전을 하는 동안 흙먼지가 일었다. 

운동회의 백미 줄당기기(줄다리기)에는 홍군과 청군은 물론 학부모, 졸업생까지 가세한 7개 지역 간 대항으로 이어졌다. 남녀 800m 이어달리기는 운동장을 뒤흔들 만큼 이목을 집중시켰다. 엎치락뒤치락 땀을 쥐게하다 선두를 달리던 한 학생이 넘어지자 긴 탄성과 박수가 교차했다.

응원전도 덩달아 달아올랐다. 홍군이 이길 때마다 "오 필승 홍군, 이겼다! 이겼다!"를 연호했다. 청군 응원석에서는 "괜찮아요. 괜찮아요, 오늘의 승리는 우리 것"이라며 맞섰다. 청군 응원석은 자신들의 팀이 패하자 "가라 가라 가라 홍군! 타도 타도 타도 홍군!"을 외쳤다. 이날 최종 승리는 응원전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청군에게 돌아갔다. 

[풍경 여덟] 치마저고리 입지 못하는 '우리학교'

달리기를 하는 학생들.
 달리기를 하는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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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회를 마치고 하굣길에서.
 운동회를 마치고 하굣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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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시간 보다 약 30분을 넘겨 오후 3시께 폐회가 선언됐다. 학부모와 참가자들은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찍으며 운동회 소감을 나눴다.

운동회를 관람한 한 일본인은 "일본 초등학교에서도 매년 운동회를 하지만 중학교부터는 학부모들이 참여하지 않는다"며 "조선학교 운동회는 큰 공연을 본 것처럼 재미있고 긴 여운이 남는다"고 소감을 밝혔다.

오후 4시께, 학교 청소 등 뒷정리를 마친 학생들이 하나 둘 교문을 나서기 시작했다. 얼굴마다 웃음꽃이 가득하다. 말끔한 교복 차림이다. '우리학교'하면 떠오르던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학생의 모습을 하굣길에서는 볼 수 없었다.

"몇년 전 일본 우익들이 치마저고리를 입고 다니는 우리학교 여학생들의 옷을 찢는 등 폭력을 가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때부터 등하굣길에는 치마저고리를 입지 않고 있습니다. 학교 안에서만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습니다."  


태그:#우리학교, #규슈조선중고급학교, #운동회, #응원전, #제일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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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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