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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군사협정 체결시도가 의미하는 몇 가지들

근래 들어 비슷한 시기에, 공교롭게도 그동안 우리의 일상에서 잊혀지고 지나간 과거로 치부되고 있던 일제강점기의 '망령'이 어른거리는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다. 하나는, 어느 극우성향의 일본인이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세워 놓은 위안부소녀상에 '다케시마는 일본땅'이라 적힌 말뚝을 세워놓은 사건이었다. 게다가 그 일본인은 위안부소녀상을 '매춘부상'이라 폄하하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했다고 전해졌다. 언론들은 이 사건을 '말뚝테러'라 부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지만, 정작 한국민의 가슴에 깊은 분노와 상처를 남긴 그 일본인은 아무런 법적 제재도 받지 않은 채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얼마 지나서 일까, 한바탕 국내여론이 들끓는 사건이 한국정부에 의해 촉발됐다. 바로 이명박 정부가 이른바 '한일군사협정'을 국민들 몰래 비밀리에 추진하려다 들통이 나버렸던 것이다. 이에 국내의 여론은 발칵 뒤집혔고 '가서명'까지 했다는 이 협정은 하마터면 정식으로 체결될 뻔했으나, 결국 여론에 밀린 한국정부가 취소함으로써 연기됐다.

이 협정은 북한의 위협을 명분으로 한국군과 일본군이 정보를 공유하며 긴밀히 협력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일본의 자위대를 정식 '군대'로 인정하게 되고 더 나아가 한반도 유사시 일본군이 개입하게 되는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논란이 되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이 땅을 병탄하고자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본군이 경복궁과 덕수궁을 불법으로 점령한 뒤, 조선 땅을 누비며 이 땅에서 전쟁 물자를 수탈해가고, 필요한 인력을 동원한 '치욕의 기억'이 다시금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처럼 언뜻 생각하면 오늘로부터 멀게만 느껴지던 '아픈 역사'의 그림자가, 의외로 너무나 가깝게 아직도 우리 곁에 어른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충격적인 점은, 그 '아픈 역사'의 '재현'이 일본의 어느 극우분자에 의해서만 촉발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집권세력에 의해서도 촉발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도대체 근대국가로의 진입로에서 일제의 강점에 의해 좌절을 겪었으며, 온갖 수난과 질곡으로 점철된 일제 식민 지배의 역사적 경험을 안고 있는 나라에서, 어떻게 그것도 집권층이 이런 '발상'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지점에서 주목할 점은 이명박 정부가 한일군사협정을 추진하게 된 동기로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명분으로 내세우고(물론 실제로는 중국에 맞서 한미일 협력체계를 확고히 하려는 미국의 압력이 크게 작용했겠지만), 이 협정의 추진과정에선 여론의 반발을 우려해 이와 같은 중대한 사안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 진행했던 사실이다.

이 사실들은, 일제에 의해 짓눌렸던 과거 역사에 대한 정권집단의 '기억상실'이,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특수상황과 '반민주성(反民主性)'이라는 현 정권의 속성과 맞물리며 일종의 총체적 병리현상으로 드러난 결과가 이명박 정부의 한일군사협정 체결 시도임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조선총독부 철거에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까지

그러면 우리는 지금까지 과거의 아픈 역사, 적어도 일제 식민지시대 이래 최근에 이르는 현대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수용해왔는가. 물론 이를 한꺼번에 정리하는 것이 간단한 일은 아닐 것이다. 기억이란 기억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선 대표적인 상징적 예를 들고 싶다. 바로 광화문 앞의 공간이다.

지난 1995년, 당시 문민정부는 이른바 '역사바로세우기'를 내걸며 당시까지 광화문에 있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어버렸다. 잘 알다시피 조선총독부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기관으로 상징성을 갖는 건물이었다. 그런데 당시 문민정부는 '일제 잔재청산'의 상징성과 통쾌함을 널리 알리고 싶었는지, 조선총독부 건물을 이해 광복절에 맞추어 폭파, 철거하였다.

총독부 건물이 폭파되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통쾌함과 짜릿함을 느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통쾌함은 일회성의 짧은 것이었을 뿐이다. 왜냐면 그것은 과거의 아픈 '기억'을 없애버리고 잊어버리겠다는 '망각'의 과정이었고, 일회성의 '쇼(show)'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 일제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와 모진 수난을 겪은 당사자들, 즉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시기 징병, 징용으로 끌려간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위안부로 끌려간 할머니들의 상처가 아물지 않고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속에서, 또 그때까지 국가가 직접 나서 단 한 번도 그분들의 유린당한 인권과 상처를 보듬어주지 못한 속에서, 더구나 식민지배의 가해자인 일본이 결코 한국인들에게 진정으로 사죄한 적이 없는 속에서, 그러한 쇼는 그저 '조선총독부'로 상징되는 과거의 아픈 기억과 상처를 이제 더 이상 되돌아보지 않겠다는 '선언'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것은 일제 식민지배의 망령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속에서도 마치 그것이 '옛날의 일'인양 착각하게 만드는 착시현상만을 유발했을 따름이다.

그래서일까. 그 후 어느 시점부터 일제 식민지시기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심지어 시간이 흐르면서 일제 식민지시기의 경제 발전이 이후 1960, 70년대 한국경제의 발전으로 이어졌다는 논리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식민지시기와 그 이후에 이어진 분단과 전쟁, 독재의 현대사를 '억압'과 '질곡', '모순'의 시대로 보는 관점에 대해 '자학사관'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우리 현대사를 경제적으로 장족의 발전을 이룬 자랑찬 역사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관점에서 일제의 식민지배와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 시기를 대한민국 발전의 토대가 마련된 시대로 재평가해야 한다는 담론이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런 주장은 그러한 역사담론에 뿌리를 둔 이명박 정부가 출현하면서 더욱 힘을 얻었다. 이를 주장하는 세력들은 이제 정부와 함께 여러 형태로 자신들이 '만들어낸 기억'을 '대한민국 정통성 강화'라는 포장으로 엮어 현실의 담론 공간에서 재현하려 했다.

그래서 다 알다시피 이명박 정부 초창기부터 건국절 논란,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 논란, '자유민주주의' 논란, 이승만 동상 건립 논란, KBS의 백선엽 미화 논란 등이 지난 5년 내내 끊임없이 계속됐다. 여기에는 나름대로 일관성이 있었다. 곧 일제 식민지시대이래 이 땅을 주름잡아 온 친일세력 및 극우반공세력의 역사적 행적을 정당화하고, 이를 '대한민국 정통성 확립'으로 포장함으로써 역사를 '체제 이데올로기화'하겠다는 의도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될 경우 도덕적·인간적 측면에선 역사의 '정의'와 '상식'이 말살될 뿐만 아니라, 현실적 측면으로는 분단체제 아래에서 어느 일방의 체제 이데올로기의 강화는 당연히 분단의 골을 더욱 깊게 팰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결국 남북의 대립을 조장하는 결과만 낳을 것이 뻔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정권 초기부터 꾸준히 촉발해온 이러한 논란의 최종완결판으로, 기묘하게도 광화문 앞의 공간을 택했다. 바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건립이 그것이다. 이제 자신들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 '만들어진 기억'을, 담론의 공간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의 실제적인 공간에서 재현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철거된 조선총독부가 있던 공간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건립이라. 왠지 무언가 절묘하게 공통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조선총독부 철거는 그 건물로 상징되는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통쾌한 쇼'를 통해 일거에 '망각' 속으로 빠트린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에, 간단히 말해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역대 독재정권을 '경제적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치켜세우는 집단이 그러한 자신들의 기억을 구체적으로 재현하는 박물관을 짓고 있는 것이다. 이를 과거 역사 속 '일제'와 '독재정권'으로 표상되는 '가해자'로 인해 생겨난,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망각'한 결과라 본다면 지나친 것일까?

'역사의 해' 2010년을 그냥 흘려보낸 우리

하지만, 아직 '망각'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망각의 '주체'는 특정 이념집단과 이명박 정부에 국한될 뿐이다. 이제 좀 더 층위를 달리해 '망각'의 양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난 2010년은 역사적으로 아주 뜻이 깊은 해였다. 일제의 한국병탄으로 따지면 100년이 되는 해였고,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민족분단을 고착화시킨 한국전쟁이 60년 되는 해였고,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운동에 커다란 이정표를 남긴 4월혁명이 50주년 되는 해였다. 또 신군부의 등장에 반대해 일어난 5.18광주민주항쟁이 30돌이 된 해였고, 남북관계 진전에 한 획을 그은 6.15남북공동선언 발표가 열 돌이 되는 해였다.

사실 2010년 한 해 동안 '기억'하고 '기념'해야 할 이 역사적 사건들만 보고 있노라면, 식민지-분단-전쟁-독재-민주화로 이어지는 우리 근현대사의 거대한 흐름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의 끝에 2010년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차원에서나 민간차원에서나 언론차원에서나, 일부를 제외하고는 2010년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역사적 상징성에 주목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기억하려는 움직임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위에서 열거한 역사적 사건들은 한국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라면, 분명 '기억해야만 하는 역사'일 것 같은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2010년의 역사적 의미를 짐작조차 못한 채 그냥 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다들 '먹고 살기' 바쁜 속에서 그런 것을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호고(好古)의 벽(癖)' 정도로 취급되는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한다. 글쓴이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조금이라도 우리 공동체의 역사에 관심이 있고 애정이 있다면 2010년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해일 텐데…'라는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더구나 위의 역사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단순한 '호고'가 아니지 않은가. 엄연히 현재 진행되고 있는 현실의 일을 직시하자는 것인데 말이다. 단적으로 말해 지금으로부터 시간적으로는 멀게 느껴지는 식민지 시대의 상처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치유되지 않은 채 그대로 유지되고 있지 않은가.

또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해방'을 따라 이어진 '분단'은 60년 전의 과거가 아닌 오늘의 일이지 않은가. 게다가 4월혁명의 정신을 뒤엎은 5.16쿠데타를 공공연히 '혁명'으로 치켜세우고, 광주학살을 저지른 신군부의 일원이 당당히 국회의장이 되는 현실이 바로 오늘 우리사회의 일각의 작태이지 않은가. 이를 '망각'과 '착시현상'의 결과로 본다면 지나친 평가일까?

역사를 통한 '기억'과 '치유'의 필요성

우리는 여기서 새삼 과연 우리 현대사에서 '아픈 역사'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 도대체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역사 속의 아픔은 무엇이고, 상처는 무엇인가 말이다. '아픔'과 '상처'란 그리 정의내리기 어려운 말은 아닐 것이다. 한마디로 '아픔'과 '상처'는 공동체 구성원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지배 권력을 비롯한 강자(强者)에 의해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권리를 직접, 간접으로 유린당하고 박탈당할 때 발생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를 우리 근현대사의 흐름에 투영시켜보면 어떨까. 먼저 일제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공동체 내부 구성원들의 권리가 억압되고 유린되었다. 그것은 심하게는 '학살'의 형태로(예컨대 3.1운동기의 학살, 경신대참변, 관동대학살 등등) 나타났고, 기본적으로는 식민지인들의 기본권을 일체 허용하지 않고,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식민지배의 마지막 단계에는, 직접적으로는 징병, 징용, 위안부의 이름으로 다수의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모진 고난과 평생 씻을 수 없을 상처를 남겼고, 간접적으로는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수탈, 동원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일반 구성원들의 삶을 파괴시켰다.

다음으로 역대의 독재정권은 독재 권력을 유지, 영속하기 위해 공동체 성원들을 상대로 무수한 국가폭력을 저질렀다. 이 역시 극단적인 형태로는 '학살'로 구현되었고(가령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 등) 일상적인 형태로는 사찰과 감시, 더 심하게는 '고문'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분단의 상황은 그러한 국가의 부당한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것에 대한 불만이나 저항을 '금기'라는 사슬로 무력화시키는 좋은 무기였다.

여기에 더해 급격한 자본주의 산업화 과정에서 노동자를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독재 권력은 일방적으로 '희생'을 강요했다. 이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균등한 삶을 봉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 가운데서도 약자의 권리를 외면, 박탈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제국주의와 독재권력, 그리고 분단이라는 억압적인 조건이 공동체를 상대로 남긴 '비상식적인' 상처와 아픔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 속의 상처이자 아픔인 것이다. 물론 혹자는 이러한 아픔의 역사, 상처의 역사, 질곡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 자칫 역사를 통해 '자긍심'을 기르는 데 역효과를 낼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픈 역사가 현재진행형으로 그대로 남아있는 한, 그것은 강조점을 달리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오히려 자긍심이란 이러한 아픔의 역사를 슬기롭게 치유하고 극복하는 데서 싹틀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야말로 진정 우리사회의 성숙도와 건강성을 말해주는 지표가 될 것이기에 말이다.

달리 말해 역사는 '기억'과 '치유'의 한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 역사의 어두운 면에 대한 사회 구성원 전체의 명확한 기억은, 그러한 어두운 역사에 대해 치유의 '필요성'과 '근거'를 끊임없이 제시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누군가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권리를 억압당하거나 박탈당했을 때, 그 상황을 사회 구성원 전체가 기억하고 보듬어줄 수 있다면, 그 상처가 더 이상 확대, 지속되거나 반복되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그때 치유하지 않고 넘어가는 상처는 곪거나 흉터를 남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현대사에선 그때그때 치유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버린 상처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다. 그리고 그 상처들을 현재 시점에서 기억하려 하는 이 역시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그렇지만 그 상처들은 결코 무시하거나 자의적으로 망각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 전체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야 할 대상이다.

이점은 오늘날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분단체제, 독재 권력이 지닌 반(反)민주, 반(反)인권, 반(反)도덕, 반(反)상식의 속성이 이와 같은 과거 역사의 어두운 면에 대한 '망각'을 매개로, 다시금 현재 속에서 정권집단에 의해 '부활'하고 있는 결과가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태그:#아픈 역사, #일본 제국주의와 독재정권, #망각, #기억과 치유, #역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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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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