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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본산성- 역사기행 일행들이 새벽에 일어나 고구려의 첫 수도 홀본산성(오녀산성)에 오르고 있다.
 홀본산성- 역사기행 일행들이 새벽에 일어나 고구려의 첫 수도 홀본산성(오녀산성)에 오르고 있다.
ⓒ 고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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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6시에 일어나 등산이라니. 각오하고 간 단체 여행인지라 볼멘소리 할 틈도 없이 나는 무리에 휩쓸려 산을 오르고 있었다. 돌계단으로 이뤄진 산길은 무릎을 구부려 힘껏 높이 들어 올려 다음 계단을 밟아야 할 정도로 가팔랐다. 130여 명의 긴 행렬을 위에서 바라보니 우리 일행은 성실한 행군을 하고 있는 개미군단처럼 보였다. 맨 앞에는 법륜스님이 섰다. 스님은 여행 시작 전에 20여 일간 단식을 했다는데도, 여행이 시작되어도 복식을 하느라 물만 드셨다는데도, 누구보다 가뿐하고 힘차게 산을 올랐다. 하지만 스님을 뒤따라가는 내 등에는 땀이 흥건하고 숨소리도 거세졌다.

"에고, 에고고... " "헉헉"

오를수록 더 가팔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30여분이 지났을까? 우리는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여기는 환인(桓仁)현의 홀본산성(오녀산성), 고구려의 첫 서울이 자리했던 곳이다. 땀을 훔치고 주위를 둘러본다. 단박에 성을 쌓았던 흔적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내가 고구려의 첫 출발지에 서 있다니, 기원전 37년에 건국된 나라의 터에 내가 서 있다니. 2천 년이 넘는 역사의 압축파일이 지금 내 눈 앞에서 풀리고 있는듯해 가슴이 벅차올랐다.

천연 요새, 고구려 첫 수도에 가다

산상강의- 스님의 설명으로 무심코 지나칠 곳들이 살아 숨 쉬는 역사유적지로 탈바꿈했다.
 산상강의- 스님의 설명으로 무심코 지나칠 곳들이 살아 숨 쉬는 역사유적지로 탈바꿈했다.
ⓒ 고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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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반인 나는 법륜 스님이 이끄는 7박 8일 동북아 역사기행에 참여했다. 스님이 최근에 발간한 <새로운 100년>에서 역사기행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스님은 <새로운 100년>에서 "우리 국민들은 역사의식이 부족하다"면서 "일단 고구려, 발해 유적지에 가보면 지금은 중국 땅이지만 우리 조상들이 이곳 만주 땅을 진짜로 누비고 다녔음을 실감하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스님은 18년째 동북아 역사기행의 가이드 역할을 해오고 있다. 이번 18차 역사기행은 일반팀(8월5일 ~ 8월12일)과 청년팀(8월12일 ~ 8월19일)으로 나눠져 진행됐다. 나는 일반팀에 포함돼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중국의 동북 3성을 돌며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유적지와 항일운동 유적지, 그리고 압록강, 두만강, 백두산 일대를 돌아봤다.

우리가 고구려 첫 수도 홀본산성에 오른 것은 여행 둘째 날이었다. 부여왕족 고주몽이 왕실에서 쫓겨나 이곳에서 고구려를 세웠다는데, 고주몽이 쫓기듯 고향을 떠난 아픔을 이 산속에 꽁꽁 숨기고 싶었나 할 정도로 홀본산성은 깊숙한 산 속에 있었다. 법륜스님은 이곳이 천연 요새라고 했다.

"이 지형을 보세요. 산성의 대부분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절벽이지 않습니까? 성을 조금만  쌓고도 적을 방어할 수 있었던 거지요. 그런데 이런 절벽 위 정상에는 평지가 있고 또 물이 있습니다. 군사들이 머물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거지요. 그래서 고구려 첫 수도로서는 적절했던 거지요."

혼자 오면 무심코 지나갈 곳들이 법륜스님의 설명이 곁들어지자 살아 숨 쉬는 역사유적지로 탈바꿈했다. 스님은 산 정상에서 우리 일행을 모아놓고 약 20분간 즉석강의를 했다. 서기 668년에 멸망하기까지 705년간 존속했던 고구려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가에 대해서였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돼 있지만, 그래서 우리는 지금 마치 섬나라 사람처럼 '대륙기질'을 잃어버리고 살지만, 고구려 시대의 우리 선조들은 큰 기상을 가지고 살았음을 알 수 있었다. 다음날 광개토대왕비를 둘러보고 그 비석에 새겨진, 해독하기 쉽지 않은 글자들을 읽어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구려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나는 이 방대한 땅이 지금은 중국의 차지가 된 것에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고구려의 뒤를 이은 발해의 두번째 수도, 상경용천부에 도착해 넓은 궁터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을 때도 그랬다. 이 성은 당시 동북지방에서 당나라 장안성 다음으로 큰 궁성이었다고 한다.

주춧돌만 남아있는 성터를 둘러보며 법륜스님은 "발해는 고구려보다 영토가 두배는 더 컸다, 발해는 고구려 후손들이 말갈족과 연대해서 만든, 명백한 우리 선조들이 만든 나라였다"고 강조했다. 법륜스님은 이 궁터 근처에 있는 발해의 사찰 흥룡사에서 예불을 들이면서 우리민족의 복된 미래를 발원했다. 

우리의 옛 땅을 어떻게 다시 찾을 수는 없을까? 법륜스님의 답은 이랬다.

"땅이란 이 나라 것도 됐다가 저 나라 것도 된다. 자꾸 그 이전을 따지면 끝이 없다. 새로운 시대에는 특정 국가의 주도력이 꼭 영토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 이제는 과거처럼 이웃나라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협력으로 공동의 이익을 만들어내야 한다."

"천 년의 역사가 아파트 단지에..." 국내성에 가보니

"여기가 고구려 두번째 수도 국내성입니다."

달리는 버스 안, 수신기에서 들려온 법륜 스님의 목소리에 잠이 깼다. 평균 새벽 4시에 기상하니 버스로 이동하는 틈에 자는 쪽잠으로 부족한 잠을 메우고 있었다. 눈을 떠보니, 우리나라의 80년대에 지어진 연립아파트 단지 같은 곳이었다. 여기가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라고?

버스에서 내려 보니 아파트 단지 곳곳에 풀로 뒤덮인 돌 성들이 있었다. 이래봬도 이곳이 고구려의 두번째 수도로서 2대 유리왕부터 20대 장수왕까지 400여 년간 고구려 정치의 중심지였다. 그런 곳이 지금은 소도시의 아파트 단지로 전락한 풍경은 기묘했다.

"어, 어 쟤네 봐라, 이 엄청난 역사 유적지에서 놀고 있네."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고구려의 옛 수도의 성곽은 놀이터일 뿐이었다. 엉성하게 쳐진 철망 울타리를 거침없이 넘나들며 큰 돌들을 말인양 타고 놀고 있었다. 긴 세월의 흐름은 그런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국내성은 압록 강변에 있다. 국내성을 둘러본 후 우리는 압록 강변을 따라 걸으면서 강 건너의 북한 땅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흐르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한편에 지금은 남의 나라가 된 고구려 땅을, 또 한편에는 지금은 분단되어 갈 수 없는 고구려 땅을 바라보았다. 고구려의 세번째 수도는 평양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 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고구려 유적지 탐방은 그렇게 분단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다음날 장군총(장수왕의 무덤이라고 추측)과 광개토대왕릉을 둘러보았는데 두 능 모두 북한 땅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있었다. 그동안 분단하면 남과 북만을 생각했는데, 옛 고구려도 지금은 중국과 북한으로 분단돼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법륜스님이 국내성 앞 압록 강변을 걸으며 북한쪽을 바라보며 말씀하신다. "우선 남과 북이 통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곳 옛 고구려 땅인 중국의 동북3성과 협력해서 동북아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겠지요."

그러고 보니 역사기행이 후반부로 갈수록 내 안에서 일어나는 질문의 핵심이 바뀌고 있었다. 처음엔 잃어버린 옛 고구려-발해 땅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였는데 국내성의 압록 강변에 이르고부터는 우선 남과 북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로 바뀌었다.

저녁시간, 압록 강변 북쪽의 중국땅은 유원지로 변했다. 여기저기서 젊은 중국남녀들이 맥주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강변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식당에서는 강에서 잡았을법한 각종 물고기를 구워대면서 맛있는 냄새로 손님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 땅에서는 어둠만이 짙어갔다. 그곳에서 만난 한 중국교포가 말했다.

"7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압록강변의 북한쪽이 중국쪽보다 더 잘살았어요. 전기도 그쪽이 더 먼저 들어왔는데 지금은 이렇게 역전이 됐지요."

압록 강변에서 본 북한의 뙈기밭

북한 뙈기밭- 산상의 뙈기밭은 한국에서 보기 힘든 풍경이다.
 북한 뙈기밭- 산상의 뙈기밭은 한국에서 보기 힘든 풍경이다.
ⓒ 고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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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압록 강변으로 난 2차선 포장도로를 달려 백두산 천지를 향하는 버스에서 우리는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북한 들녘과 산야를 볼 수 있었다.

"아이고, 저기 보세요, 저게 다 뙈기밭이에요. 저 높은 산의 꼭대기까지 밭을 만들었잖아요. 참 처참하죠."

법륜 스님은 안타까운 듯 혀를 찼다. 스님은 산위의 뙈기밭을 통해 북한 경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실 처음 '뙈기밭'이란 말을 들었을 때 귀에 박히지 않았다. 그저 밭의 한 종류려니 흘겨들었는데 알고 보니 '뙈기밭'은 북한의 악화된 경제상황을 고스란히 비추는 거울이었다. 보통 논밭은 평지에 있어야 정상인데 북한의 뙈기밭은 대부분 가파른 산등에 있었다.

먹고 살기 힘든 북한 주민들이 참다못해 당국의 눈을 피해 산위에까지 올라 밭을 일구었기 때문이다. 서너 시간 압록 강변을 버스로 달리는 동안 법륜스님이 말씀하셨다.

"그래도 올해는 다른 때보다 북한쪽 농사가 조금은 나은 것 같아 다행이네요. 지난 18년간이 압록 강변에서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북한 동포들을 숱하게 봐 왔어요. 그래서 제가 북한동포돕기운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뙈기밭은 다음날 두만 강가를 달리며 북한 땅을 바라볼 때도 계속 볼 수 있었다. 법륜스님은 남과 북이 서로 성장하기 위해서라도 통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백두산 천지- 중국 백두산에 올라 건너편에 위치한 북한 백두산을 보니 가슴 한편이 씁쓸했다.
 백두산 천지- 중국 백두산에 올라 건너편에 위치한 북한 백두산을 보니 가슴 한편이 씁쓸했다.
ⓒ 고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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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를 보기 위해 북한 땅이 아닌 중국 땅을 밟으며 올라가야 했을 때도 그런 질문이 끊이지 않았다. 운 좋게 맑은 날이라 그 푸른 백두산 천지의 전모를 다 한 눈에 껴안을 수 있었지만, 그 신성한 기운을 즐겼지만, 왠지 가슴 한편에서는 씁쓸했다. 우리나라 돈으로 1인당 4만 원 정도 중국의 관광장사에게 보태줬기 때문이다. 중국글자가 찍힌 입장권을 손에 쥔 한 일행이 말했다.

"통일이 되기 전이라도 남과 북이 협력하여 백두산 관광을 개발한다면 굶어죽는 북한 동포들의 수를 상당히 줄일 수도 있을 텐데..." 

독립 운동가를 찾아 통일의 기운을 얻다

이번 역사기행을 하면서 부끄러웠던 순간이 많았다. 우리의 역사를 내가 제대로 알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길림성 화룡시 청호리에 있는 대종교 3인의 묘 앞에서도 그랬다.

"나철, 서일, 김교헌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당신들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들의 묘 앞에 서서 마음속으로 건넨 첫 마디였다. 청호리는 만주 지방 대종교의 발상지란다.

"세 분의 선생님을 모신 묘역이 원래는 참 초라했습니다. 대종교에 건의해 지금 같은 구색을 갖춘 것입니다."

법륜스님은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묘지들을 회상하며 말했다. 역사시간에 분명 그들에 대해 배웠을 것이다. "독립운동은 곧 대종교, 대종교는 곧 독립운동이다"라는 법륜스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대종교를 만들어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던 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시간에 인물과 지명을 그저 시험용으로 외웠던 내가 그들을 기억할 리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그들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고, 아니 '그들의 대의(大義)'를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우리 일행은 법륜스님의 주도로 세 분의 묘를 산뜻이 벌초하고 그들을 기리는 제사를 지냈다.

이번 여행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해 학창시절보다 더 심도 있게 고민해본 소중한 시간이었다. 참가자들은 중고등학생들부터 중장년층까지 연령대는 다양했다. 정동영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이강래 전 민주통합당 의원, 시골의사 박경철씨,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등 사회 인사들도 이번 역사기행에 참여했다. 박경철 원장은 "요즘 그리스 역사에 관련된 책을 쓰고 있는데 스님이 우리나라 역사부터 알아야 한다고 해서 왔다"면서 "정말 많은 것을 얻어간다"고 했다.

마지막 날, 참가자들은 조별로 10여 명씩 여행소감을 나눴다. 우리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잃어버린 우리 땅과 분단된 우리 땅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그럼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나름대로 답을 찾고 있었다.

"하루 한 끼 금식하고 북한동포돕기를 하겠습니다", "아이들에게 통일교육을 더 잘하겠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통일을 앞당길 수 있는 사람을 찍겠습니다."

스님은 우리들의 '결의에 찬' 소감을 다 듣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마 역사기행에 느꼈던 80프로는 잊어버릴 것입니다. 하지만 단 20프로만 남아있어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역사기행에서 돌아와 10여일이 지난 지금, 나를 되돌아본다. 벌써 50%쯤 잊어버렸나? 더 이상 잊지 않기 위해 나는 그때 찍은 사진들을 보고 또 본다. 


태그:#법륜 스님, #역사 기행, #박경철, #정동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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