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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쳐둔 냉면 그릇에 물이 세차게 뿌려지고 있다.
▲ 터진 라디에이터 받쳐둔 냉면 그릇에 물이 세차게 뿌려지고 있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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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이익~!"

56년 만의 추위라는 일기예보를 들으며 제발 난방에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랐건만, 라디에이터에서 물 새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금세 건물 바닥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물이 새는 곳은 라디에이터 맨 아래쪽에 위치해서 육안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손가락으로 더듬자 이쑤시개로 틀어막을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나 있었고, 뜨거운 물이 힘차게 분출되고 있다는 것을 쉬이 확인할 수 있었다.

임시방편으로 냉면 그릇을 물이 새는 곳 아래에 갖다 놓자, 물은 금세 그릇을 채우고 넘치기 시작했다. 물을 빼내는 속도보다 물이 고이는 속도가 점차 빨라지기 시작할 즈음 또 다른 라디에이터가 터진 사실이 확인되었다. 컴퓨터가 놓여 있는 책상 뒤에서 "치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건물이 오래되고, 설비가 노후화되다 보니, 12월 들어 벌써 세 번째 사고다. 건물 내부에 설치된 모든 라디에이터 하부는 부식이 심해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보니, 라디에이터 전체를 갈지 않는 한 올 겨울 내내 물난리를 치러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라디에이터가 두 곳에서 터진 11일까지 영하 10도 안팍의 혹한이 이어졌고, 조금 풀렸다고 하는 12일도 춥기는 마찬가지다. 서울의 이달 상순 최저기온은 1956년 이후 가장 낮았다고 하는데, 서울의 이달 상순 평균기온은 영하 4.1도로 평년보다 6도 이상 낮았고, 연중 평균기온이 가장 낮은 1월 하순보다도 오히려 낮은 기온을 보였다고 한다.

매서운 한파가 계속 이어지고 있고, 올해는 유독 더 추울 것이라는 기상청 예보가 실감나지 않을 수 없다. 지난주 수요일 폭설이 내린 이후 계속된 추위는 도로 곳곳에 빙판을 만들어 생활의 불편을 초래하고 있고, 수도계량기 동파 사고와 보일러 동파뿐만 아니라, 인명과 가축, 농작물 피해까지 이어지고 있다.

혹한과 이주노동자

반나절 노동을 하고 한 컷 찍느라 자세를 잡고 있는 용접공 이주노동자
▲ 폭설과 이주노동자 반나절 노동을 하고 한 컷 찍느라 자세를 잡고 있는 용접공 이주노동자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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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갑자기 폭설이 내리면서 퇴근길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때쯤, 인도네시아 출신 이주노동자가 페이스북에 몇 장의 사진과 함께 짤막한 글을 올린 것을 보았다.

사진에는 야외에서 용접 작업을 하는 공장임을 알 수 있는 너른 작업장에 용접기와 용접기의 굵은 전선들이 철골 구조물들 위로 잔뜩 널려 있었고, 그 가운데에 이주노동자가 작업복에 방한모를 썼지만 장갑은 끼지 않은 모습으로 한 발을 철골 위에 올리고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진을 찍을 즈음에 눈이 온 지 한참 됐는지 그가 서 있는 자리까지 선명하게 신발 도장이 찍혀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사진과 함께 짧게 적어놓은 이주노동자의 글이었다. 그는 인도네시아어로 익살스럽게 폭설로 반나절 근무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었다.

"야외에서 일을 하는데 눈이 계속 왔다. 도무지 용접을 할 수가 없었다. 아이고~. 반나절만 일하고 돌아오면서 학창시절이 생각났다. 선생님들의 회의가 있으면 학생들은 곧바로 하교하던 학창시절 말이다. 이렇게 추우니, 아~ 떨린다. 부르르~."

사진을 올린 이주노동자가 쓴 글은 한마디로 '폭설에 써내린 고향 생각'으로, 읽은 이의 마음을 애잔하게 했다. 인도네시아 연평균 기온이 26.9℃로 연교차가 1℃에 불과하다는 점을 안다면, 영하 10도 가까운 날씨가 한국인이 체감하는 기온과는 또 다르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추위에도 불구하고 학창시절의 즐거웠던 한 순간, 즉 반나절 수업을 회상하는 모습에서 글을 올린 이주노동자의 익살과 함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눈 때문에 반나절 작업밖에 하지 못했고 추위에 떨어야 했지만, 눈 내린 작업장에서 찍은 사진을 눈을 직접 볼 길이 없는 고향에 있는 친지들에게 보내면서 흐뭇해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주노동자들에게 노동시간은 곧 급여로 이어진다. 폭설로 작업이 중단되면 급여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무리 돈을 번다고 할지라도 혹한에 야외에서 일하는 것을 반길 노동자는 없다. 체감하는 추위가 더할 수밖에 없는 동남아 출신 이주노동자들은 추위에 약할 수밖에 없는데도 추워질수록 야외 작업은 이주노동자들에게만 떠넘겨지는 게 일반적인 3D업종의 현실이다.

페이스북에 사진을 올린 이주노동자의 말을 빌리면, 자신의 공장에서 야외에서 용접하는 사람은 이주노동자들밖에 없다고 한다. 용접반을 책임지는 반장도 용접은 직접 하지 않고, 나무조각을 땔감으로 쓰는 공장 안 드럼통에 붙어 있으면서 종종 야외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리만 지르지 밖으로 나오진 않는다고 한다. 결국 폭설과 한파에도 불구하고 야외 용접을 책임지는 것은 이주노동자들인데, 현실은 참 가혹한 셈이다.

대선이 코앞인데 이주노동자 공약 찾기 쉽지 않네

추위에 약한 이주노동자들이 야외에서 일하는 현실 못지않게 이주노동자를 둘러싼 대선 공약 역시 한파가 매섭게 몰아치고 있다.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들이 지난 11월에 대선주자들에게 이주인권 관련한 질의서를 보냈지만, 제대로 된 답변을 한 유력 대권 주자가 없었다.

시일이 한참 지나서 답변한 한 후보가 있었으나 성의 있는 답변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구체적인 공약을 내놓은 유력 후보가 없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아마 유력 후보들 입장에서는 이주인권과 관련한 공약은 '표에 도움이 안 되는 이슈'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나마 세계인권선언일인 12월 10일을 기해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 측에서 '10대 인권 선언'을 내놓으면서, 4항에 일반론적인 차원에서 언급한 부분이 있다는 점이 위안이라고 할 수 있다. 10대 인권 선언 4항은 '장애인, 어린이, 청소년, 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 인권 보장'에 대한 것인데, 결혼이주여성의 안정적 체류, 이주노동자의 노동권 보장 및 이주노조의 법적 지위 인정, 모든 이주 아동 교육권 보장, 가정폭력피해 이주 여성 등에 대한 실질적 구호 및 지원 시스템 확보를 공약으로 내놓고 있다.

여기에서 이주노동자의 노동권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용허가제 근무처 변경 제한', '성실근로자에 한하는 재입국 제도' 등과 같은 독소조항 개정 등의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는 점에서 단순히 구호에 그칠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주노조의 법적 지위 인정이나 모든 이주아동 교육권 보장 등과 같은 부분은 유엔이주노동자 권리협약과 같은 국제인권규약이 요구하는 부분을 인정하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향후 구체화될 여지가 있는데, 이 또한 지켜봐야 할 일이다.

'인권'과 '표' 사이에서 고민하는 대선후보들

한파와 폭설에도 눈꽃을 그릴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 눈꽃 한파와 폭설에도 눈꽃을 그릴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 고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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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후보들은 이주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소수자들을 대변하는 인권 이슈에 대한 분명한 의사표시는 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 부분은 보수나 진보 어느 쪽 할 것 없이 대동소이한데, 그나마 관심을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두루뭉술하게 에둘러 표현하지,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기를 꺼리는 경향이 없지 않다.

물론 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인에게 무의미한 행위일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그 무의미한 행위를 기대하는 국민 또한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표에 큰 도움은 안 되더라도, 혹은 표를 깎아먹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할지라도 분명한 입장을 표명할 때, 유권자들은 해당 정치인의 선명성에 대해 그리고 인권의식에 대해 칭찬을 할 수도 있고, 결단력 있고 꾸밈이 없으며, 분명한 철학이 있는 줏대 있는 정치인이라는 신뢰를 갖게 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작금의 대선 후보들이 보여주고 있는 애매하고 모호한 태도와 구체적이지 않는 공약들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이주인권 운동을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표를 주고 싶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인데, 인권과 현실 정치가 어떠한 괴리가 있기 보다, 밀접하게 연결되고, 인권이 표가 되는 세상이 하루 빨리 왔으면 한다. 그래서 한파와 폭설에도 눈꽃을 그릴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잇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한편 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주노동자들은 이 현실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누군가로부터 존중받지 못하고, 소외를 경험하는 것을 느끼는 사람의 심정이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긴 말보다는 짧은 시로서 이주노동자의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표현하면서, 대선 후보들이 귀를 기울여주기를 희망해본다.

꿈과 현실 사이 - 고기복
나이. 스물 하나에
처음 눈을 봤다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던
흑단(ebony) 빛 얼굴에 삶의 자욱이 묻어나던 그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희끗희끗 염화칼슘 뿌려진 검은 아스팔트 위
하얀 눈이 시커멓게 길눈 쌓이자
허연 눈동자 껌벅껌벅
검은 작업복 걸친 어깨가 떨렸다

검게 짓이겨진 눈길 위를 걷다 들른
황금잉어빵 가게 사장은
가시 없는 고기라며 붕어를 팔았다
두 개에 천 원 하는
붕어빵엔 붕어가 없었지만
반기는 이 없는 길눈에도
호호하며
가시 없는 고기를 맛본 그는 움츠린 어깨를 털며 하~암박 웃었다

그렇게 함박눈 내리던 날
하~암박 웃던 그의 꿈은 현실 위에 놓였다



태그:#이주노동자, #용접공, #눈꽃, #라디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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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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