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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송광사 다비장에서 손상자 가슴에 안겨 있던 법정 스님 영정
 2010년 3월, 송광사 다비장에서 손상자 가슴에 안겨 있던 법정 스님 영정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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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처녀가 있었어. 신랑을 고르다가 혼기를 놓쳤어. 나이가 서른을 훌쩍 넘었을 때인데 이번에는 마음에 드는 신랑 후보가 나타났어. 그런데 결정을 못 내리고 몇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혼자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는구먼. 왜냐하면."
"…?"
"마음에 쏙 드는 신랑감이 나타났는데도 왜 노처녀가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한 줄 알아?"

지묵 스님과 도감 스님이 영문을 몰라 눈만 동그래가지고 멀뚱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이제껏 지켜 온 정조가 아깝다나."

말씀을 마친 법정 스님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음식을 들었다.
- <가슴이 부르는 만남> 113쪽

전남 장흥에 있는 보림사 회주 지묵 스님은 법정 스님과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법정 스님이 손을 씻으러 자리를 비운 사이 밥그릇을 뒤집어 밥 속에 볶은 고기 두어 점을 넣었는데 그 고기를 꺼내 놓으며 법정 스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란다.

지금껏 고기를 먹지 않고 살아온 세월, 정조를 지키듯 먹는 것 하나까지도 조심하고 금하며 살아온 수행생활이 흐트러져서는 안 되니 밥 속에 감춰 놓은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뜻이다. 고기 한두 점이라도 먹이고 싶어 하는 당신들 뜻이야 충분히 알지만 내가 갈 길, 흐트러지지 않은 수행자의 삶을 살겠다는 수절(守節) 선언이다.  

열여덟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가슴으로 새기는 법정 스님 이야기

<가슴이 부르는 만남> 표지
 <가슴이 부르는 만남> 표지
ⓒ 불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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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태주 지음, 불광출판사 출판의 <가슴이 부르는 만남>는 법정 스님을 가슴에 담고 있는 18분을 만나 저자가 가슴으로 담아온 이야기들이다. 저자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법정스님을 가슴으로만 만났을 뿐 한 번도 뵌 적이 없다는 김선우 시인도 있고, 도법 스님이나 지묵 스님, 금강 스님이나 혜민 스님처럼 구도의 길을 걷고 있는 스님들도 있다.

저자는 이해인 수녀님도 만났고, 임의진 목사님도 만났다. 조금 있으면 섬진강변을 매화꽃으로 물들게 할 매화마을 홍쌍리 여사도 만났고, 목판화가 이철수, 불화장 김의식, 소설가 문태순 등 제각각 열여덟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서 연등을 밝히듯이 새긴 이야기다.

열여덟 사람이 하는 이야기는 열여덟 이라는 숫자만큼이나 다 다르지만 그들이 맷돌에 간 듯이 쏟아내고 되새김질을 하듯이 되새겨내는 알곡은 법정 스님이다.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끼고, 마음에 새긴 법정 스님의 삶이며 생전 모습이다. 

이구동성(異口同聲)이면 진리(眞理), 다른 입으로 같은 소리를 내면 그게 곧 진리라고 한다. 열여덟 입으로 들려주는 법정 스님의 삶은 이미 알려진 바와 다르지 않게 무소유며 향기로움이다.

홍쌍리 여사가 들려주는 법정스님은 섬진강 매화향이고, 이해인 수녀님이 들려주는 법정 스님은 찔레꽃 향이다. 도법스님이 들려주는 법정 스님은 난(蘭)이고, 혜민 스님이 가슴에 새기고 있는 법정 스님은 어린왕자가 피운 장미향이다.

열여덟 사람이 열여덟 눈으로 본 법정 스님은 같고도 다르다. 같은 배추지만 어떤 김치로 담그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맛을 내는 김치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들려주는 법정스님은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인연이다.

임의진 목사는 '종교인이 할 일은 궁극에는 종교를 없애는 데 있다'고 한다. 도법 스님은 두 분, 성철 스님과 법정 스님은 "'탐진치'라는 피고름이 들끓는 진흙탕에 두 발을 딛고 서서 꽃을 피워 피고름을 정화시켰다고 하기에는… 좀 다르죠"라는 설명으로 두 분을 연꽃이라기보다는 난초처럼 살아가신 분들이라고 한다.

도끼질 하듯이 읽다보면 저절로 향기로워져

2010년 3월, 법정 스님을 다비하고 있는 연화대와 그 앞에 모셔진 법정스님 영정
 2010년 3월, 법정 스님을 다비하고 있는 연화대와 그 앞에 모셔진 법정스님 영정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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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네 마디로 나뉘어 있다. 첫째마디 '세상을 버리다', 둘째 마디는 '어우렁더우렁', 셋째 마디는 '내가 길이다', 넷째 마디는 '맑고 향기롭게'로 마디를 맺고 있다.

썩어가는 생선은 자신의 몰골을 감싸준 종이에조차 비린내를 묻혀주지만, 향기로움을 가득하게 머금고 있는 향나무는 자신을 쪼갠 도끼에조차 향내를 담아준다고 하다. 열여덟 사람이 향나무고, 열여덟 글에 잔뜩 머금고 있는 게 제각기 뿜어내는 다른 향, 다른 느낌이다.      

도끼질을 하듯이 읽다보면 나무토막 같은 삶에서 찔레꽃 향기도 나고 매화가 만발할지도 모른다.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다 잡내라도 밸까 걱정된다. 나무토막에 도끼질이라도 하듯 읽다보면 저절로 향기로워지고, 무소유의 향과 법정 스님의 그림자가 시나브로 가슴에서 꽃망울진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풍만한 행복과 몽글몽글한 연모지정(戀慕之情)으로….

덧붙이는 글 | <가슴이 부르는 만남>┃지은이 변택주┃펴낸곳 불광출판사┃2013.2.1┃값 1만 5,000원



가슴이 부르는 만남 - 이해인 수녀, 혜민 스님, 김선우 시인… 열여덟 멘토의 울림 깊은 인생 이야기, 그리고 법정 스님 가르침

변택주 지음, 불광출판사(2013)


태그:#가슴이 부르는 만남, #불광출판사, #변택주, #법정, #무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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