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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점곡면 사촌마을에서는 정월 대보름날이면 '전통문화 보존 재현행사'가 벌어진다. 이 날 이곳에 가면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다.
 경북 의성 점곡면 사촌마을에서는 정월 대보름날이면 '전통문화 보존 재현행사'가 벌어진다. 이 날 이곳에 가면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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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는 국민의 70% 이상이 농·어촌에 거주했다. 그 무렵 농촌에서 국민학교를 다녔던 나는 정월 대보름이 되면 아주 신이 났다. 평소에 못 보던 이런저런 먹을거리들의 출현도 어린 나를 기쁘게 해줬다. 밤이면 마을 뒷산에 올라 쥐불을 빙빙 돌리는 것에도 흥이 넘쳤다.

하지만 그 일은 이제 까마득한 추억이 돼 흘러갔다. 지난 24일이 정월대보름이었지만, 나는 당일 오전까지만 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제 우리집에는 정월대보름을 챙길 만한 존재가 안 계시기 때문이다. 세월은 유수같이 흐른다지만, 세상이 변하는 속도도 날아가는 화살처럼 빠른 듯하다.

정월대보름도 모른 채 볼일 보러 다녀

24이 정오 무렵, 서울에 사는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오곡밥을 먹었느냐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오늘이 정월 대보름이구나' 깨달음이 왔다. 아마 나보다 한 세대 젊은 20-30대 청년들 중에는 그 말을 듣고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채지 못하는 이들도 많으리라.

그런데 그 순간, 천운인지 도로변에 '정월대보름, 점곡면 전통문화 보존 재현행사, 윷놀이, 큰줄당기기, 풍등 날리기, 달집 태우기'라고 쓰인 커다란 현수막이 눈에 들어 왔다.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마을의 '의성사촌문화공간' 정문에 내걸린 현수막이었다. 그 아래에는 '2013 계사년 정월 대보름 달집 태우기' 현수막이 덧붙여 걸려 있었다.

풍물패가 어두워지면 태울 달집을 빙빙 돌며 흥을 돋우고 있다.  달집 뒤로 '의성사촌문화공관' 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작은 마을인데도 폐교된 중학교를 활용하여 운영 중인 대규모의 문화공간도 있고, 역사자료전시관 건물도 별도로 보유하고 있는 대단한 공동체다.
 풍물패가 어두워지면 태울 달집을 빙빙 돌며 흥을 돋우고 있다. 달집 뒤로 '의성사촌문화공관' 건물이 보인다. 이곳은 작은 마을인데도 폐교된 중학교를 활용하여 운영 중인 대규모의 문화공간도 있고, 역사자료전시관 건물도 별도로 보유하고 있는 대단한 공동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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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으로 들어서니 오른쪽 천막에서 아낙네들이 '호객'을 한다. 떡을 먹으라고 권하기도 하고, 볶은 콩을 내밀며 맛을 보라고 호의를 베푼다. 마침 점심을 먹지 못한 상황이라 떡이 더 없느냐고 물으니 본부석 옆의 천막에 가면 삶은 돼지고기와 소주도 있다는 즐거운 답변이 돌아온다.

풍물패들이 운동장을 빙빙 돌고 있다. 운동장 가운데에는 어두워지면 태울 커다란 달집이 하늘로 솟구쳐 세워져 있다. 길게 늘어뜨린 천에는 '득남' 등의 소원이 구태의연하게 적힌 것도 보인다. 처음부터 알고 온 게 아니라 업무차 다른 곳으로 가던 도중에 우연히 들른 까닭에 시간상 달집 태우기는 못 볼 것 같아 그것이 미리 안타깝다.

본부석 왼쪽에는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다. 뭔가 싶어 가까이 다가서니 이제 막 윷놀이를 하려는 순간이다. 윷판은 진작 깔려 있고, 지금은 진행자가 규칙을 설명하는 중이다. 행사 진행 현수막을 보니 윷놀이를 담당하는 일꾼들은 이재춘·권세구·이세우·박찬구·김시희 제씨들이고, 멍석은 신한기씨가 준비하도록 돼 있다.

윷놀이를 기다리며 진행자의 설명을 듣고 있는 주민들
 윷놀이를 기다리며 진행자의 설명을 듣고 있는 주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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윷놀이가 끝나면 한 시간에 걸쳐 '민요 디스코'가 펼쳐지고, 장민, 장필국의 <조약돌 사랑> 공연이 이어질 계획이란다. 그 후 다시 한 시간 삼십 분 동안 기원제, 달집 태우기, 풍등 날리기가 이어진다. 오늘 행사의 백미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본부석 옆 천막으로 요기를 하러 다가선다. 과연 삶은 돼지고기와 마늘·고추·된장·소주 등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의성 하면 마늘로 유명한 고장 아닌가. 나는 특히 마늘을 듬뿍 받으면서 남몰래 미소를 머금는다.

작은 마을인데도 '마을역사 자료전시관' 있는 곳

이곳 사촌마을은 정말 대단하다. 작은 마을 단위인데도 폐교된 중학교 2층 건물을 고스란히 재활용해 '사촌문화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지금 운동장에서 풍물을 놀고 있는 사람들도 '사촌문화보존회' 소속이다.

또한 사촌마을에는 우리나라 어느 마을에서도 보기 어려운 '마을자료전시관'이 있다. 소규모 역사관 형태의 사촌마을자료전시관에는 이 마을이 언제 생겼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변해 왔으며, 누가 어떤 저술을 남겼고, 외적과 어떻게 싸웠는지가 빠짐없이 전시돼 있다. 심지어 동영상까지 볼 수 있다. 정월 대보름을 맞아 전통문화 보존 재현행사를 벌일 만한 마을이라는 이야기다.
점곡면 사촌마을에는 단위 마을에서는 유래가 없는 <사촌마을자료전시관>이 건립되어 있다.
 점곡면 사촌마을에는 단위 마을에서는 유래가 없는 <사촌마을자료전시관>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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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이 마을은 서애 류성룡이 출생한 것으로 유명한 선비마을이다. 따라서 정월대보름의 전통행사 재현행사 한마당이 없더라도 이미 많은 답사자를 거느려 왔다. 30여 채의 고옥 중에는 경북도 유형문화재 162호인 만취당(晩翠堂)이 조선 시대의 정취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만취당 옆에 높이 8m로 자라있는 경북도 기념물 107호 향나무가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류성룡의 외할아버지인 김광수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친 영귀정(문화재자료 234호)도 찾을 만하다. 사촌마을 앞을 흐르는 미천(眉川) 바로 건너 절벽 위에 있다. 영귀정 마루에 앉아 뒷창을 열면 미천을 흐르는 강물과 사촌마을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하늘을 떠도는 구름도 벗처럼 가깝다.

마을 바로 서쪽을 감싸며 600년 동안 자라난 가로숲은 천연기념물 405호로 지정돼 그 가치를 뽐내고 있다. 가로숲을 지난 후 북쪽으로 10여 분 올라가면 1000년 금강송을 자랑하는 고운사가 등운산 계곡 속에 고이 숨어 있다. 최치원 유적인 고운사는 전국 거대 사찰 중 보기 드물게 입장료를 받지 않고, 또 주변에 여관과 식당 등이 전혀  없는 청정 도장으로도 이름이 높다.

만취당의 널찍한 마루는 겨울에 누워도 속이 시원하다. 현판 글씨는 한석봉의 작품이다.
 만취당의 널찍한 마루는 겨울에 누워도 속이 시원하다. 현판 글씨는 한석봉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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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날은 전통문화 재현행사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만취당·영귀당·후산정사·사촌마을 가로숲·고운사 최치원 유적과 보물 266호 석조불상 등 사촌마을 일대가 자랑하는 문화재들은 이미 여러 번 둘러보며 감상한 바 있지만, 정월대보름 행사는 미답의 경지이기 때문이다.

2014년 정월대보름은 언제일까. 찾아보니 2월 14일, 금요일이다. 내년 정월 대보름에는 꼭 아침부터 의성 사촌마을을 찾아 정월 대보름 전통행사에 참여해야지 다짐하며 사촌문화공간을 떠나온다.

서애 류서룡의 외할아버지 김광수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영귀정
 서애 류서룡의 외할아버지 김광수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영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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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사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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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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