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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가 안 되어 공주 석장리 박물관에 도착했다. 전민고 학생 12명과 대전대신고 학생 4명이 간단히 서로의 동아리 소개를 하고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두 학교 학생들이 서로의 동아리를 소개하고 있다. 아직 낯설다.
▲ 두 동아리 소개 두 학교 학생들이 서로의 동아리를 소개하고 있다. 아직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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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장리 유적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1964년 봄 미국인 대학원 학생인 알버트 모어다. 석장리 금강가를 거닐다가 주먹도끼를 발견한 것이다. 그 후 연세대학교 사학과 손보기 교수와 함께 답사를 하고 발굴을 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석장리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된 구석기 유적이다. 일본의 역사왜곡과 관련하여 우리가 뿌리없는 민족이라는 엉터리 주장을 반박할 수 있었고, 우리나라 학계에도 처음으로 구석기 고고학의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주먹도끼, 집터 화덕자리, 사람머리카락 등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석장리 박물관의 매력은 역사의 현장성 때문이다. 대전의 선사박물관이나 노은 역사 박물관에 가보면 도시속의 섬 같다. 빽빽이 들어선 건물 속에 나 홀로 작고 외롭게 서 있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석장리 박물관은 50년 전 그대로다. 장소도 그 장소이고 앞에 흐르는 금강도 그대로 흐르고 있다. 박물관 앞을 넓은 마당으로 만들어 잔뒤를 깔고 움집도 복원하였다. 선사시대 사람이 되어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 참 좋았다.

박물관 안에 들어갔다. 학생들에게 가장 관심을 받은 전시물은 주먹도끼도, 구석기 사람 모형도 아니었다. 1964년 발굴 당시 유물을 담았던 '봉투'였다. 60년대 초반 한국에는 비닐을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유물을 담을 만한 봉투가 없어 미군이 사용하던 질기고 튼튼한 종이봉투를 구입해 사용했다고 한다. 이휘연 학생(대신고 1학년)은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말로만 듣던 가난한 시절 보릿고개를 이 봉투를 통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1960년대 초반 한국에는 비닐을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 발굴 당시 사용했던 미군 봉투 1960년대 초반 한국에는 비닐을 만드는 기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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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달려 송산리 무령왕릉으로 갔다. 날이 조금씩 더워지고 학생들은 지쳐갔다. 무령왕은 웅진천도 후 백제 중흥의 역사를 연 왕이었고, 도굴당하지 않은 채 발견된 백제와 고구려의 유일한 왕릉으로 300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 유물 중 타오르는 불꽃 모양을 한 무령왕 왕관 관식은 우리학교(대신고) 교복에 학교 상징 마크로 붙어있다. 그러나 무령왕릉 발견 당시 내부의 모습을 보면 과연 처녀분인가 하는 의심이 든다.

무령왕릉은 1971년에 세상에 알려졌고, 대신고등학교는 1972년에 문을 열었다.
▲ 대전대신고등학교 상징 마크 무령왕릉은 1971년에 세상에 알려졌고, 대신고등학교는 1972년에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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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안은 마치 도굴꾼들이 다녀간 것처럼 부장품들이 매우 산만하게 놓여져 있었다.
▲ 발굴 당시 무령왕릉 내부 모습 무령왕릉 안은 마치 도굴꾼들이 다녀간 것처럼 부장품들이 매우 산만하게 놓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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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릉 안은 마치 도굴꾼들이 다녀간 것처럼 부장품들이 매우 산만하게 놓여져 있었다. 목관(木棺)이 모두 빠개져 있었을 뿐 아니라, 관목(棺木) 조각은 사방으로 빠개져 떨어져 나가 있었다. 항아리를 비롯한 부장품들도 대부분 쓰러져 있었다. 학생들은 지진이 일어나 그런 것 아니냐고 정답을 제시하지만, 지진이 일어났다면 무덤 벽면에도 균열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손상이 없었다.

또, 무령왕릉에 침입자가 있었던 것일까? 무덤 중앙에서 내부를 지키고 있었던 수호신 짐승의 뒷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그 원인을 추가로 왕비의 관을 매장할 때 부주의로 부러뜨린 것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유물도 아니고 능묘를 지킨다고 믿는 신수의 부상을 방치했다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 529년 무령왕비의 관을 합장하면서 무령왕릉은 영구 폐쇄되었다. 그런데 왜 내부가 이렇게 난도질 당한것 처럼 되어 있는 것일까?

이렇듯 1500년 전의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준 무령왕릉은 오히려 더 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 것 같다. 두 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서 출토된 부장품들은 "메이드 인 차이나(벽돌무덤양식)"를 비롯하여 "원산지 재팬(금송목관)" 게다가 "적색의 유리 구슬인 무티사라 구슬"은 타이제로 추정된다. 무령왕릉의 세계는 실로 넓고도 깊었다.

오늘 공주답사는 생각지 않은 2개의 복병을 만나 실패했다. 갑자기 더워지는 날씨 속에서 학생들의 손발과 눈이 풀려버렸다. 두 번째는 무령왕릉 안에 초등학생들이 꽉 차 있어 발디딜 틈이 없었다. 답사 안내를 계획하면서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내 탓이다. 그럼에도 서원희(대신고 1) 학생은 "공주가 고향인데 이런 이야기가 있는 동네라는 걸 처음 알았다"며 웃는 모습에서 위안을 삼는다. 날 좋은 가을날 학생들과 함께 공주 한바퀴를 돌아 우금티까지 가겠다고 다짐해 본다.

점심을 먹고 공산성에 올랐다. 그 옛날의 많은 역사적 사실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금강이 말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날의 역사를 간직한 채  오늘도 금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다.
▲ 공산성에서 바라보는 금강 그날의 역사를 간직한 채 오늘도 금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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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석장리 박물관, #무령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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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세월속에서 문화의 무늬가 되고, 내 주변 어딘가에 저만치 있습니다. 자세히 보고, 오래보면 예쁘고 아름답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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