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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끔 우리가 보노보를 먼저 발견하고 나중에 침팬지를 알았거나 혹은 전혀 몰랐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상상하곤 한다. 인간의 진화에 관한 논의는 폭력성과 전쟁과 남성의 지배보다는 섹슈얼리티, 공감, 배려, 협력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지적 풍토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6쪽 '여는 글'에서)

세계적인 영장류 학자인 프란스 드 발의 <내 안의 유인원>에 나오는 구절이다. 침팬지보다 덩치도 작고 수도 적은 보노보는 평화와 우애를 사랑한다. 특이하게도 그들은 '섹스'를 통해 무리의 결속력와 유대감을 다지기도 한다. 별명이 '난쟁이 침팬지'이지만, '난폭한' 침팬지와는 그 습성이나 생태가 많이 다른 유인원이다.

이 책의 제목에 있는 '보노보'가 바로 이 '보노보'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보노보가 은행 이름으로 들어간 이유가 뭘까. 혹시 이 책은 '돈' 대신 '보노보'로 금융 활동을 하는 은행에 관한 책인가. 유명한 영장류학자인 프란스 드 발의 글이 비중 있게 실려 있으니 책의 주인공이 유인원이라도 되나.

보노보 은행은 사람(People) · 환경(Planet) · 이익(Profit)의 '3P'를 추구한다. 돈도 벌고 세상도 구하는 금융이다. 물론 사람이 우선이다. 돈 나고 사람 났다고 하는 침팬지 은행과 달리 사람 나고 돈 났다는 단순한 철학에 두 발을 단단히 딛고 있다. 보노보 은행은 돈을 벌지만,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은행 문을 열지는 않는다. 침팬지 은행이 팽개친 '사회 지향성'을 보노보 은행은 끌어안는다. 기존 금융 시스템의 바깥이 아니라 그 안에서 금융다움을 실현한다. 여느 금융기관과 마찬가지로 금융법의 규제를 따르면서도 인간 존엄성과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면서 활동한다. (14쪽)

불량한 거대 은행에 대한 불매운동, '계좌 옮기기 운동'

저자들에 따르면, 이 책의 출발점은 미국발 금융 위기로 세계가 휘청거린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람들은 당시 탐욕과 부패로 얼룩진 기존 제도 금융권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즈음 미국 인터넷 신문 <허핑턴포스트>의 아리아라 허핑턴이 '계좌 옮기기' 운동을 제안하는 칼럼 한 편을 인터넷에 올린다. 불량 회사의 불량 제품을 사지 않듯 불량한 거대 은행에 대한 불매운동을 하자는 취지의 글이었다.

허핑턴이 제안한 계좌 옮기기 운동은 2011년 9월 월가 점령 운동과 더불어 거대한 시민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1월 5일을 '계좌 바꾸는 날(Bank Transfer Day)'로 정하는 등 2012년 말까지 미국인 1천만여 명이 월가의 공룡 은행과 거래를 끊었다고 한다. 저자들은 이를, 평범한 소비자가 생태 위기에 대한 각성에서 윤리적 소비를 하는 '소비자 시민'으로 거듭났듯, 금융 위기 속에서 각성한 '금융 시민'이 태동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세계는 그렇게 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는, 저자들의 표현을 빌리면, '멀뚱했다.' 저자들은 우리나라 국민이 유럽 국민처럼 나쁜 금융에 분노하고 실망하면서도 왜 그들과 달리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이 책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출발했다.

보노보 은행으로 빗대어지는 새로운 사회적 금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돈과 금융에 대한 우리 자신의 시각을 다시금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들은 돈이 악마의 금전일 수도 있지만, 잠재력을 열어주는 '가능성의 씨앗'이거나 인간 존엄을 위한 '해방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돈이 '나쁜 주인'이지만 동시에 '좋은 하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오는 맥락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저자들은 금융 자체를 악마화할 수 없다면 돈에 대해 다른 생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이, 돈으로 무한히 돈을 벌 수 있다는, 돈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금융 위기를 불렀다고 주장하는 배경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에서는 여수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제도권 안의 사회적 금융을 영미와 유럽권 국가에 있는 7개의 은행을 중심으로 살피고 있다. 2부는 다양한 사회적 금융의 혁신 사례를 펀드와 캐피털, 크라우드 펀딩과 사회적 금융을 위한 국제 네트워크 기구 등을 중심으로 훑고 있다. 이중 기존 금융 시스템 내에서도 보노보 은행이 얼마든지 경쟁력이 있음을 웅변하는 네덜란드의 트리오도스 은행과, 무이자 은행이라는 혁신적인 실험을 이어가는 스웨덴의 JAK 협동조합은행을 좀더 알아보자.

세계 금융 위기 때도 꾸준히 성장한 트리오도스 은행

트리오도스 은행의 '트리오도스(Triodos)'는 '3'이라는 뜻의 'tri'와 '길'을 뜻하는 'hodos'가 합쳐진 그리스어로, "세 개의 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그 세 개의 길은 사람, 환경, 이윤이라는 지속 가능 경영의 3대 축을 나타낸다. 2011년 말 기준, 트리오도스 은행의 자산은 43억 유로로 유럽의 보노보 은행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트리오도스 은행은 협동조합이 아닌 일반 기업 형태의 사회적 금융기관 중에서도 세계 최대라고 한다.

2002년부터 2011년까지의 자산과 관리 자산 추이, 순수익 등을 정리한 표(47쪽)를 보면, 세계 금융 위기가 불어 닥친 2008~2009년에도 꾸준히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트리오도스는 1980년에 54만 유로(약 8억 원)의 자본금으로 설립된 네덜란드의 작은 은행이었다. 그래서 이들이 일반 상업은행과 경쟁이 가능한 은행으로 성장하면서 놀라운 '성공 신화'를 쓰고 있다는 저자들의 분석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스웨덴의 JAK 협동조합은행은, '이자'에 대한 사람들의 상식을 깨뜨린 대표적인 사회적 금융기관이다. 스웨덴 JAK 협동조합은행의 뿌리는 1930년대에 시작된 덴마크 JAK 협동종합이었다. 저자들의 조사 분석에 따르면, 이자 기반 금융의 대안으로 만들어진 덴마크 JAK는 그 혁신성 때문에 정부 당국과 언론 등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아 1930년대 말에 1차 파산하고, 자체의 유동성 문제 등으로 1970년대 초에 일반 은행에 합병되면서 맥이 끊기고 만다(1973년).

그즈음 무이자 조건의 대출을 필요로 하는 조합원을 위해 모두가 무이자로 예금하는 호혜의 금융을 기치로 스웨덴 JAK가 출현했다(1970년). 저자들은 스웨덴 JAK의 무이자 금융 실험에 담긴 철학을 다섯 가지로 요약한다. ▲ 이자는 돈 그 자체의 사용 대가로서 재화나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당하지 못하며, 비윤리적이다. ▲ 이자는 물가 상승, 실업과 환경 파괴를 야기한다. ▲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에 이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부유한 사람들에게로 부를 이전시켜 소득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 이자는 장기적인 관점보다 단기적인 관점을 조장한다. ▲ 이자는 지속 가능한 경제를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면 스웨덴 JAK의 무이자 금융은 대체 어떻게 이루어질까. 예금과 대출에 이자가 붙지 않는데 은행의 기본 업무에 필요한 경비나 비용은 어떻게 충당하나.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JAK만의 독특한 개념인 '저축 포인트'(saving point)를 알아야 한다. 저축 포인트는 조합원이 계좌에 돈을 입금하면 이자 대신 받게 되는 것으로, 예금액이 많거나 예치 기간이 길수록 많이 적립된다. 포인트가 많을수록 대출 가능 금액도 커진다. 그래서 저자들은 저축 포인트를 대출과 예금 사이의 균형, 곧 유동성을 관리하는 핵심적인 장치라고 분석한다. 은행 업무에 드는 기본 경비나 비용은 조합원들이 내는 연회비로 충당한다고 한다.

돈의 선한 본질 되살려 쓰자는 게 사회적 기업가 정신

돈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하지만 침팬지 은행으로 대변되는 주류 금융은 돈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당연한 상식처럼 널리 퍼뜨렸다. 그런데 그 폐해는 너무나 크고 깊다. 분명 돈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악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돈은 우리에게 늘 찝찝한 무언가가 되고 있다. 저자들의 분석처럼, 돈만 추구하다가 헝클어진 세상을 보면서도 돈이 돈을 좇는 완고한 흐름은 바뀔 줄 몰랐고, 사회 정의와 돈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인 것처럼 취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돈의 선한 본질을 되살려 쓰자는 게 사회적 기업가 정신이라고 말한다. 나아가 이 사회적 기업가 정신으로 무장한 뒤, 사회적 경제를 힘들게 하는 사람과 조직과 돈의 어긋남을 해소하는 것, 즉 사회적 금융을 뿌리내리는 일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금융을 침팬지 은행의 약탈적 금융에 빗대 '착한 금융'으로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닫는 글'에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우화를 사회적 금융에 빗대는 대목이 있다. 여기를 보면, 어리석을 정도로 우직한 '우공'은 보노보 은행, 산이 옮겨질까 전전긍긍하는 산신령은 침팬지 은행이 된다. 우공을 보며 '잘될 턱이 없다'고 혀를 차는 친구는 금융 이용자에서 개종한 금융 시민이다. 끝까지 산을 지키려는 산신령 대신 우공을 편드는 옥황상제는 금융 시민의 민의(民意)를 상징한다. 그래서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적 금융은 산이 물이고, 물이 산인 금융이다. 우공의 사회적 기업가 정신으로 사회적 경제를 이롭게 하는 '우공약수(愚公若水)'의 금융이고, 물처럼 다투지 않으면서도 태산처럼 미동도 하지 않을 것 같은 금융 질서를 바로잡는 '상선이산(上善移山)'의 금융이다. 경제 민주화를 향한 금융의 두리반이고 연대의 혁명이며 산과 물의 노래다. (276쪽 '닫는 글'에서)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보노보 은행> (이종수 · 유병선 외 지음 | 부키 | 2013. 7. 8 | 287쪽 | 1만 4800원)



보노보 혁명 - 제4섹터, 사회적 기업가의 아름다운 반란

유병선 지음, 부키(2007)


태그:#<보노보 은행>, #사회적 금융, #침팬지 은행, #사회적 기업, #착한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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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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