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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영주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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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마음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힐링의 시간이 되기도 하고, 여태껏 맛보거나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 신선한 자극을 받을 수 있는 삶의 어떤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로 마음이 몹시 아파 오거나 또는 자연의 미묘한 변화에도 가슴 떨릴 때면 무조건 하루 코스라도 여행을 떠나라고 말하고 싶다.

만남과 소통의 미학을 빚고 있는 듯한 형상 때문일까. 이쪽과 저쪽을 이어 주는 다리는 늘 내게 감동이다. 그 가운데서도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 마을과 뭍을 잇는 다리는 내 마음을 더욱더 설레게 하는데, 이것이 지난 8월 10일에 우리가 무섬마을(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중요민속문화재 제278호)을 찾은 이유이기도 하다.

집주인 신분 따라 모양 달리한 사랑채 기둥

 해우당고택(경북민속문화재 제92호). 벼슬한 사람이 거처하는 집의 사랑채에는 원기둥을 세우고, 벼슬 못한 사람은 각진 기둥을 세웠다.
 해우당고택(경북민속문화재 제92호). 벼슬한 사람이 거처하는 집의 사랑채에는 원기둥을 세우고, 벼슬 못한 사람은 각진 기둥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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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40분에 친구와 함께 창원을 출발하여 영주 무섬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1시께. 무섬마을은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을 휘감아 도는 전형적인 물도리 마을로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중기 17세기 중반에 입향 시조인 박수와 김대가 들어와 자리 잡은 이래 반남(潘南) 박씨와 선성(宣城) 김씨의 집성촌으로 남아 있는 전통마을이다.  

우리는 무섬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인 해우당고택(경북민속문화재 제92호)으로 먼저 들어섰다. 김대(金臺)의 손자 영각이 1830년에 지었다가 고종 때 의금부 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 선생이 1879년(고종 16년)에 중수한 집으로 경북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ㅁ자형 구조를 보이고 있다.

 해우당고택 큰사랑에 걸려 있는 편액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해우당고택 큰사랑에 걸려 있는 편액 글씨는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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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로 통하는 앞면 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큰사랑과 아랫사랑을 두었는데, 오른쪽 큰사랑은 지반을 높여 원기둥에 난간을 두르고 누마루를 꾸민 게 인상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안채와 달리 밖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랑채 기둥이 그 당시 집주인의 신분을 말해주었다는 이야기다.

같은 양반이라도 벼슬한 사람이 거처하는 집의 사랑채에는 원기둥을 세우고, 벼슬을 못한 사람은 각진 기둥을 세웠다 한다. 게다가 해우당고택이 우리 관심을 끌었던 또 다른 매력은 사랑채에 걸려 있는 편액이었는데,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직접 쓴 글씨라고 한다.

그저 그렇게 서 있어 주기만 해도 좋은 외나무다리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힌 무섬외나무다리.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힌 무섬외나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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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우당고택에서 나와 우리는 무섬마을의 명물로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포함된 외나무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고운 모래톱에서부터 시작되는 외나무다리를 보자마자 내 가슴은 절로 콩닥거렸다.

마을을 감아 도는 물길 탓에 오랜 세월 마을과 뭍을 이어 주던 유일한 길이 바로 이 외나무다리였다. 300여 년 동안 무섬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했던 다리. 그들의 온갖 사연들을 모래강으로 흘려보내며 묵묵히 그들을 지켜봐 왔던 다리. 하지만, 그저 그렇게 서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위안이 되었던 다리. 그래서 다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던 삶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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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보를 메고 학교 가던 아이, 꽃가마 타고 시집오던 수줍은 새색씨, 첫아이 낳고 싱글벙글 행복해 하던 젊은 아버지, 그리고 머나먼 황천길을 떠나던 상여도 어김없이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 벼슬·남녀·빈부의 차별도 있을 수 없었으니 어떻게 보면 경계가 무너져 버린 길이라 할 수 있으리라.

30년 전 콘크리트 다리인 수도교가 마을 입구에 세워지면서 한동안 사라졌다가 지난 2005년 마을의 옛 모습을 복원하면서 이제 우리들 곁으로 다시 돌아온 외나무다리. 시간이 옛 시절로 멈춰 버린 듯한 정겨운 다리를 우리는 조심조심 건너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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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비가 좁아 뛰지도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외나무다리의 리듬에 맞춰 느린 걸음으로 가야 하는 길. 맞은편에서 사람이 가까이 다가온다 싶으면 비껴 설 수 있게 배려해 놓은 공간으로 잠시 옮겨 가 내 차례를 기다리기도 한다.

다리를 건너자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우린 조그만 정자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무섬외나무다리는 비가 와서 물이 많아지면 다리가 쓸려 가기 때문에 설치와 철거를 되풀이한다는 말이 문득 떠올라 좀은 불안하기도 했지만 마음은 즐거웠다. 소낙비가 그쳐 서둘러 다리를 건넜다. 한 번 왔던 길을 도로 돌아가는 경우에는 처음에 느꼈던 낯설음은 엷어져 가고 어느새 그 길에 익숙해져 있음을 이내 알아차릴 수 있다.

외나무다리의 설렘을 뒤로하고 이곳 마을 ㅁ자형 가옥 가운데 건립 연대가 가장 오래된 만죽재고택(경북민속문화재 제93호) 안으로 들어갔다. 무섬마을 입향 시조인 박수 선생이 1666년(현종 7년)에 이곳으로 들어와 최초로 지은 집으로 8대손 승훈이 중수하면서 당호를 만죽재라 하였다. 이 마을의 옛 가옥 대부분이 대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사랑이 형성되고 있는데 반해, 이 집은 왼쪽에 독립된 사랑을 두고 있는 게 특이했다.

 만죽재고택(경북민속문화재 제93호). 무섬마을 ㅁ자형 가옥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 마을 대부분 집과 달리 왼쪽에 독립된 사랑을 두고 있다.
 만죽재고택(경북민속문화재 제93호). 무섬마을 ㅁ자형 가옥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 마을 대부분 집과 달리 왼쪽에 독립된 사랑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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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규 가옥(경북문화재자료 제362호)으로 까치구멍집이다. 까치구멍집은 지붕마루 양쪽에 낸 둥근 구멍이 까치 둥지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김정규 가옥(경북문화재자료 제362호)으로 까치구멍집이다. 까치구멍집은 지붕마루 양쪽에 낸 둥근 구멍이 까치 둥지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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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옛 정취에 흠뻑 젖었다. 이곳에는 태백산을 중심으로 경상도 북부지역에 분포해있던 까치구멍집도 볼 수 있다. 공기의 유통을 위해 지붕마루 양쪽에 낸 둥근 구멍이 까치 둥지와 흡사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하는데, 그 이름이 재미있어 기억에 오래 남는다.

여행길에서 맛보는 그 지역의 별미는 우리들에게 적잖은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그렇다면, 영주의 별미는 무엇일까? 조밥을 곁들인 유명한 메밀묵이다. 칠년 전 지인들과 소수서원 가는 길에 메밀묵밥을 처음 먹은 적이 있다. 그때 식당은 소박했지만 그 집 묵밥의 메밀향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영주의 별미, 메밀묵밥.
 영주의 별미, 메밀묵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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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메밀묵밥을 먹기 위해 순흥면 읍내리에 있는 음식점으로 달려갔다. 맛집으로 알려져 있어서 그런지 손님들이 많았다. 나는 싱거운 듯하면서도 구수한 맛이 나는 메밀묵밥의 묘한 매력에 다시 빠져들었다.


태그:#외나무다리, #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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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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