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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입구에 다다르기까지 2시간은 누구나 겪는 '당연한 일'이다. 단단히 마음 먹고 와야 한다.
▲ 여기부터 두 시간 간송미술관 입구에 다다르기까지 2시간은 누구나 겪는 '당연한 일'이다. 단단히 마음 먹고 와야 한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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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애바악~ 대바악~ 대박~"

지난 23일 오전 10시 30분, 서울 성북구 성북동 간송미술관(관장 전영우)을 빠져나온 여고생 3명은 이렇게 탄성을 터트렸다. 전시회가 대단해서? 부인할 수 없다. 김홍도, 신윤복, 이명기.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조선 후기 화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평일 아침 수천의 사람들이 만든 '긴 줄'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장관이었다. 기자 역시 미술관 개장 시간인 오전 10시에 맞춰 30분 전에 도착했지만 소용없었다. 긴 줄은 이미 간송미술관의 너른 마당을 지나 성북초등학교 언덕길을 거쳐 사거리 버스정류장 너머까지 이어졌다. 정류장 한편엔 A4 용지로 '여기부터 전시장까지 2시간 걸린다'는 알림 문구만 사람들을 맞았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부터 관람객을 실어 나른 버스는 연신 만원이었다. 긴 줄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1년에 두 번하는 전시가 만든 '희소성'

'기다림'에 대한 여유를 배우는 시간이다.
▲ 끝없이 이어진 줄 '기다림'에 대한 여유를 배우는 시간이다.
ⓒ 최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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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입구엔 녹이 슨 '미술관안내문'이 있다. 그곳엔 아래와 같은 문구가 적혀 있다.

"매년 전시는 5월 중순부터 15일간입니다. 가을 전시는 10월 13일부터 15일간입니다. 그 외 기간은 관계자 외 출입금지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다. 간송미술관은 1년에 딱 두 번 전시를 연다. 더불어 47년 역사를 지닌 한국 최초 사립 미술관이다. 이러한 희소성이 대중을 끌어 모았다. 체험학습을 온 광명 운산고등학교의 서민경(17)양 역시 "그림도 좋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상상을 초월한 긴 줄이었다"고 밝혔다.

"와~ 털이 살아있네"

단원 김홍도의 <모구양자>(간송미술관 도록을 재촬영한 것입니다).
 단원 김홍도의 <모구양자>(간송미술관 도록을 재촬영한 것입니다).
하지만 희소성만으론 대중의 시선을 잡기엔 부족하다. 소문난 잔치엔 항상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정확히 2시간 14분을 기다린 끝에 1층 전시실에 들어섰다. 전시장엔 이미 인파가 한가득 있었다.

"밀착하세요. 이동하세요."

관람객의 걸음을 재촉하는 안내원의 목소리가 50평 남짓한 전시장에 울려 퍼졌다. 음미하며 감상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걸음은 계속 느려졌다. 몇몇 작품 앞에서 그러했는데, 그 앞엔 여지없이 단원 김홍도(1745~1806)와 혜원 신윤복(1758~?)의 그림이 있었다.

특히 금강산의 비경을 담은 단원의 '구룡연'과 얼굴만한 크기의 선도복숭아를 훔쳐 달아나는 모습의 '낭원투도', 세밀한 필치로 어미 개의 모정을 보여준 '모구양자' 등이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용인의 한 초등학교에서 견학 온 김아름(10)양의 말이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단원의 작품 '모구양자'를 보고 있는데 뒤쪽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며 "와~ 털이 살아 있네"를 연신 외쳐댔다. '진경시대'를 이끈 조선 후기 김홍도의 사실주의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었다.

전시의 백미는 혜원 신윤복이었다. 14점의 대표작이 공개된 이번 전시에서 혜원의 그림은 2층 전시 말미에 집중적으로 배치됐다. 섬세한 혜원 신윤복의 선과 색이 기다림에 지쳐 버린 관객을 압도했다.

특히 국사 교과서의 대표 그림으로 유명한 '단오풍경'과 야밤중 골목길 담에서 정을 나누는 '월야밀회', 선명한 붉은색이 눈에 띄는 기생의 칼춤 '쌍검대무'가 눈길을 끌었다. 서울 화곡동에서 온 최정남(28)씨는 "뒤에 오는 사람들을 생각해 빨리 나가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혜원의 그림이 마치 군입대할 때 마주잡은 여자친구의 손길 같았다"고 말했다.

"체할 것 같다. 하지만 이해한다"

간송 미술관은 그 자체로 선생의 정신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 간송 전형필 선생 간송 미술관은 그 자체로 선생의 정신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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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의 85번째 가을 전시회 주제는 '진경시대 화원전'이다. 조선 시대 후기 사실주의 화풍을 이끈 진경시대 화원 화가 21인의 84개 작품을 소개한다.

전시된 모든 그림 한 점 한 점이 대중의 눈을 사로잡고도 남을 작품이었다. 실제로 지난 13일부터 시작된 전시회는 하루 평균 5000여 명 이상의 관람객이 몰리고 있다. 주말엔 1만여 명의 관람객이 찾았다.

서울 숙명여대에서 온 대학생 김지연(24)씨도 말을 보탰다.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의 노력으로 이렇게 좋은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해요. 실제로 어디에서 혜원과 단원의 작품을 공짜로 볼 수 있겠어요?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요. 1년에 두 번만 전시를 하다 보니, 밀려드는 인파에 제대로 감상도 못하고 쫓기듯 봤어요. 무슨 군대 훈련도 아니고 좋은 음식 앞에 놓고 밀어 넣는 기분이에요. 체할 것 같아요."

하지만 간송미술관의 속사정을 알고 나면 기다림의 불편함은 다소 누그러진다. 간송미술관 개관이 1962년이다. 작품을 담아 놓은 낡은 진열장, 색이 바란 하얀 건물에서 드러나듯 큰 변화 없이 옛 모습 그대로 유지돼 왔다. 간송 선생의 바람대로 일반 관객을 위한 무료관람도 계속되고 있다. 간송미술관 자체가 하나의 전통과 역사로 이어지는 것이다.

선생의 정신과 미술관의 전통을 엿볼 수 있는 기회는 1년에 두 번뿐이다. 봄, 가을 전시마다 주제의 차이도 있다. 털이 살아있는 단원의 작품과 선과 색이 분명한 혜원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이번 일요일(10월 27일)까지다. 이 가을, "대박" 소리 절로나는 간송미술관 <진경시대 화원전>을 감상하시길 바란다.


태그:#간송미술관, #혜원 신윤복, #단원 김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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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팀 취재기자. 오늘도 애국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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