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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 블랙푸드 열풍이 거세다. 블랙푸드는 검은 색, 또는 검푸른 색을 갖고 있는 식품을 말한다. 대표적으로는 검은콩·검은깨·검은쌀부터 가지·자두·포도·오디·블루베리·김·미역·다시마·목이버섯·수박씨·오징어먹물·캐비아 등이 있다. 이러한 식품에는 항산화·항암·항궤양의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안토시아닌(Anthocyanin)'이라는 수용성 색소가 들어 있어 짙고 어두운색을 띠게 된다고 한다.

안토시아닌은 노화와 여러 질병을 일으키는 체내의 활성산소를 효과적으로 중화시킬 뿐만 아니라 심장질병, 뇌졸중, 성인병, 암 예방에도 좋은 성분으로 알려져 있다. 블랙 푸드 식품을 활용한 예로는 검은콩으로 만든 흑두부 또는 검은 콩과 검은깨로 만든 음료가 유명하고, 이 밖에도 최근에는 오징어먹물 스파게티 또는 과자, 숯가루를 넣은 냉면, 검은깨 돈가스 등이 개발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의 경험상 각종 음식들을 색으로만 본다면 가장 '맛없어 보이는' 색이 검정색이다. 새까만 색의 음식은 그다지 구미를 당기지 않는다. 필자도 집에서 검정콩이나 검정 현미쌀을 섞어 지은 밥을 먹고 있다. 머리숱이 적어지는 것을 느끼던 차에 머리가 덜 빠진다는 아내의 주장에 억지로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50년을 흰쌀밥만 먹다가 색깔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그 거친 맛에 사실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블랙푸드는 거의 정제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음식으로 몸에는 좋지만 먹기 힘들다는 것이 일반의 인식이다. 그럼에도 검정콩, 검정깨, 검정쌀 같은 검정색 식품이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했다.

며칠 전에 애견관련 사업을 하는 큰 딸아이를 따라 서오능 애견훈련소에 다녀왔다. 그 때 훈련소 바로 옆에 흑두부 전문 식당이 새로 개업했다는 안내문을 보았다. 그 흑두부가 바로 검정콩으로 만든 것이라고 들었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이야기했더니 한번 가보자고 한다. 순간, 아차 싶었다. 집에서 먹기도 고역인데 일부러 찾아가서 사 먹어야 되나. 그 때 큰 딸아이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애견센터 사장님들과 가보았는데 거칠지도 않고 맛있다며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한다. 

드디어, 지난 일요일 오후 우리 가족은 저녁을 먹으러 그 식당으로 갔다. 주차장도 넓고 둥근 보름달 모양을 본뜬 간판이 그런대로 운치가 있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음식을 주문했다. 아이들을 생각해서 두부탕수육이 포함된 코스 메뉴였다. 처음에 콩죽이 나왔는데 약간 거무스레했지만 고소하고 맛있다. 우리 식구 다섯이 모두 죽 그릇을 싹싹 비웠다. 이어서 셀러드가 나왔다. 야채 속에 든 콩이 검은콩으로 만든 청국장이란다. 먹을 만했다.

셀러드를 먹고 나니 부드러운 돼지고기 수육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검은 두부가 삶은 배춧잎을 비롯한 각종 야채와 더불어 큰 접시에 담겨져 나온다. 이제 본격적으로 두부 요리가 시작되었고, 이로서 그동안 블랙푸드에 대한 내 걱정이 완전히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나는 대만족이었고 반신반의하던 아이들도 잘 먹었다.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두부 탕수육이었다. 흑두부와 검은 콩으로 만든 콩고기가 주 재료다. 아이 셋이 연방 감탄사를 터뜨리며 워낙 바쁘게 젓가락질을 해대는 통에 나는 몇 점 먹지 못했다. 마지막 코스는 두부찌개였다.

우리 가족이 탕수육을 먹을 무렵, 3~40명의 손님들이 빠져나간 후 한가해지자 이 집의 주인이 와서 들여다보더니 다섯 명 한 가족이 식사하는 모습이 좋아 보인다면서 찌개 외에 별도로 청국장을 서비스로 내 오셨다. 각종 야채와 새우가 들어간 찌개도 좋았지만, 청국장이 맛있다. 청국장 본 재료에 팽이버섯과 쑥갓만 넣어 담백하고 구수해서 청국장 맛에 낯선 아이들도 잘 먹었다.

40대 후반의 상당히 미인인 여사장님은 검정콩을 비롯한 블랙푸드에 조예가 상당했다. 맛의 고장인 전남 광주와 화순지역에서 친정 식구들이 몇 군데 흑두부 전문점을 운영한다고 했다. 본인은 본래 플로리스트로 활동하는 화훼작가라고 했다. 예식장에서 꽃 장식 사업을 하다가 여건이 바뀌어 잠시 접었는데 마침 사업 영역을 넓힐 생각을 갖고 있는 친정 언니의 권유로 개업하게 되었다고 한다. 개업 후 성과로 보아 향후 사업성에 대해서는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앞으로 흑두부 뿐만 아니라 통칭 불랙푸드로 일컬어지는 식품을 체계적으로 취급해보고 싶다고 했다. 가령 주 재료외에 가지와 미역을 반찬으로 조리한다든지, 오디나 블루베리 쥬스를 개발하여 후식으로 내놓는 것을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여사장은 프랜치 패러독스(French paradox)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프랜치 패러독스는, 유럽에서 1인당 가장 많은 양의 고기를 소비하는 프랑스에서 오히려 성인병 발병률이 낮게 나타났다. 연구 결과 프랑스 사람들이 식사 때마다 즐겨 마시는 적포도주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론을 말한다. 프랑스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적포도주가 바로 대표적인 블랙푸드 아니냐는 여주인의 그 혜안이 탁월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주변을 돌아보았다. 통로를 따라 늘어선 크고 작은 장독대가 풍부하게 준비된 식재료를 자랑하고 추운 날씨에 대기 손님들을 생각해서 장작 난로를 지핀 비닐하우스 휴게실이 아늑했다. 휴게실 천정에도 검은콩으로 만든 메주 수십덩이가 매달려 있다. 화장실에 설치된 손 씻는 그릇, 벽걸이 화분하나를 보아도 플로리스트인 이집 주인의 안목이 드러난다.

오늘은 그간의 선입견을 버리고 플랙푸드에 대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된 날이다. 기분 좋은 포만감을 안고 식당 앞 너른 주차 마당으로 나오니 영하의 싸늘한 날씨 속에 중천에 덩실 떠 오른 초승달이 반긴다. 자세히 보니 달은 하나가 아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 속의 그것처럼 두 개의 달이 떠 있다. 앞 산 위에는 초승 달 하나, 음식점 마당을 밝히는 보름달 하나.


태그:#흑두부, #블랙푸드, #검은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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