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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흔적이 남아있는 고산정을 지나며

고산정
 고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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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종택을 보고 낙동강을 따라 도산서원으로 내려가면 좋으련만 길이 없어 온 길을 돌아가야 한다. 길은 고산정(孤山亭)을 지나 다시 35번 지방도로 이어진다. 그런데 중간에 있는 고산정이 퇴계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퇴계가 청량산을 오며가며 이곳 고산에서 놀고 풍류를 즐겼기 때문이다.

이곳 고산에 정자를 지은 사람은 퇴계의 제자인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 1530-1604)다. 그는 1564년 가을 고산 아래 일동에 정자를 짓고 일동정사(日洞精舍)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므로 고산정은 일동정사의 다른 이름이다. 금난수의 문집인 <성재집(惺齋集)>에 고산정을 노래한 시 '고산정 제영(孤山亭題詠)'이 나오는데, 그곳에 이황, 조목, 김성일, 유성룡, 정구 등 영남학맥의 거두들이 쓴 시가 들어 있다.

낙동강변의 고산정
 낙동강변의 고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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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의 시 '고산'에 따르면, 고산정이 깎아지른 절벽 앞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절벽 아래로는 깨끗한 물이 흐른다. 그리고 고산정의 주인은 속세를 떠나 자연과 함께 사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주인의 심성 때문에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그 고산정을 퇴계도 찾은 것이다.  

신령스런 도끼로 굳은 바위 깨뜨린 게 어느 해지?   何年神斧破堅頑
천 길이나 되는 절벽 흰 물굽이 위로 솟아있네.       壁立千尋跨玉灣
속세를 떠난 사람 주인 되지 않았던들                   不有幽人來作主
고산이라 이 절경을 뉘라서 찾을 손가?                 孤山孤絶更誰攀

그런데 고산정이 강 건너 절벽 아래 있어 그곳으로 들어가려면 배를 타야 한다. 나는 정말 강 건너 불구경하듯 멀리서 고산정을 살펴본다. 3m 정도 축대를 쌓아 대지를 조성한 후, 그 위에 기단을 쌓아 집터를 만들었다.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하고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집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가운데 칸 위 벽에 고산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건지산에서 낙동강을 굽어보는 퇴계 묘소

퇴계 묘소
 퇴계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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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정에서 도산서원으로 가는 길에 나는 잠깐 퇴계 묘소에 들렀다. 퇴계 묘소는 토계리 하계 마을 뒷산에 있다. 마을에서 170m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다. 산을 오르면서 보니 퇴계선생의 며느리 봉화김씨의 묘가 있다. 여기서 다시 100여m를 올라가니 퇴계 묘소가 나온다. 퇴계 묘소에는 문인석, 촛대석, 동자석, 상석, 묘표가 제대로 갖춰져 있다.

그 중에 묘표가 특이하다. 묘표와 묘갈을 혼합한 형식으로, 가운데 '퇴도만은이공지묘(退陶晩隱李公之墓)'라고 썼다. 도산으로 느지막하게 은퇴한 이공의 묘라는 뜻이다. 그리고 전면 왼쪽에서부터 '퇴계선생묘갈명(退溪先生墓碣銘)'이 시작된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쓴 것으로, 앞부분에 퇴계 자신이 쓴 비명(碑銘)을 인용하고, 퇴계의 삶과 정치역정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퇴계 묘표
 퇴계 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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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퇴계는 자신을 지나칠 정도로 아주 낮춰 표현하고 있다. 어리석고 병든 몸으로 학문에 뜻을 두어 벼슬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능력 부재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늦게나마 자연으로 돌아가 삶의 즐거움을 누린다는 내용이다.

"태어나서는 크게 어리석었고 장성하여서는 병이 많았네. 중년에는 어쩌다가 학문을 즐기게 됐고 말년에는 어쩌다 벼슬을 하게 되었네, 학문은 배울수록 오히려 멀어지고 벼슬은 마다해도 계속 내려지네. 나아가기가 어려워 물러나 은거하기로 뜻을 굳혔네. 나라의 은혜 생각하면 심히 부끄러우나 진실로 성현의 말씀이 두려웠네. […] 내세를 어찌 알랴 지금도 모르는데. 근심 속에 낙이 있고, 낙 가운데 근심 있네! 자연으로 돌아가니, 더 바랄 게 무엇이랴?"

(生而大癡 壯而多疾 中何嗜學 晩何叨爵 學求猶邈 爵辭愈嬰 進行之跲 退藏之貞 深慙國恩 亶畏聖言 […] 寧知來世 不獲今兮 憂中有樂 樂中有憂 乘化歸盡 復何求兮)

뒤에서 바라 본 퇴계 묘소: 앞쪽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뒤에서 바라 본 퇴계 묘소: 앞쪽으로 낙동강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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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표의 덮개돌인 옥개석은 꽃문양이 들어간 삼각형 모양이다. 옥개석의 조각이 상당히 정교한 편이다. 이런 유형의 옥개석은 처음 본다. 비신과 옥개석이 일체형으로 되어 있는 조선 초기 비석의 변형 형태로 보인다, 그러나 비석이 전체적으로 조화가 안 맞는다. 지대석, 비신, 옥개석이 각각 다른 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퇴계는 이곳 토계천 북쪽 건지산 자락에 묻혀 낙동강을 굽어보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태어난 곳, 살던 곳,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 있다. 태어난 곳은 태실이라 부르고, 살던 곳은 종택이라 부르며, 가르치던 곳은 도산서당이라 부른다. 이제 나는 도산서당으로 간다.  

퇴계의 손때가 묻은 도산서당

도산서당
 도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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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당은 도산면 토계리 680번지에 있다. 옛날 같으면 퇴계묘소에서 강을 따라 걸어갔겠지만, 지금은 퇴계 종택을 지나 좌회전해 고개를 넘은 다음 내려가야 한다. 도산서당은 낙동강이 바라보이는 천연대(天淵臺)와 운영대(雲影臺) 사이 아늑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천연대는 낙동강의 하늘과 못을 볼 수 있는 곳을 말하고, 운영대는 하늘의 구름이 못에 드리우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을 말한다.

퇴계는 50세 때인 1550년 2월 낙향해서 토계천 서쪽에 거처를 정하고 후학을 가르친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계상서당이다. 서당이 열렸다는 소릴 듣고 인근에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또 이곳에는 농암 이현보와 율곡 이이 같은 학자들도 찾아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젊은이들이 몰려와 서당이 비좁게 되었다. 이에 퇴계는 새로운 강학공간 마련이 절실해졌다. 퇴계는 먼저 청량산을 생각했다. 산과 물이 젊은이의 호연지기를 키워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산서당
 도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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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곳까지의 거리가 멀고, 자신의 몸 또한 많이 쇠약해져 계상서당에서 3㎞쯤 떨어진 도산에 새로운 서당 자릴 마련한다. 그리고 1557년부터 1561년까지 도산서당과 농운정사(隴雲精舍)를 지어 더 많은 제자들을 육성하게 되었다. 도산이라는 이름은 옹기 굽는 가마가 이곳에 있어 생겨났다. 농운정사는 학생들이 기거하는 기숙사다. 여기서 농운은 '고개 위에 걸려있는 구름'을 말한다.
   
도산서당은 방과 마루로 이루어진 세 칸짜리 건물이다. 방은 완락재(玩樂齋)라 이름 짓고,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이름 지었다. 완락재는 주자의 '명당실기(明堂實記)'에 나오는 '도(道)와 리(理)를 즐기고 완상하며 죽을 때까지 싫어하지 않는다'는 구절에서 따왔다. 암서헌은 '바위에 깃들인 집'이라는 뜻으로, 역시 주자의 '운곡시(雲谷詩)'에서 따왔다고 한다.

농운정사
 농운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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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운정사는 공자(工字)형 구조를 가진 8칸짜리 건물이다. 이처럼 공자형으로 만든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곳이 숙식하며 공부(工夫)하는 공간이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두 가지 공부를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공부라는 것이 심신의 수련이기 때문이다. 농운정사는 동서로 길게 방이 있고, 양쪽 앞뒤로 마루방을 설치한 형태다. 그리고 방앞 쪽마루 오른편에 농운정사라는 편액을 걸었다.

농운정사는 다른 건물에 비해 방에 문과 창이 많은 편이다. 이는 방을 밝게 하고 공기순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함이다. 가운데 방이 숙식공간으로 사용되었고, 양쪽 마루방은 강학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동쪽 마루방에는 시습재(時習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서쪽 마루방에는 관란헌(觀瀾軒)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시습재는 <논어>에 나오는 '배우고 때로 익히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에서 따왔다. 그리고 관란헌은 '물을 바라봄에 있어서는 반드시 큰 물결을 보라'는 <맹자(孟子)> 구절에서 따왔다.

도산서당에서 바라 본 낙동강 쪽 풍경
 도산서당에서 바라 본 낙동강 쪽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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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도산서당에서 퇴계에게 공부한 대표적인 사람이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한강 정구다. 이들은 이곳에서 인격을 수양하고 학문을 수양하여 국가의 동량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김성일과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대표적인 정치가다. 그리고 정구는 퇴계, 남명에게서 학문을 배워 정치를 하면서도,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이들은 당파상 동인이었으며, 영남학맥의 거두로 역할을 했다. 이들의 학맥은 미수 허목, 묵재 허적, 여헌 장현광을 통해 후대까지 이어진다.

도산서당에서 만난 깨끗하고 절개 있는 벗들

열정(우물)
 열정(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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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당 입구에는 열정(冽井)이라는 우물이 있다. 열정은 도산서당의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이다. 찬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열정은 <주역> 정괘(井卦)에 나오는 '정렬한천식(井冽寒泉食)에서 따왔다. 그리고 도산서당 앞에는 몽천(蒙泉)과 정우당(淨友塘)이 있다. 몽천은 무지몽매한 것을 벗어나게 하는 샘이라는 뜻이다. 즉 공부와 교육을 통해 지혜로워질 것을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

정우당은 일종의 연지(蓮池)다. 깨끗한 벗이라는 뜻을 가진 정우가 연꽃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산서당 동쪽에는 절우사(節友社)가 있다. 절우는 절개 있는 벗으로 매화, 대나무, 국화, 소나무를 말한다. 그러므로 절우사는 이들 화초와 나무를 가꾸는 화단이다. 퇴계는 이 중 매화를 좋아해, 여러 편의 매화시를 남겼다. 그 중 '달밤에 도산에서 매화를 노래하다.(陶山月夜詠梅)'가 대표적이다.

절우사(화단)
 절우사(화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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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빛이 차갑구나.          獨倚山窓夜色寒
매화나무 위로 뜨는 달 바라보니 보름달일세.   梅梢月上正團團
일부러 부르지 않았는데도 미풍이 불어와        不須更喚微風至
맑은 향기 저절로 정원에 가득 하네.               自有淸香滿院間


태그:#고산정, #퇴계 묘소, #도산서당, #농운정사, #절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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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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