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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윤 일병 사망사건'이 터졌을 때 이 기사를 썼다가 두 가지 이유로 접고 말았다. 그 이유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그러다 오늘 아침 28사단 소속의 두 병사와 영화 <굿모닝 베트남>의 주연 로빈 윌리엄스가 자살했다는 보도를 접하면서 이 기사를 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죄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가 미쳤다?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열린 28사단 폭행 사망 희생자 윤일병과 군 사망 희생자 추모제에서 육군훈련소에서 뇌수막염으로 사망한 고 노우빈 훈련병의 유가족이 편지를 읽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 군 희생자 유가족 "아들아, 사랑이 무엇인지 배운다" 8일 오후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열린 28사단 폭행 사망 희생자 윤일병과 군 사망 희생자 추모제에서 윤군훈련소에서 뇌수막염으로 사망한 고 노우빈 훈련병의 유가족이 편지를 읽던 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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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군대가 말썽이다. 언론보도로만 보면 한 마디로 '군대가 미쳤다'라고 할 정도이다. 그 미친 군대에 얼마 전 내 아들이 입대를 했다. '7월 군번'이 가장 고되다는데, 역시나 폭염으로 숨까지 컥컥 막히던 7월의 어느 날이었다.

훈련소로 가는 길에 나와 아들은 김광석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를 함께 들었다. 가사 마디마디 폐부를 찔렀다. 그래도 아들은 애써 웃음을 지었고 나는 말이 없었지만 내내 가슴이 울컥했다. 아들도 걱정이었지만 30년도 더 지난 군대 시절의 기억이 오버랩되었던 것이다.

간단한 입소식을 마치고 훈련병들이 마지막으로 환송객들이 에워싸고 있는 연병장을 한 바퀴 돌았다. 보내는 사람들은 아우성이라도 치듯 제 자식의 이름을, 혹은 연인과 친구의 이름을 애타게 소리쳐 불렀다.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기에 손을 흔들고, 목이 메이다 못해 어떤 이들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나 역시 목을 빼고서 숱한 장정들 틈에서 아들을 찾았다. 그러다 아들이 눈에 들어왔을 때 이름을 부르려다 가슴께에서 목젖으로 올라오는 뜨거운 것을 먼저 삼키고 말았다. 멀어져 가는 아들의 모습을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장정들이 훈련소 막사로 사라지고, 텅 빈 연병장 한 가운데 낯 익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

군가 '진짜 사나이'의 마지막 구절이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썽썽한 내 자식 군대 보내놓고 부모형제 밤잠을 설친다!"  

바로 다음 날로 윤 일병 사건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34년 전 28사단의 '관심병사'였던 나

상흔처럼 보관하고 있는 1980년 11월 훈련병시절의 훈련병수첩
 상흔처럼 보관하고 있는 1980년 11월 훈련병시절의 훈련병수첩
ⓒ 임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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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사단과 의무대. 28사단은 내가 34개월 동안 군 생활을 했던 곳이다. 또 비록 대대에 속한 의무대였지만 그 의무대는 내게 수모와 치욕을 안겨주었다. 윤 일병 사건에 대한 보도를 보는 순간, 단 하루 그것도 일요일 오후의 한때였지만 그날의 기억이 악몽처럼 되살아났다.

일병을 갓 달았을 때의 어느 일요일. 연대에 있는 군인교회로 예배를 드리러갔다가 대대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길 중간에 나는 등허리에 갑자기 심한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치 송곳 하나가 어깨 죽지 부근을 사정없이 찌르는 것만 같았다. 나도 모르게 신음이 삐져나왔고 도무지 걸을 수가 없었다.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대대 의무대에 도착했다. 어디가 아프냐는 말에 나는 등허리를 무언가가 찌른다며 좀 눌러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곧장 돌아오는 말은 이랬다.

"야, X새끼야, 니가 무슨 기집X이야 눌러달라고 하게! 저 새끼 완전히 꾀병이야!"

의무대 병장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의무대에 있던 의무병들의 얼굴과 그들이 내게 뱉어냈던 말들이 뇌리에 그대로 박혀 있다.

등허리의 통증은 나중에 알았지만 그것은 담의 일종이었고, 진통제 한 알이면 끝날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했고,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신음이 새어나오면 여지없이 "아가리 닥쳐 새끼야!" "여기가 너네 집 안방인 줄 알아 새끼야!" 등의 욕설이 튀어나왔고, 의무병들의 조롱을 견디다 못해 나는 그냥 기어 나오다시피 했다. 나는 그들이 정말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 의무병들이 나를 그렇게 대했던 까닭은 안다. 내가 대대에 알려진 '꼴통'이었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대충 몇 가지만 되살려보자면 그 과정이 이렇다.  

5·18민중항쟁에 참여했던 나는 4개월 가까이 감옥에서 고초를 겪은 뒤에 석방되자마자 바로 군에 입대해야만 했다. 이른바 '특수학적변동자'로서 '강제징집'을 당한 것이다. 때문에 훈련병 시절부터 제대하는 마지막 날까지 보안사의 감시와 통제가 떠나지 않았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내가 쓴 편지는 아예 가지를 않았고, 내게 온 편지 역시 나한테 전달되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보안사가 사전검열 차원에서 압수했으리라 짐작할 따름이다. 그것은 자대배치를 받아서도 마찬가지였다.

최전방 철책에서 답답하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중에 하루는 중대 통신병이 환한 얼굴로 내게 말을 던졌다.

"야, 임 이병, 오늘 내가 연대에서 니 편지 보고 바로 가져왔다!"

당시 중대 통신병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서울시립대를 다니다 입대했던 이로 여러모로 나를 위로해주던 고참이었다.

편지가 왔다는 말에 나는 놀랍고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곧장 소대로 올라가 상황병에게 내 편지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내 편지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소대의 고참들이 내 편지를 함부로 뜯어서 돌려 보다 잃어 버린 것이다. 사정도 하고 애원도 했지만 편지를 보긴 봤는데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그때의 내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편지를 찾는 대신에 고문관이 되다

자대배치 후 나는 교육을 받으면서 필기를 할 때면 고참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한자를 썼다.  그래야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첩 위에 시커멓게 칠해진 부분, 나는 그곳에 '의무대 ×병장 ×새끼'라고 썼다가 지웠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보통 사람들처럼 살았다면 그도 자식을 군대에 보냈을 텐데 말이다.
 자대배치 후 나는 교육을 받으면서 필기를 할 때면 고참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일부러 한자를 썼다. 그래야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첩 위에 시커멓게 칠해진 부분, 나는 그곳에 '의무대 ×병장 ×새끼'라고 썼다가 지웠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보통 사람들처럼 살았다면 그도 자식을 군대에 보냈을 텐데 말이다.
ⓒ 임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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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편지를 찾아달라고 하면서부터 소대의 분위기가 싹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소대 고참들은 처음부터 나를 대하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가끔씩 대대와 연대의 보안대에서 소대상황병이나 소대장을 통해 나에 대해 묻곤 했단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보안사에 무슨 '끝발'이라도 있어 곧 좋은 데로 전출될 것으로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고참들은 노골적으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등병 놈 새끼가 군기가 빠져서 그깟 편지 하나 없어졌다고 지랄을 한다'는 식이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철책 근무는 소위 군기반장으로 통하는 일병 최고참과 한 조를 이루었다.

갓 전입된 이등병은 대개 병장들과 한 조를 이루는데, 일부러 일병 최고참과 같이 초소에 투입되었다. 초소에 투입되자마자 전방 경계가 아니라 나는 '대가리 꼴아박기'부터 했다. 한겨울이었지만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그러다 순찰이 가까이 오면 벌떡 일어났고, 순찰이 지나가면 다시 머리를 박아야 했다. 나머지 내무반 생활을 말하기도 싫다.

탈영도 생각했다. 하지만 사방에 지뢰가 깔려 있는 최전방 철책에서 어디로 도망갈 곳이 없었다. 며칠째 되던 날, 역시나 초소에 투입되자마자 머리를 박으라고 하였다. 나는 그대로 서 있었다. 고참은 길길이 뛰었다. '쪼인트'가 까지고 주먹이 가슴팍으로 날아왔다. 그러나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나는 그 고참에게 또렷하게 말했다.

"나, 군대 들어오기 전에 당할 만큼 당한 사람이니까 그만 때리십시오. 더 이상 맞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한테 온 편지 찾아주지 않으면 편지를 찾을 때까지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한테까지 보고할 것입니다!"

최전방 철책은 최고 지휘관들이 수시로 순찰을 돌기 때문에 보고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내 말에 고참은 코웃음을 치며 험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나는 어느 한순간 초소를 이탈했다. 실탄 560발과 수류탄 2발을 가진 채였다. 사고를 칠 생각은 결코 없었지만 그 순간의 행동은 당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소대가 발칵 뒤집혔다. 전반조 근무를 마치고 곤하게 잠을 자던 소대원들이 일어나 한밤중에 불도 밝히지 못한 채 나를 찾아다녔다. 한 시간 뒤쯤 나는 내 발로 복귀했다. 다음 날 아침, 잃어 버렸던 편지가 꾸깃꾸깃 접히고 찢긴 채로 내게 돌아왔다. 그 다음부터 소대생활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것이다.

울산에서 대학을 다니다 입대했던 내 동기는 탈영을 하다 잡혔고, 어떤 동기는 견디다 못해 자신의 총으로 발등을 쏘고서 남한산성(육군교도소)으로 갔다는 말도 들었다. 나 역시 차라리 그렇게 되길 바랄 정도였다.

휴가도 제때 가지 못했다. 남들은 6개월이면 가는 정기휴가를 나는 1년이 다 되도록 가지 못 했다. 물론 보안사의 통제 때문이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첫 휴가 때였다. 대대장에게 휴가신고를 마치고 휴가비까지 지급해 놓고서는 정작 휴가증은 주지 않아 밥도 먹지 않고 내무반에 드러누워 농성 아닌 농성을 하기도 했다.

그럴 정도였으니 포상휴가는 꿈도 꾸지 못했다. 웅변 솜씨가 있던 나는 연대, 사단, 군단 대회에까지 나가 수차례 1등을 했는데도 포상휴가는 없었다. 어떤 때는 내 성적을 조작하여 아예 입상을 못하도록 했다.   

문제는 사병이 아니라 지휘관이다

어렵게 사병생활을 하던 중에 나를 살린 것은 일선 지휘관의 관심과 배려였다. 그 중에 손꼽는 분이 당시 중대장님이었던 엄명재(마지막 함자가 재인지, 길인지 기억이 가물하다) 대위였다. 중대장은 내가 일병을 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나를 중대본부의 교육계(작전병)로 발탁했다.

처음에는 인사계로 쓰려다 보안사의 반대로 물러났다가 기어이 나를 본부로 불러들인 것이다. 거기에 큰 힘을 실어준 것이 당시 대대장님이었던 김영길 중령이었다. 갑종 출신(사병으로 입대하여 간부후보학교를 거쳐 장교로 복무)으로 월남전에도 다녀왔다는 그분은 수시로 나를 찾아 대화를 나누며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두 분 덕분에 힘들었던 소대생활을 탈출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랑이지만, 작전병으로서 나의 임무수행능력은 100% 이상이었다. 대대장님이 "너 제대할 때 육군 소위 계급장 달아줘도 아깝지 않겠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군대는 계급도 중요하지만 보직이 더 힘을 발휘한다. 그래, 사실 본부에 있으면서 나를 괴롭혔던 이들에게 적당히 복수도 해주었다.

그렇다고 나머지 군대생활이 마냥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제대를 앞두고 보안사에 끌려가 녹화사업을 받고 돌아왔을 때 대대장님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임 병장, 미안하다. 나는 솔직히 니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대대장으로서 정말 미안하다!"

그 한 마디에 군에 맺혔던 숱한 원망이 다 씻어지는 것만 같았다. 정말 내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두 분의 일선 지휘관이 있었기에 나는 무사히 만기제대 할 수 있었다. 

군 통수권자가 말하라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2월 25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 거수경례하는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2월 25일 오전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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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부탁드린다. 지금 군에서 연쇄적으로 터지는 사건과 사고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란 것쯤은 다들 알 것이다. 또 일부 '문제 사병들'만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문제는 지휘관들이다. 전 장병에게 인권교육을 하기 이전에 일선에서부터 사병을 부리고 지휘하는 지휘관들의 책임과 의지를 먼저 따져 물을 일이다. 34년 전의 군대에서도 책임감을 갖고 때로 보안사라는 당시 최고의 권력과 부딪치며 자신의 부하사병을 지켰던 지휘관이 있었는데, 지금의 일선 지휘관들은 계급장과 견장만 차고 있단 말인가.

또 그들을 지휘하는 상급 지휘관들은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윤 일병 사건을 놓고 '마녀사냥'으로 치부하고 있는 군병원장의 인식이 지금 군 지휘관들의 인식이라니 그저 절망스러울 따름이다. 왈가왈부하기도 싫다.

군 기강사건이 터질 때마다 원인을 따지고 숱한 대책이 뒤따른다. 그러나 대책 이전에 새겨들을 말이 있다.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고 했다. 인화, 어려울 것 하나도 없다. 계급과 지위 이전에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이다. 사병도 사람이다. 천하와 바꿀 수 없는 한 생명이다.

군 통수권자가 말하라. 제 자식들 군에 보내놓고 밤잠을 설쳐야 하는 부모형제들이 단잠은 아니라도 근심걱정만이라도 덜게끔 군 지휘관들에게 말하라. 병사들의 억울하고 원통한 죽음을 방치한 지휘관들은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임종일 기자는 장편역사소설 정도전(전3권, 인문서원)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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