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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인클럽>은 오마이뉴스가 권력과 자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언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매달 자발적으로 후원하는 유료 독자들의 모임(http://omn.kr/5gcd)입니다. 클럽은 회원들의 후원으로 '10만인리포트'를 발행하고 있는데요, 이 글 연재하는 김도균 기자는 국방부를 출입하는 오마이뉴스 사회부 기자입니다. [편집자말]


저기 아름다운 기슭과 둔덕
로몬드 호수 위 햇빛 눈부시게 빛나던 곳
내 사랑하는 이와 함께 언제나 찾아가던 곳
그 아름답던 로몬드 호숫가 기슭이여.

당신은 저 높은 길로 가고 나는 낮은 길을 가리라
당신보다 나는 먼저 스코틀랜드에 가 있을거요
하지만 나는 내 사랑과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
로몬드 호숫가 아름다운 그 기슭에서.

그늘진 골짜기에서 우린 헤어졌지
벤 로본드 봉(峰)의 가파른 비탈 위
하이랜드 산등성이들은 자줏빛 속에 잠겨있고
어스름녁 하늘엔 달이 떠올랐지.

작은 새들 노래하고 들꽃들이 피는 곳
햇빛 속에 호수는 고요히 잠들어 있었지
하지만 상처 입은 내 가슴에 봄은 다시 오지 않으리
우리가 얼마나 슬퍼하는지 세상을 모를거야.

당신은 저 높은 길로 가고 나는 낮은 길을 가리라
당신보다 나는 먼저 스코틀랜드에 가 있을거요
하지만 나는 내 사랑과 다시는 만날 수 없으리
로몬드 호숫가 아름다운 그 기슭에서.

- 로몬드 호수의 아름다운 기슭 (Bonnie Banks of Loch Lomond)

스코틀랜드 애딘버러 인근에 있는 로몬드 호수는 둘레 길이가 110Km, 면적 70㎢로 브리튼 섬에서 가장 큰 담수호입니다.
▲ 로몬드 호수 스코틀랜드 애딘버러 인근에 있는 로몬드 호수는 둘레 길이가 110Km, 면적 70㎢로 브리튼 섬에서 가장 큰 담수호입니다.
ⓒ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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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이 70㎢로 여의도 면적의 9배 정도 되는 '로몬드' 호수는 브리튼 섬에서 가장 큰 담수호입니다. 스코틀랜드 최대 도시인 글래스고우 근교에 있는 이곳은 '호수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풍광을 자랑해, 사철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스코틀랜드 민요 '로몬드 호수의 아름다운 기슭'은 바로 이 호수를 함께 거닐던 어느 연인들의 애절한 이별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이별은 바로 전쟁 때문에 벌어졌습니다.

'호수의 여왕'에 서린 슬픔

1603년 잉글랜드의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가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영국왕 헨리 7세의 증손뻘이라는 이유로 왕관을 넘겨받게 됩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동시에 통치하는 제임스 1세로 즉위하여 스튜어트 왕조를 열게 된 것이죠.

하지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동시에 통치하게 된 스튜어트 왕조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왕은 신으로부터 그 권력을 부여받았다'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했던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는 전제정치를 펴다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으로 목이 잘리게 됩니다. 이후 왕정복고에 의해 찰스 2세가 즉위하였지만, 그의 아우 제임스 2세도 재차 전제정치를 강행하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왕위를 잃고 프랑스로 쫓겨납니다. 이후 50여 년간 수차례 벌어진 내전의 싹이 트게 되죠. 이른바 '자코바이트의 반란'입니다.

영어 '제임스'의 라틴식 이름인 '야코부스'에서 유래한 자코바이트는 그 이름부터 제임스 2세의 복위, 즉 스튜어트 왕조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좌에 다시 앉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자코바이트들은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사람들이었죠. (스코틀랜드는 북쪽의 하이랜드와 남쪽의 로랜드로 나뉘어지는데, 이 두 지역은 지리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언어나 습관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제임스 2세는 1689년 루이 14세의 원조로 프랑스군을 이끌고 아일랜드에 상륙, 재기를 꿈꾸기도 했지만 이듬해 '보인'(Boyne)강 전투에서 참패하고 프랑스로 돌아가 10여 년 뒤 상제르망에서 병사합니다. 우유부단하고 용기가 없었던 제임스 2세를 아일랜드 사람들은 '등신 제임스'(영어로는 더 치욕적이게도 'James the shit')라는 별명으로 불렀습니다. 하지만 이 패배도 자코바이트의 반란을 잠재우지는 못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폭동과 반란, 학살이 이어졌던 것이죠.


1745년 7월, 스튜어트 왕가의 적통을 주장하는 왕자가 도버 해협을 건너와 스코틀랜드 땅을 밟았습니다. 이미 제임스 2세가 죽은 지 오래되었지만, 그의 손자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왕관을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스코틀랜드에 상륙한 것이었죠. 굳은 의지에 비해 상황이 썩 좋지는 않았습니다. 무기와 용병들을 실은 배 2척 중 한 척은 영국 해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채로  돌아갔고, 이 때문에 찰스 왕자는 제대로 된 지원도 없이 스코틀랜드에 도착했던 겁니다.

왕자를 맞은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반응도 미적지근했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여러 번의 반란들이 실패한 이후, 외부의 지원이 없으면 봉기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죠. 하지만 왕자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타고 온 배를 프랑스로 돌려보내면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소. 나의 충성스러운 하이랜더들이 나와 함께 서리라 믿기 때문이오."

이렇게 또 한 번의 반란이 시작되었습니다.

1745년 제임스 2세의 손자 '보니 프린스 찰스'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자코바이트들을 규합, 영국 정부를 상대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 찰스 왕자의 귀환 1745년 제임스 2세의 손자 '보니 프린스 찰스'가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자코바이트들을 규합, 영국 정부를 상대로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 educationscotland.gov.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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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는 할아버지와는 달리 '잘생긴 찰리 왕자'(보니 프린스 찰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외모와 언변이 좋았고, 친화력도 있었습니다. 이런 찰스의 소문을 들은 하이랜드 곳곳에서 지원병들이 몰려들었죠. 아마 로몬드 호숫가에서 사랑을 꽃피웠던 젊은이도 이 지원병들 중에 포함되어 있었을 겁니다.

찰스는 병력을 모아 먼저 스코틀랜드 최대 도시인 에딘버러를 점령한 다음, 프레스톤팬즈에서 정부군을 격파했습니다. 준비도 제대로 안 된 자코바이트군이 서전에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운이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영국군의 대부분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 참전하느라 유럽 대륙에 파병되어 있었고, 정작 영국 내에는 병력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봉기 석 달 만에 5000명으로 늘어난 자코바이트군은 런던을 향해 남진을 시작합니다. 사기는 높았고 진군 속도도 빨랐습니다. 런던에서는 예금 인출 사태가 벌어졌고 전국적인 공황상태가 뒤따랐죠. 자코바이트군은 런던 북쪽 200Km까지 진출했지만, 여기까지가 한계였습니다.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영국 정부가 대륙에 파병되었던 군대를 본토로 소환하는 한편, 동맹국 네덜란드로부터도 6000의 원군을 지원받아 단단히 대비하고 있었던 겁니다. 또 찰스도 스코틀랜드와는 달리 잉글랜드에서는 자신이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찰스는 결국 군사를 되돌려 스코틀랜드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전열을 재정비한 영국 정부군의 공격을 막아야하는 처지가 된 것이죠.

1746년 4월 16일, 컬로든 근처 황무지에서 5000명의 자코바이트군과 9000명의 영국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자코바이트군은 피곤하고 굶주려 있었죠. 무엇보다 영국군이 잘 훈련되고 근대식 화기를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하이랜더 군대는 장비조차 빈약했습니다. 이때까지 자코바이트군의 특기는 번쩍이는 칼을 치켜들고 전속력으로 적의 정면으로 달려드는 일제 돌격이었지만, 이날은 이런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영국군 보병대는 이미 하이랜더들의 돌격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머스킷 소총을 장비한 영국군은 3열을 유지하며 첫째 열은 무릎을 꾾은 채, 둘째 열은 약간 구부린 자세로, 셋째 열은 일어선 자세로 사격을 가해 달려오는 자코바이트군을 저지했습니다. 되풀이 되어 쏟아지는 총탄에 하이랜더의 대열은 갈수록 얇아졌습니다. 전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죠. 1000여명의 자코바이트들이 전사했고, 또 다른 1000여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반면 영국군은 50여명의 전사자를 냈을 뿐이죠.

1746년 4월 6일 컬로든 인근 드러모시 벌판에서 자코바이트군은 영국 정부군에 패배했습니다. 이 전투는 역사적으로 영국 본토에서 벌어졌던 마지막 지상전이었습니다.
▲ 컬로든 전투 1746년 4월 6일 컬로든 인근 드러모시 벌판에서 자코바이트군은 영국 정부군에 패배했습니다. 이 전투는 역사적으로 영국 본토에서 벌어졌던 마지막 지상전이었습니다.
ⓒ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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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로든의 벌판은 자코바이트 병사들이 흘린 피로 얼룩졌지만, 전투가 끝난 후에도 하이랜더들에 대한 잉글랜드군의 처참한 살육은 계속됐습니다. 영국군은 스코틀랜드 곳곳에서 자코바이트 반란군을 색출했고, 이렇게 붙잡힌 사람들은 대역죄로 처형당했습니다. 이들의 목은 창 끝에 매달려 반란에 대한 본보기로 에딘버러에서 런던에 이르는 마을마다 전시되었죠.

로몬드 호숫가의 그 젊은이도 그만 영국군에 붙잡혀왔습니다. 당시 영국군은 체포된 반란군들을 대상으로 잔인한 게임을 했는데, 형제나 친구가 함께 반란에 참여했을 경우 게임을 통해 한 사람은 살려주고 다른 사람은 죽이는 것이었죠. 이 노래의 주인공은 처형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바로 내일이면 이 세상을 떠나야하는 그가 이생에서의 마지막 밤에 무엇을 떠올렸을까요. 아마도 쏟아지던 햇빛이 눈부시던 그 호숫가 기슭, 그 보다 더 아름답던 연인의 모습이었을 겁니다.


"당신은 저 높은 길로 가고 나는 낮은 길을 가리라"는 노랫말은 이 노래의 절창(絶唱)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합니다만, 당시 스코틀랜드의 애딘버러에서 잉글랜드의 런던을 잇는 길을 하이로드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보면, 아마도 이 '높은 길'은 자신의 처형소식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갈 친구나 형제가 걸어갈 길을 뜻하는 것이겠지요.

또 자신이 걸어 갈 '낮은 길'은 타향에서 세상을 떠난 스코틀랜드인의 영혼을 고향으로 인도한다는 요정을 따라갈 사자(死者)의 길일 겁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영혼이 산 사람보다 더 빨리 고향에 닿게 되어도 사랑하는 이를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죠. 만약 전쟁이 없었다면 이 노래의 주인공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자식들을 낳고 기르면서 로몬드 호숫가에서 행복한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겁니다. 결국 전쟁의 참혹함은 고위 지휘관의 것이 아니라 병사들과 그 가족들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18세기부터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로몬드 호수의 아름다운 기슭>은 오늘날 또 다른 이별노래인 '올드랭사인'에 버금가는 가슴 아픈 이별노래로 세계인들에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태그:#전쟁과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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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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