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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스민 법안'이 상정됐다. 정식 명칭은 아동복지법 일부 개정안이다. 외국인 불법체류자 슬하의 이주 아동에게 교육권, 건강권 등의 권리를 보장해 줄 것을 골자로 한다.

UN의 1991년 관련 비준안은 모든 아동에게 부모의 국적이나 지위를 막론하여 기초적인 인권을 보장해줄 것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간 우리나라에는 이를 실현할 법안이 마련돼 있지 않았다. 이에 정청래 의원을 비롯한 새정치연합 국회의원 10인이 이번 개정안을 발의, 상정한 것이다.

아동복지법 개정안이 입법예고되자 뜨거운 논란이 피어올랐다. 유명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유머>를 시작으로 각종 사이트에서 '이자스민 법안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의 글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에서도 수많은 사용자들이 해당 법안을 비판하고 나섰다. 소수의 옹호론이 있었지만 사실상 법안 비난으로 도배되는 양상이었다.

비난의 논리는 요컨대 다음과 같다.

"불법체류자에 의한 범죄가 점차 만연하고 있다. 이런 잠재적 범죄집단은 속히 사회 바깥으로 추방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주아동에게 건강권, 교육권 등이 보장되면 이주아동의 보호자인 불법체류자들은 자동적으로 강제추방을 미룰 수 있게 된다. 즉 우리가 낸 세금으로 외국인 범죄를 보호하는 꼴이다. 왜 납세도 하지 않는 비국민에게 법적 권리 및 복지 혜택을 줘야 하는가?"

'이자스민 법안'이 들춰보인 현실인식

주장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 앞서 이번 개정안에 따라 붙은 '이자스민 법안'이라는 명칭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자스민 법안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도 이자스민 의원은 이 법안의 발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먼 이 의원은 엉뚱한 작명 때문에 네티즌들의 독한 언행에 시달려야 했다. 누군가가 이 의원이 과거 이주아동의 처우 개선에 관련한 법안을 상정하려 시도한 바가 있어 실수한 것일까? 만약 실수라면 이는 외국인 불법체류자를 옹호해 온 그녀에 대한 소위 '필리핀 스파이'라는 환상이 무의식적으로 투영된 것은 아닐까.

반대로 이 생뚱맞은 작명이 고의였다면 이는 거짓에 근거해서라도 외국인 불법체류자를 향해 강력한 혐오감을 표출하기 위함이었을 터다.

앞서 언급한 논리를 정확히 재현하는, 국민과 비국민 사이의 부조리한 차별대우라는 인식이 드러난 셈이다. 여기서 차별대우를 받는 쪽은 물론 국민이다. 비국민(불법체류자)은 세금도 내지 않으면서 국민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니 아니꼽다는 것이다.

실수든 고의든, '이자스민 법안'이라는 이름은 우리 사회의 다문화주의에 대해 진지한 고찰을 해야 할 필요를 방증하는 듯하다. 관용을 중시하는 민주사회에서 다문화주의는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상식이었다.

인권의 소중함, 생명의 존엄함, 선거의 중요성, 장애인에 대한 합당한 대우 등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듯 말이다. 이에 반하는 의견에는 으레 '몰상식한', '극우적' 등의 수사가 동원된 비난이 쏟아지곤 한다. 그러나 이번 개정안을 둘러싼 일련의 비판적 목소리는 다문화주의라는 사회적 합의가 개개인의 인식적 차원을 넘어 표면적인 영역에 있어서까지 흔들리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피할 수 없는 양시론의 늪

물론 외국인 노동자, 특히 조선족을 범죄적 세력으로 묘사하는 것은 설사 그들이 실제로 죄를 저지른다 한들 그들의 국적 또는 인종과는 전혀 무관하다. 보이스피싱으로 대표되는 '조선족 사기'는 무엇보다도 이들이 처한 경제적 환경에 기이한 것이기에 그렇다. 또한 이번 개정안은 어디까지나 이주 아동에게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최소한의 권리를 쥐어주는 것이므로 이를 토대로 외국인 불법체류자 전반을 매도하는 논리를 펴는 것은 비약이다.

그러나 모종의 합리성 역시 부정할 수는 없다. 이주 아동과 그 부모들은 분명 국민이 아니다. 이들에게 불법이라는 딱지가 붙는 이유다. 국민이 아니기 때문에 국민으로서의 의무 역시 지지 않는다. 평등이란 아쉽게도 고상한 심성이 아니다. 상대방의 이득이 내가 얻는 이득보다 커선 안되고 내가 받는 손해가 상대방의 손해보다 커선 안 된다는 생각이 평등의 민낯이다. 수많은 네티즌들의 반응에서 알 수 있듯 국민이 감수한 희생의 결실이 희생하지 않는 비국민에게 돌아가는 일이야말로 불평등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 냉혹한 합리성의 바탕에는 주권의식이라고 하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가 깔려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다문화주의와 주권의식의 대립은 한쪽만을 택할 수 없는 한국 민주주의의 이율배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파시즘이다, 관용의 확립이 필요하다는 등의 준엄한 꾸짖음만으로는 부족하다. 가치를 앞세운 비판은 언제나 손쉽지만 진정한 해결을 꾀하기엔 모자라다.

새 집을 지을 때

어쩌면 우리는 이웃의 존중과 다문화주의를 너무 쉬이 동일시해온 게 아닐까. 말인즉, 다문화주의는 언제나 다양한 문화권을 아우르는 중심 문화를 상정한다. 인종의 용광로(melting pot)를 자처하는 미국이라한들 백인 문화의 패권적 지위 하에 흑인-히스패닉-아시안-이슬람 문화가 이에 종속되어있는 게 주지의 사실이다. 나아가 이들 문화가 미국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아메리칸 스피릿'이라는 미국 특유의 가치를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 주류문화에 거슬리지 않겠다는 일종의 보증이다.

결국, 다문화주의 사회에서는 주류의 견고한 정체성이 유지된 상태에서만 소수가 인정받을 수 있다. 정체성을 배타성으로, 인정을 방치로 단어를 바꾸면 그 의미가 더욱 적나라해진다. 이자스민 법안에 대한 격렬한 반발이야말로 주류문화의 배타적 성격과 '우리에게 피해만 입히지 않으면 된다'라고 하는 사실상의 방치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다문화주의의 적실한 사례인 셈이다.

이웃을 나와 무관한 자로 놔두는 것은 존중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서의 격언를 실현하기에는 다문화주의의 한계가 분명하다. 국민과 비국민의 대립을 극복하고 주권의식이따뜻한 감성을 품을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한 시점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인 바, 인간 대 인간, 이웃 대 이웃이라는 인식의 틀을 마련할 수 있는 단어를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를 위해 관용, 권리 등의 관념적 추상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보편성을 재고해야 할 것이다. 다문화주의를 대신하는 새로운 이름의 집이 세워질 때 민주주의는 진정으로 만인을 위하는 평등공동체로 자리매김하리라.


태그:#이자스민, #다문화주의, #비국민, #주권의식, #보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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