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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 후배가 10월 29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인사동에서 열리는 한 출판기념회에 초대하는 문자를 보내왔다. 나는 가능한 서울 나들이를 자제하건만 마침 그 후배와 꼭 만날 일도 있기에 참석하기로 작정했다. 그날 그 시간에 맞추려면 원주 역에서 오후 3시 34분 청량리 행 열차를 타야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 2시 50분에 병원 진료가 예약돼 있기에 열차시간에 맞추려면 매우 촉박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 점심을 먹은 뒤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원주세브란스병원에 도착하자 1시 30분이었다. 담당 간호사에게 내 사정을 얘기했더니 그가 선뜻 편의를 봐줘서 진료를 마치고 처방전으로 병원 앞 약국에서 약까지 받았는데도 2시 10분이었다.

곧장 원주 역으로 갔더니 2시 47분 열차 표를 발매하고 있었다. 그 열차를 타고 가면 두 시간 정도 시간이 남을 듯했다. 그래서 열차표를 산 뒤 플랫폼으로 나가면서 인사동 이웃 안국동에 있는 한 고교동창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종로문화원장으로 내가 서울에 가면 언제든지 환영하며, 차를 사거나 자기 큰집인 청진동 해장국집으로 데려가 요기를 시켜줄뿐더러, 이런저런 세상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전화 연결이 원활치 않았다. 얼마 후 그는 그 시간 직원들과 문화탐방으로 지리산 노고단에 있다고 하면서 차담을 나누지 못해 미안해 했다. 나는 열차를 타고 청량리로 가는 도중, 남은 시간을 어떻게 메울지 궁리를 했다. 교보나 영풍문고에 가서 신간을 들춰볼까? 아니면 경복궁 역에 있는 지난날 단골목욕탕에 가서 몸이나 닦을까? 그런 가운데 갑자기 덕수궁이 떠올랐다.

그곳은 지난번 나의 장편소설 <약속>의 약속장소로 취재 차 자주 찾았던 곳이요, 그날 밤 행사장과도 그리 멀지 않은데다가 덕수궁을 경내를 한 바퀴 산책한 다음, 그 언저리에서 차 한 잔 마시면 자투리 시간이 금방 지나갈 듯했다. 그래서 청량리 역에서 1호선을 타고 시청 역에서 내렸다. 거기서 지상으로 오르자 낯익은 대한문이 나왔다. 곧장 매표구로 향하는데 그새 내 마음은 변덕을 부려 덕수궁 돌담길로 향했다.

1960년대 <동아일보> 배달원 시절 만난 천경자 화백

사망설이 꾸준히 나오던 천경자 화백이 최소 수개월전 사망했으며 천 화백의 딸 이혜선씨가 지난 여름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해 이같은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생전 천경자 화백의 모습.
 사망설이 꾸준히 나오던 천경자 화백이 최소 수개월전 사망했으며 천 화백의 딸 이혜선씨가 지난 여름 유골함을 들고 서울시립미술관을 방문해 이같은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생전 천경자 화백의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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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날은 '정동야행-시월의 마지막 밤, 정동에서 걷다'라는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덕수궁 돌담길은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중에 하나로, 특히 낙엽이 물들고 지는 10월 하순은 세계 어느 도시 거리보다도 더 아름다울 것이다.

나는 추색이 짙은 돌담길을 때마침 추적추적 내리는, 가뭄으로 대단히 반가운 가을비를 맞으며 걸으면서 지난 추억에 젖었다. 그 돌담길 끝나는 곳에는 이화여고가 있었다. 후기고교를 다녔던 나에게 이화여고생들은 '언감생심'으로 그저 쳐다보기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고2 때 내 뒷자리의 한 친구는 이화여고생을 짝사랑한 나머지 매일같이 그를 뒤따른다고 종례시간이면 도망을 가서 이튿날이면 담임선생님한테 불려가 늘 야단을 맞았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그 돌담길을 걷는데, 전 대법원 자리는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변해 있었다. 문득 얼마 전 천경자 화백 운명 소식을 들은 바가 있었고, 그곳에 천경자 상설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다고 하여, 그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오지랖이 넓은 탓인지 고인을 살아생전에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1960년대 초 <동아일보> 누하동 배달원이었다. 당시 종로구 누하동 서촌은 서민들이 많이 몰려 살았다. 골목길 누하동 176번지 깊은 골목길에는 천경자 화백이, 그 골목 막다른 집 178번지에는 청전 이상범 화백이 살았다. 두 집 모두 <동아일보>를 구독했는데, 이상범 화백은 <동아일보> 본사에서 전 직원으로 예우한 듯 무가지(無價紙)로 신문 값을 받지 않았으나, 천 화백은 살림이 매우 궁색했던 탓인지 몇 번이나 대문을 두들겨야 구독료를 받을 수 있었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게다가 반세기가 더 지난 지금도 내가 그 집을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대문의 독특한 문패 때문이었다. 나무 문패로 '千鏡子'라고 당신이 손수 붓으로 쓴 글씨가 그때 내 눈에도 대단히 달필이며, 개성이 있는 글씨체로 미적인 감각이  돋보였다. 때로는 대문이 열려 있어 신문을 대청마루에까지 배달하느라 집안 구조도 기억에 남아 있다.

이따금 천 화백을 만났는데 그때마다 신문 값을 제때에 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빠트리지 않았다. 그리고 건넌방에 있던 나와 동년배인 당시 진명여고를 다녔던 그 댁 따님도 몇 번은 본 듯도 하다. 

그 가난했던 천 화백이 그림으로, 글로 유명해져 지금은 그분의 그림 한 폭이 웬만한 아파트 한 채 값보다 더 비싸다고 한다. 하지만 그분은 업(業)이 많으신 듯, 당신의 부(富)나 유명세만큼 세속적인 삶은 그리 평탄치 않은 듯하다. 

나는 서울시립미술관 2층에 마련된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전시실의 작품들을 한 점 한 점 감상하면서 고인에 대한 추억과 삶과 예술, 그리고 죽음 등을 생각하면서 그분이 54세 때 그렸다는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라는 자화상 앞에 오래 서서 깊이 묵념을 드렸다.

누가 그분의 슬픈 전설을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문득 하늘은 한 사람에게 모든 복을 다 주시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서울시립미술관 전시실을 나오자 그새 정동 일대에 어둠이 살포시 내리고 있었다. 바야흐로 정동돌담길 '정동야행' 축제로 붐볐다. 하지만 거리의 화백들은 손님들이 찾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보냈다.

"밀레도 한때는 거리에서 그림을 그렸다지요"

갑자기 가난한 화가의 손님이 되고파 눈길을 주자 마침 대학생 같은 한 젊은 여성 화가가 반갑게 맞았다.

"얼마나 걸리지요?"
"5분에서 10분이면 돼요."

나는 그가 내미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그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스케치했다.

"손님, 모자가 멋있네요."
"사람은요?"
"사람도 멋있고요."
"감사합니다. 밀레도 한때는 거리에서 그림을 그렸다지요."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잠깐 새 완성된 내 캐리커처는 5년은 젊게 보였다.

"사인까지 넣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날 '정동야행' 축제 행사장에서 그린 내 캐리커처
 그날 '정동야행' 축제 행사장에서 그린 내 캐리커처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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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그가 사인한 뒤 봉투에 넣어준 캐리커처를 가방에 넣고, 이슬비가 내리는 정동 거리를 벗어나면서 영국의 시인 존 던(John Donne)의 '명상 17'을 나직이 읊었다.

… 그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아프게 하나니, 나는 인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바로 그대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니.
(… Each man's death diminishes me, For I am involved in mankind.
Therefore, send not to know For whom the bell tolls, It tolls for thee.)


태그:#정동야행, #천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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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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