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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능선길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며 외로이 서있다
▲ 나무 지리산 능선길에서 무언가를 기다리며 외로이 서있다
ⓒ 임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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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5시, 무언가 부스럭 소리에 잠을 깼다. 잠결에 어둠을 비집고 살펴보니 체코에서 온 젊은이들이 짐을 챙겨 대피소를 나서고 있다. 기차시간을 맞추려는 모양이다. 대피소를 나와 바깥을 살폈다. 바람은 조용하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버너에 불을 붙이고 물을 끓여 국밥을 만들어 먹었다. 반찬은 김치에 깻잎이 전부지만 맛은 시골장터국밥 못지않다. 이 또한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다.

오전 일곱 시가 넘어 연하천 대피소를 나섰다. 하룻밤 푹 쉬고 나니 발걸음이 좀 가볍다. 산위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며 벽소령으로 향했다. 산길은 어제처럼 변함없이 산죽이 쉼 없이 따라오며 길동무가 돼 준다. 산속에서 마시는 맑은 공기는 더 상큼하고 냄새도 좋다. 게다가 맑고 고운 새소리까지 듣게 되니 꿈속을 걷는 기분이다. 이런 길이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좋을 것 같다.

형제봉에서 만난 아침 산새가 맔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 산새 형제봉에서 만난 아침 산새가 맔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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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고지를 지나 형제봉에 이르러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았다. 반야봉과 토끼봉이 멀리서 손을 흔들며 살갑게 배웅을 해주고 있다. 오랜 시간 걸었음에도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고 내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먼 길을 떠나는 아들을 배웅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제 보았던 먼로 꽃과 제비꽃들도 다시 나타나 길동무가 돼 주고, 붉게 핀 진달래는 더 밝게 웃음을 건네며 산길의 피로를 덜어준다. 그러나 벽소령을 지나 칠선봉에 이르자 길은 다시 험한 돌길로 이어진다. 다리에서 힘들다는 신호가 전해지고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덕평봉까지는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어 한적한 산길을 마음껏 걸을 수 있었다. 지리산 속살을 구석구석 다 들여다보고 산 아래 풍경도 마음 놓고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등산스틱 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산길의 고요는 깨지고 마음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더니 요란한 스틱소리를 내며 줄지어 앞서기 시작한다. 그들은 지리산을 하루 만에 종주하기로 하고, 성삼재에서 오전 4시에 출발하여 천왕봉으로 가는 사람들이다. 오로지 앞만 보고 서둘러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한편으로 튼튼한 다리가 부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아름다운 산 풍경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고! 어찌하여 저리 바삐 가는지! 아무래도 욕심이 아닌가 싶다. 저렇게 급하게 험한 돌길을 걷다가는 다리에 큰 탈이 나지 않을까 염려도 된다.

또 다시 스틱이 급하게 돌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제는 그 소리가 너무 시끄럽다.  얼른 비켜서야 한다는 신호라서 신경이 쓰일 뿐더러 산길의 걷는 즐거움을 빼앗기는 것 같아 즐겁지가 않다. 사람이 이렇게 불안한데 산에 사는 동물들은 어떨까! 스틱소리는 모두에게 소음인 것은 분명하다. 이쯤 되면 산길에서 스틱사용은 한번 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덕평봉에서 칠선봉에 이를 때까지 몇 개의 산행 팀이 또 바삐 앞서 지나갔다.

그들이 한바탕 지나가자 다시 산길은 평화가 찾아왔다. 칠선봉을 오르는 바위틈에 자란 진달래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고, 기암괴석은 하늘 높이 솟아 멋진 자태를 뽐낸다. 새로 펼쳐 진 산 풍경에 카메라 셔터를 정신없이 눌러본다.

칠선봉을 오르는 길에  진달래가 활짝 웃으며 반겨준다
▲ 진달래 칠선봉을 오르는 길에 진달래가 활짝 웃으며 반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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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선봉으로 향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다시 숨을 차오르게 하고, 다리는 묵직한 신호를 세게 보내오며 걸음을 멈춰 서게 한다. 경험으로 보아 세석평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세석을 앞에 두고 영신봉을 넘어간다. 오르막길이 만만치 않다. 곳곳에 가파른 나무 계단이 놓여 있고, 계단 중간 중간에는 등산객들이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그러나 바람도 있고 햇볕도 따갑지 않아 산을 오르는 고단함을 금세 잊게 해준다.

갑자기 어디선가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얼른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들은 환영이라도 하듯 힘찬 날개 짓을 해대며 산봉우리 사이를 바쁘게 숨바꼭질하고 있다. 까마귀의 울음소리를 따라 산모퉁이를 돌아서니 넓은 구릉산지가 나타난다. 큰 나무 하나 없는 탁 트인 구릉이다. 

숲속을 내내 걸어오다 초원처럼 펼쳐진 넓은 구릉지 만나게 되니 마음이 설렌다. 너무도 편안하고 부담스럽지 않은 풍경에 마음을 몽땅 빼앗기고 말았다. 그 구릉에는 철쭉이 가득 자라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철쭉은 아직 피지 않았다. 철쭉이 모두 피게 되면 또 다른 장관이 펼쳐질 것이다. 

세석평전은 철쭉으로도 이름이 나 있지만 한신계곡을 따라 백무동으로 내려가는 길과 청학동으로 내려가는 길목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래서 항상 사람들이 붐빈다. 오늘도 세석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세석을 마음에 남겨두고 백무동으로 향한다. 천왕봉으로 가는 길이 갈라서며 유혹을 한다, 그 유혹을 뿌리치고 한신계곡을 타고 백무동으로 내려간다. 한신계곡은 피아골 뱀사골과 더불어 지리산이 자랑하는 3대 계곡으로 여름에도 한기가 느껴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세석에서 내려가는 길이 생각보다 무척 가파르다. 백무동까지는 6.5km, 천천히 걸어도 4시간이면 족하다. 그러나 그림 같은 계곡의 물빛에 빠져 놀다 보면 몇 시간이 더 걸릴지 모른다. 계곡을 가로 지르는 다리를 몇 개 건너자 물소리가 요란해지며 시원한 물줄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계곡물이 어찌나 맑고 깨끗한 지 저절로 걸음이 멈춰지고 만다. 그냥 보고만 있어도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산을 내려올수록 깊어지는 계곡과 마냥 뛰어 들고 싶은 그림 같은 물 빛 그리고 신록의 산 빛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풍경은 단연 최고다. 다리의 아픔도 잊은 채 한신계곡에 넋이 빠져 쉬엄쉬엄 내려오다 보니 어느새 여섯시가 훌쩍 넘어서고 있다. 계곡만 다섯 시간을 넘게 걸은 샘이다.

신록이 내려보는 가운데 폭포가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다
▲ 첫 나들이 폭포 신록이 내려보는 가운데 폭포가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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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계곡에는 한신폭포, 오층폭포, 가네소폭포, 첫 나들이 폭포가 줄지어 있어 계곡을 타는 재미를 더해준다. 특히 폭포가 쏟아내는 장쾌함은 답답한 가슴속을 후련하게 만들어 준다. 그 중 백무동에서 제일 가까운 첫 나들이 폭포는 이름만큼이나 예쁘고 시원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아 간다. 계곡을 들어서며 맞는 첫 번째 폭포라서 지나는 사람마다 그냥 가지 못하고 추억의 사진 한 장씩 꼭 남기고 간다.

어느새 땅거미가 계곡 깊숙이 내려와 서둘러 산장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다 왔다 생각하니 아무 곳에 그냥 눕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다리는 너무 무겁고 밀려오는 피곤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왜 이런 고행을 사서해야 하는지 갑자기 많은 생각들이 뇌리를 스쳐간다. 그러나 계획한 산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그리 무겁지만은 않다. 보람도 있고 나름 의미도 있다는 생각이다.

앞으로 언제 이 길을 또 걸을 수 있을까! 다음에는 눈이 수북이 쌓인 하얀 겨울에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와 다시 걸어 보고 싶다. 오늘 아내와 함께 산행은 1박 2일의 짧은 여정이지만  오랫동안 가슴 속에 남아 삶이 힘들 때마다 꺼내 볼 수 있는 좋은 추억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둘째날 산행여정

연하천 대피소(07:00) - 삼각고지 - 형제봉 - 벽소령(10:00) -  덕평봉- 칠선봉 -영신봉 -세석평전(13:30) - 한신계곡 - 백무동 (18:00)


태그:#지리산, #한신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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