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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선사 정문에 새겨진 글귀

대흥선사
 대흥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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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선사 정문은 2층 누각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1층에 아치형의 문이 있고, 그 양쪽으로 국토장엄(國土莊嚴)와 이락유정(利樂有情)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국토를 장엄하게 하고,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국토는 미타(彌陀)국토를 말하고 장엄은 안락(安樂)장엄을 말한다. 이락은 내세의 이익인 이와 현세의 즐거움인 낙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 문구에서 현세의 즐거움과 내세의 안락을 추구하는 불교정신을 볼 수 있다.

정문 안으로 들어서면 천왕전이 보인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천왕문이다. 그렇지만 2층 전각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내부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4천왕이 자리 잡고 있다. 동방 지국천왕, 서방 광목천왕, 남방 증장천왕, 북방 다문천왕. 이들의 모습이 우리 사천왕과 비슷해 보인다. 그런데 재질이 나무나 소조가 아닌 구운 도자기다. 사천왕은 불법을 수호하고, 부처님을 외호한다.

대흥선사 천왕전
 대흥선사 천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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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전을 지나면 큰 마당이 나오고, 그 앞에 계단을 지나 대웅보전이 보인다. 그리고 마당 좌우에 고루와 종루가 위치하고 있다. 고루와 종루가 큰 법당 앞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 중국 절의 특징이다. 고루 2층에는 천성(天聲)이라는 현판이, 종루 2층에는 지음(地音)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러므로 북은 하늘의 소리로 땅 위에 사는 중생을 제도하고, 종은 땅의 소리로 지옥의 중생을 제도한다. 그리고 이들 종과 북은 낮과 밤에 시각을 알리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중국 밀교 조사들의 행적 찾기

밀교의 상징 금강저
 밀교의 상징 금강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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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선사는 중국 밀교의 발원지다. 이것은 고루 앞의 밀장종풍(密藏宗風)이라는 표지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밀교 대장경을 통해 종풍을 드날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밀교는 5세기경 힌두교의 영향으로 진언과 다라니를 통해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쪽으로 시작되었다. 7세기 후반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 같은 근본경전이 만들어지며 신비주의적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순밀(純密)이란 이름으로 중국에 전달되었다.

또 다른 밀교가 9세기 인도 북부와 티베트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탄트라 밀교다. 힌두교 쉬바신 숭배의 영향으로, 신비주의적 경향과 현세에서의 복락 추구경향이 불교에 들어왔다. 그 결과 정신적 수행과 성적 의식이 긍정적으로 결합, 티베트 불교로 발전했다. 티베트 불교는 만다라와 금강저 같은 상징적 도구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금강지, 불공, 선무외 화상(왼쪽부터)
 금강지, 불공, 선무외 화상(왼쪽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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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밀교가 어떻게 대흥선사에서 시작되었을까? 대흥선사가 창건된 것은 서진 무제 때인 265년(泰始 2년)이다. 수․당시대에는 이곳에 역경원이 있었고, 그 때문에 인도 출신의 외국 승려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이 이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순밀을 가지고 들어왔고, 그것이 불교의 새로운 종파로 수용된 것이다. 그러한 밀교의 대표적인 승려가 선무외, 금강지, 불공이다.

선무외(637-735)는 중천축 출신의 왕족으로, 출가후 나란타사에서 공부하고 다르마굽타(Dharmagupta)로부터 밀교를 학습했다. 경논율에 능해 삼장법사라는 칭호를 받고, 돌궐과 토번을 지나 돈황의 옥문관으로 들어왔다. 그가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들어온 것은 716년(개원 4년) 그의 나이 80세 때였다. 그는 현종으로부터 국사라는 칭호를 받고, 불경을 번역하고 제자를 양성했다. 대표적인 제자가 금강지와 불공삼장이다.

금강지 화상
 금강지 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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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지(669-741) 역시 남천축 출신의 인도 승려다. 그는 10세 때 나란타사로 출가해, 20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그리고 대승과 소승경전을 두루 공부하고, 현교와 밀교에 통달했다. 그는 스리랑카를 거쳐 719년(개원 7년) 중국 남쪽 광주(廣州)로 들어왔다. 이듬해인 720년 초 낙양(洛陽)으로 간 다음, 장안과 낙양을 오가며 자은사, 천복사, 흥선사 등에서 불교를 가르쳤다. 그래서 그는 중국 밀교의 종조(宗祖)로 추앙받는다. 그의 제자가 불공삼장이다.

불공(705-774)은 스리랑카(獅子國) 출신의 승려로 원래 이름은 아목하바즈라(Amoghavajra)고, 중국식 이름이 이의 의역인 불공금강(不空金剛)이다. 그리고 그가 삼장에 능통했기 때문에 불공삼장으로도 불린다. 14세 때 자바섬에서 금강지를 만나 그를 따라 720년 낙양으로 들어왔다. 724년 구족계를 받고 불경 번역에 몰두했다. 그는 인도어, 스리랑카어, 자바어, 중국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남들이 12년 걸리던 번역을 단 6개월 만에 해내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는 <유가오부삼밀법(瑜伽五部三密法)>을 3년 만에 번역했다.

대흥선사대변정광지삼장국사지비
 대흥선사대변정광지삼장국사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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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한 당 현종의 요구로 741년 제자들을 이끌고 사자국을 거쳐 천축국에 이른 다음, 경장과 논장을 구해 746년 장안으로 돌아왔다. 대종(代宗)으로부터 대광지삼장(大廣智三藏)이라는 호를 받았다. 그리고 774년 입적하면서 '삿된 이익에 몸바쳐 육신을 욕되게 하지 말 것이며, 명예에 사로잡혀 도를 손상시키지 말라(無殉利以辱身 勿爲名而喪道)'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대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대변정(大辨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불공삼장은 평생을 불경 번역과 전교에 힘써, 그가 남긴 역경이 120권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불경이 현교 계열의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 <대승밀엄경(大乘密嚴經)>, 밀교 계열의 <금강정경(金剛頂經)>이다.

신라승 혜초, 혜일과 일본승 공해

밀교의 본산 흥선사 대웅보전
 밀교의 본산 흥선사 대웅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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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삼장의 법을 이어받은 8대 제자가 있으며, 그들은 대부분 혜(惠)자 돌림이다. 그 중 대표적인 스님이 혜랑(惠郞), 혜초(惠超), 혜과(惠果)다. 혜초는 신라 승려로 천복사에서 금강지를 만나 밀교를 배우고, 그의 권유로 723년 광주를 출발 구법순례에 나선다. 혜초는 해로로 동천축국에 이른 다음, 불교 4대 성지를 참배하고 불법을 공부한다. 그리고 간다라, 페르시아, 대식국(아라비아)을 거쳐 육로로 파미르 고원을 넘어 카쉬카르, 쿠차, 언기를 거쳐 727년 장안으로 돌아온다.

혜초는 천축을 왕래한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으니, 그것이<왕오천축국전>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동양학자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가 1908년 돈황 막고굴에서 발견한 필사본 중 하나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폭 28.5㎝ 길이 358.6㎝의 두루마리에, 227행 5893자의 한자가 쓰여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원래 3부로 이루어졌으나, 광주에서부터 동천축에 이르는 1부와 3부의 일부가 유실되어 있었다. 이 책의 저자인 혜초가 신라 승려인 것은 1915년에야 밝혀지게 되었다.

일본승 공해대사상
 일본승 공해대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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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과(惠果: 743-805)는 9세에 출가, 자은사에서 수계를 받고 불공삼장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밀교의 고승대덕이 되어 밀종대사로 불렸다. 그리고 대종, 덕종, 순종 3대에 걸쳐 국사로 추앙받았다. 그의 제자로는 신라승 혜일(惠日)과 일본승 공해(空海, 구카이: 774-835)가 있다. 공해는 804년 장안 청룡사(青龍寺)에서 혜과를 만나 밀교를 배우고 편조금강(遍照金剛)이라는 법명을 얻었다. 2년 후 귀국해 일본에 밀교인 진언종을 전파했다.

일본 진언종에서는 종조를 대일여래(大日如來)로 삼고, 금강지를 5조, 불공삼장을 6조, 혜과를 7조, 공해를 8조로 삼는다. 일본 진언종의 교의(敎義)는 즉신성불(即身成佛)과 밀엄국토(密嚴國土)다. 앞에서 본 대흥선사 교의를 약간 변형시켰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인연으로 이곳 대흥선사에는 일본인들이 세운 공해대사 동상이 있고, 자각대사(慈覺大師: 공해) 기념당이 있다.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달마화비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달마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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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리의 혜초나 혜일 스님의 흔적은 찾을 수 있다. 그나마 송광사 회주 법흥(法興)대선사가 주도해 세운 사문동성달마화비(沙門東惺達摩畵碑)가 보인다. 달마대사 그림을 동성스님이 그리고, 건립 연기문을 황의동(黃義東) 거사가 지었다. 그런데 비석 위에 인류의 화해협력과 세계평화를 기원한다고 적혀 있다. 절에 있는 비석치고는 상당히 정치적이고 추상적이다. 이런 비석 대신 혜초 스님을 기리는 비석이나 기념관을 세울 수 없는 건가?

대웅보전에 어째 5방5불이 계신 거지?

대웅보전의 5방5불
 대웅보전의 5방5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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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대웅보전으로 간다. 대웅보전은 2층으로 된 전각으로, 2층에 대웅보전이라는 편액이, 1층 가운데 문 위에 오방오불(五方五佛)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가운데 비로자나불이 계신다. 일반적으로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이 계신데 말이다. 그리고 명패에 비로자나불이 아니고 대일여래라고 쓰여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곳이 밀교의 전당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밀교의 주존불이 대일여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보생여래가 협시하고 있다. 그 바깥으로는 불공성취여래와 부동여래가 호위하고 있다. 이들은 중앙의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사방의 지혜를 대표한다. 중앙의 대일여래는 법계체성지(法界體性智), 동방의 부동여래는 대원경지(大圓鏡智)를, 서방의 아미타여래는 묘관찰지(妙觀察智)를, 남방의 보생여래는 평등성지(平等性智)를, 북방의 불공성취여래는 성소작지(成所作智)를 보여준다.

전륜장경전터
 전륜장경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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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부연 설명하면 대일여래는 법신불로 본체로서의 성질을 보여준다. 부동여래는 크고 둥근 거울에 만상을 비추는 능력을 갖고 있다. 아미타여래는 불가사의한 법을 잘 관찰하여 중생을 교화한다. 보생여래는 중생들의 평등성을 관찰하여 그들을 교화하고 구제한다. 불공성취여래는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5식(五識)을 바꿔 청정한 진여심(眞如心)을 만들어낸다.

대웅보전 뒤로 가면 당나라 때 전륜장경전(轉輪藏經展)터가 있다. 지금은 20여개의 주춧돌만 남아 역사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장경전은 청나라 건륭제 때인 1785년 중건되었으나 그 후 전화로 또 다시 소실되었다. 이곳 장경전터 가운데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포대화상이 안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뒤로 지장보살이 엄마를 보우(保佑)하고 자식을 평안하게 하는 원을 세우고, 중생들의 기도를 들어주고 있다. 그래서 그 이름도 자안지장왕보살(子安地藏王菩薩)이다.

자안지장왕보살
 자안지장왕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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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사 와불
 흥선사 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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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는 관음전 쪽으로 간다. 그런데 코끼리, 귀부, 석사자 옆으로 귀부, 탑신, 이수가 완전한 비석을 하나 만난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당대흥선사대변정광지삼장국사지비(唐大興善寺大辨正廣智三藏國師之碑)다. 건중(建中) 2년(781년) 11월 15일에 세웠다고 나와 있다. 글은 엄영(嚴郢)이 짓고, 글씨는 서호(徐浩)가 썼다. 비문은 불공삼장이 출가해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다 입적한 삶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비석의 원본은 비림박물관 제2실에 있고, 이 비석은 복제본이다.

대흥선사에는 그 외에도 삼불전, 보현전, 문수전, 와불전 등 전각이 많고, 설법당, 나한당, 불학원, 장경루 등이 있다. 이들 당우에는 이름에 걸맞게 불보살이 모셔져 있고, 경전과 마니차 등이 보관 또는 설치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들을 주마간산으로 살펴본다. 앞에 언급한 것들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대흥선사에서 천이삼백 년 전 고승대덕인 불공삼장, 혜초, 공해의 흔적을 만나고 또 그들과 교감할 수 있었다는 데 만족한다. 그게 어디 보통 일인가?


태그:#대흥선사, #대일여래, #불공삼장, #혜초, #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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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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