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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군에선 5일마다 제법 큰 장이 선다. 매달 4일과 9일 장이 서면, 젊은 사람들이야 굳이 장에서 구할 상품이 뭐가 있겠느냐 퉁명스럽게 내뱉지만... 어디 장터에서 물건만 사고팔던가. 인정을 팔고, 인정을 사는 곳이 장터다. 또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막걸리 한 잔 나누는 즐거움도 장터를 찾는 이유다.

4일과 9일 장이 서는 양양의 5일장은 다양한 추억과 인연들이 어우러지는 한마당 축제장이다.
▲ 양양전통시장 4일과 9일 장이 서는 양양의 5일장은 다양한 추억과 인연들이 어우러지는 한마당 축제장이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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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지에서 누군가 찾아와도 양양읍내에 장이 서는 날이면 그곳으로 먼저 이끈다. 요즘 보기 힘든 옛풍물도 만날 수 있거니와, 울산시장을 방문한 대통령이 "이게 뭐냐"며 신기한 듯 물었다는 소라과자 등의 옛날 군것질거리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추로 빻은… 그럼 이거 엄청 귀한 거네요"라 했다는 그 귀한 고추로 만든 가루도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다.

몇 천원만 줘도 냉장고처럼 시원하다는 바지 한 장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고, 더러 제법 부담스러운 가격을 부르면 흥정도 가능한 곳이 장터다. 대장간에서 친 낫이나 호미, 가마솥에 직접 삶는 족발이나 큼직하게 즉석에서 부쳐낸 빈대떡에 막걸리 한 잔 마실 수 있는 즐거움 또한 이곳에선 빠트릴 수 없다.

5일장이 서는 날이면 기존상가 앞까지 장꾼들이 자리를 잡고 다양한 물건들을 진열하고 손님을 기다린다.
▲ 양양전통시장 5일장이 서는 날이면 기존상가 앞까지 장꾼들이 자리를 잡고 다양한 물건들을 진열하고 손님을 기다린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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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부터 다양한 제철 야채와 나물을 구할 수 있고, 곧 자연산 버섯으로 흥청거릴 장터에서 파프리카를 본 울산에서 온 시낭송가 두 분은 당장 "이거 얼마씩 팔아요"라고 묻는다. "한 바구니에 5000원요"란 대답에 빨간색과 노란색 각각 한 바구니씩 구입한다. 과일도 사고, 군것질거리를 파는 곳마다 한 가지씩 사서 맛을 보더니 "오늘은 저녁 안 먹어도 배불러요"란다.

여자들과 장에 가면 이럴 때 정말 괜히 함께 나섰다는 후회가 밀려든다. 차라리 빈대떡 파는 자리에서 막걸리나 한 잔씩 하자고 먼저 그럴 것을….

시낭송을 하는 두 분 울산에서 온 손님들은 역시 파프리카와 과일, 그리고 장터에서 파는 색깔 고운 옷에 마음을 뺐긴다.
▲ 양양전통시장 시낭송을 하는 두 분 울산에서 온 손님들은 역시 파프리카와 과일, 그리고 장터에서 파는 색깔 고운 옷에 마음을 뺐긴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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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장에 오면 빠트리지 않고 들르던 식당이 있다. 아버지를 따라 장에 올 기회라야 초등학교 6학년이 막 될 무렵부터 두 세 번이지만 명절 직전에 서는 대목장은 그만큼 풍성했다. 그전엔 친구들의 부모님이 장에 다녀오시며 사왔단 센베이과자나 콩을 볶아 물엿으로 뭉친 것 등의 군것질거리를 부러운 눈으로 봐야 했다.

6학년이 된 설 무렵 방학을 한 뒤 동생과 둘이 산에서 나무를 지개로 져다 장작을 만들어 놓은 걸 마을에 여럿 있던 여관에 팔았다. 그 얼마간의 돈이 아버지의 수중에 있었다. 자식들이 힘들게 한 장작을 판 돈이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침 밥상머리에서 "양양의 대목장을 본 뒤 갈천 큰집으로 제사를 모시러 가자"고 하셨다.

서둘러 설거지를 마치고 방에 들어서자 곧장 늦으면 안 되니 얼른 버스를 타러 나가자 하셨다. 몇 년 안 되는 동안 마을엔 아침에 마을에서 출발해 양양에 나갔다 저녁에 다시 돌아오던 버스만 있었는데, 곧 낮에도 버스가 몇 번 더 다니기 시작했고, 오색령(한계령)을 넘는 직행버스와 완행버스도 한 해전부터 생기더니 이때부터 규칙적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당연히 차편이 여유가 있는데도 서둘러 아침에 마을에서 출발하는 버스를 타러 나선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아버지를 따라 동생과 나섰다.

양양에 도착하자 곧장 아버지는 우릴 앞세워 이모가 하시는 옷가게부터 찾았다. "얘들 맞는 옷 한 벌씩 줘요"라며 이모한테 아버지가 말씀했다. 파란색에 흰색 줄을 세 개씩 넣은 추리닝을 한 벌씩 입히며 아버지는 "이 녀석들이 나무를 해서 그나마 올 겨울엔 갈천에 제사를 모시러 가려고"라며 이모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하셨고,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시던 이모부가 "자식들 이제 다 키웠구만요. 얘들 엄마만 있어도 저 고생들 안 해도 될 일을"이라며 혀를 찼다.

판자로 만든 문짝도, 양철판으로 만든 번호가 써 있던 문짝도 모두 사라진 양양정터지만 여전히 오랜 세월 한 자리를 지키는 가게들이 있다.
▲ 선흥식당 판자로 만든 문짝도, 양철판으로 만든 번호가 써 있던 문짝도 모두 사라진 양양정터지만 여전히 오랜 세월 한 자리를 지키는 가게들이 있다.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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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으로 이발소에 들러 머리까지 깎고 아버지가 다시 시장통으로 걸어가시는 뒤를 따랐다. 양철을 각재로 만든 문틀에 덧붙여 문짝을 떼 세워놓은 낯익은 식당으로 들어선 아버지는 먼저 자리를 잡고 이미 술잔을 나누고 있던 몇 분 사이에 앉으시더니 "여기도 잔 하나 줘요"라 하셨다. 어정쩡하게 서 있는 동생과 내가 보기 안타까우셨던 모양이다. 주인아주머니가 "얘들도 있구만"하시더니 "너희는 방으로 들어가 기다려라"라 하시더니 제법 높은 위치에 달린 방문을 열어 들어가도록 하셨다.

방안엔 누군가 고등학생이 사용하는 듯했다. 동생과 방문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밥은 먹었고?"라며 주인아주머니가 물었다. "예 먹고 왔어요"라 대답했으나 이미 점심때가 되어 있으니 일순간에 허기가 밀려왔다. 그러나 어른들이 뭘 먹든 그 앞에서 입맛 다시지 말라고 늘 말을 들었던 터라 동생과 다시 멀뚱하니 방안에서 아버지가 부르시기만 기다렸다.

한참 뒤 "문 좀 열어봐"란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라는 소리인지 뭔지 알 수 없어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데 "얘들이 잠이 들었나"란 말이 다시 들렸다. "아뇨"라 대답하며 문을 열자 작은 대접 두 개에 어른들이 술안주로 드시던 선지를 담아 "아무래도 네 아버지가 술을 더 드실 모양이다. 이거 먼저 동생과 먹어라"라며 주셨다.

부엌에 가마솥을 걸고 장작을 때 소나 돼지머리를 삶고, 순대를 쪄내는 식당에서 아버지와 친구 몇 분께서 막걸리를 주문하면 투가리에 가득 담아 안주로 내던 그 선지였다. 잔 파와 굵게 빻은 고춧가루를 어떻게 넣었는지 모를 선지는 고소하면서도 뭐라 표현하기 어렵지만 특별한 맛이 있었다. 동생과 아껴 먹으며 아버지가 부르시길 기다렸다.

예전 양철판에 숫자로 순서를 적었던 문짝이 아닌 스테인리스로 된 문에 깨끗하게 썬팅을 한 선흥식당의 변함 없는 메뉴.
▲ 선흥식당 출입문 예전 양철판에 숫자로 순서를 적었던 문짝이 아닌 스테인리스로 된 문에 깨끗하게 썬팅을 한 선흥식당의 변함 없는 메뉴.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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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월이 훌쩍 흘러 친구 좋아하시고, 늘 시장 어딘가에서 어울려 술 한 잔 이끌고 하시던 아버지도 떠나셨다. 그 식당도 양철판을 짠 문짝도 사라진 지 오래다. 끼워 맞추는 순서에 따라 1번부터 시작되던 그 문짝이 사라지고 얼마 뒤 오래전부터 고등학생이던 아들과 며느리가 식당을 맡아 한다. 식당의 모습은 예전과 달라졌지만 선지해장국 맛은 여전히 좋다.

선흥식당, 선지해장국 한 그릇 할 생각으로 들어갔으나 '문어해물곰탕'이란 낯 선 메뉴가 있어 먼저 물었다. 소머리를 삶은 곰국에 해물과 문어를 넣은 문어해물곰탕이란다. 세 종류 이상의 재료가 어우러진 맛이 궁금했다. 크게 망설이지 않고 주문했다.

선흥식당에서 소머리곰국을 이용해 새로이 만든 문어해물곰탕
▲ 문어해물곰탕 선흥식당에서 소머리곰국을 이용해 새로이 만든 문어해물곰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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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수님, 그럼 오늘은 그걸로 한 그릇 주세요. 막걸리도 한 잔 하겠습니다."

김치와 깍두기, 몇 가지 반찬과 함께 막걸리부터 상에 차려졌다. 막걸리 한 잔 천천히 마시며 문어해물곰탕이 나오길 기다렸다.

문어해물곰탕이 나오자 먼저 국물부터 한 수저 떠 맛을 봤다. 곰국의 고소하면서도 입에 감기는 감칠맛과 해물의 시원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여간해서 음식에 대해 글을 쓸 생각을 접은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이정도의 음식이라면 사람에 따라 다른 평가를 내리겠지만, 비교적 많은 이들에게 좋은 평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에 몇 장 촬영을 했다.

맛은 입에 존재하는 특화된 감각 기관을 통해 느껴지는 화학 수용의 한 형태다. 미뢰(맛봉오리)에서 느끼는 짠맛과 신맛 등의 다섯 종류의 맛이 뇌로 전달되며 이를 복합적으로 분석하여 개인별 취향에 따른 평가를 내린다. 그렇기에 내가 즐기는 음식을 타인도 무조건적으로 좋아한다고는 볼 수 없고, 타인이 꺼리는 음식이지만 내겐 각별하게 느껴지는 음식과 맛이 있다.

굵은 새우와 싱싱항 홍합, 문어가 소머리 삶은 곰국과 어우러진 선흥식당의 문어해물곰탕
▲ 문어해물곰탕 굵은 새우와 싱싱항 홍합, 문어가 소머리 삶은 곰국과 어우러진 선흥식당의 문어해물곰탕
ⓒ 정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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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지 않은 소머리 삶은 고기와 육수, 그리고 홍합과 새우가 내는 또 다른 시원함과 감칠맛이 문어의 쫄깃함까지 더한 선흥식당의 문어해물곰탕은 더위를 또 다른 뜨거움으로 이기게 해준다.

소머리를 삶은 육수와 홍합이 기본 바탕이 되어 느끼게 하겠지만, 여기에 건강을 챙기는 몇 가지 재료의 추가로 더운 여름철엔 보양식으로도 좋겠다. 물론 찬바람 부는 계절이라면 추위를 가시게 할 음식이겠다.

한 그릇 1만원 하는 문어해물곰탕의 홍합과 새우, 문어를 고추냉이 조금 찍어 간장으로 간을 맞춰 막걸리 한 병 금방 비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정덕수의 블로그 한사의 문화마을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양양군, #양양맛집, #선흥식당, #문어해물곰탕, #양양전통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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