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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남서원 전경. 서원 정문 바로 앞으로 도로가 휙 굽으면서 지나간다. 그래서 대문을 열어둘 수가 없다. 대문을 열어두면 사람들이 그리로 드나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달리는 차량들 때문에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도남서원에 들어가려면 왼쪽으로 담장을 타고 걸어가 좁은 영귀문을 이용해야 한다.
 도남서원 전경. 서원 정문 바로 앞으로 도로가 휙 굽으면서 지나간다. 그래서 대문을 열어둘 수가 없다. 대문을 열어두면 사람들이 그리로 드나들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달리는 차량들 때문에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도남서원에 들어가려면 왼쪽으로 담장을 타고 걸어가 좁은 영귀문을 이용해야 한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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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남서원(道南書院)은 경북 상주시 도남2길 91에 있다. 서원 이름 도남은 조선 유학의 전통이 영남에 있다는 자부심을 나타낸다. 이름이 그런 까닭에, 도남서원은 어떤 가문이 자신들의 조상 중 한 분 또는 몇 분을 모시는 그런 곳이 아니다. 도남서원에는 무려 아홉 가문의 아홉 분이 모셔져 있다.

도남서원은 1606년(선조 39) 상주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그 후 1616년(광해군 8)에 노수신과 유성룡을, 1635년(인조 13)에 정경세를, 2005년에 이준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아홉 분 중 류성룡, 정경세, 이준은 임진왜란을 직접 겪은 분들이고, 정경세와 이준은 도남서원 창건에 주도한 인물들이다. (이준에 대해서는 '조선 형제의 우애에 감동해 중국인이 그린 그림' 참조)

아홉 가문의 아홉 선현을 모시는 도남서원

도남서원의 서재
 도남서원의 서재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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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원이 임금으로부터 '도남'이라는 이름을 얻고, 지원도 받는 사액(賜額)서원으로 승격된 때는 1677년(숙종 3)이다. 하지만 외삼문 앞 안내판이 '1797년(정조 21)에 동재와 서재가 건립되었고,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었다'라고 설명하는 것으로 보아 도남서원은 사액 이후에도  외형적 측면에서 크게 번창하지 못하던 중 철폐된 듯하다.

도남서원이 복원되기 시작한 때는 1992년으로, 향토 유림이 나서서 강당을 되살렸다. 이어 경상북도의 지원에 힘입어 동재와 서재가 복원되었다. 그리고 2002년 이후 '유교문화 관광 사업'의 일환으로 정허루, 장판각, 영귀문, 입덕문 등도 세워졌다. 이때 강당도 다시 지었다.

서원 경내에서 가장 핵심적인 건물로는 제사를 지내는 집인 사당 도정사(道正祠)와, 학교 건물에 해당되는 강당 일관당(一貫堂)을 들 수 있다. 도정사를 주요 건물로 거론하는 까닭은 서원이 본래 뛰어난 선비들을 제사지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일관당을 주요 건물로 손꼽는 것 역시 서원이 본래 교육기관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도남서원에는 동재인 손학재(遜學齋), 서재인 민구재(敏求齋), 누각인 정허루(靜虛樓), 신문(神門)인 입덕문(入德門), 협문(夾門, 좁은 샛문)인 영귀문(詠歸門) 등이 있다. 여기서 외삼문인 입덕문을 신문으로 소개한 것은 현지 안내판을 따른 표현이다. 신문은 신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뜻이다.

보통 삼문은 삼도(三道)라 하여 가운데 큰 문인 신도(神道)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고, 좌우의 작은 두 문으로만 드나든다. 그런데 도남서원의 외삼문은 아예 문 자체를 신문이라 부르면서 중앙문과 좌우 두 작은 문까지 꽉 닫아놓았다. 일반 답사객에게는 문 사용을 아예 원천 봉쇄하고 있는 것이다.

도남서원 외삼문, 가운데 큰 문과 좌우 작은 두 문 모두 폐쇄

도남서원의 입덕문, 바로 앞이 넓은 도로인 탓에 문은 항상 닫혀 있다.
 도남서원의 입덕문, 바로 앞이 넓은 도로인 탓에 문은 항상 닫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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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우는 아주 작은 서원 또는 서당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다. 관리를 할 여력이 없어 문을 닫아놓았다가 관람 희망자가 나타나면 해당 문중 사람이 달려와 샛문을 열어주는 방식이다. 즉, '유교문화 관광 사업'으로 복원된 도남서원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폐문이다.

폐문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그저 서원 바로 앞으로 큰 도로가 뚫린 탓이다. 게다가 도로는 외삼문 바로 앞에서 급회전을 한다. 문 앞을 오가다가는 위험에 빠지기 십상이다. 이 사정은 도남서원의 지난 사진을 보면 금세 헤아려진다.

옛사진을 보면, 도남서원의 외삼문 앞에는 높은 돌층계가 있었다. 서원에 들어가려면 외삼문 앞의 장엄한 돌계단을 밟은 후 오른쪽 작은 문을 통과해야 했다. 그런데 넓은 신작로를 뚫으면서 돌층계를 없애버리는 바람에 입덕문은 도로에 붙고 말았다.

입덕문에서 왼쪽으로 담을 타고 가면 영귀문이 나타난다. 영귀문은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만큼 좁고 낮다. 학문을 닦고, 뛰어난 선현(先賢)들을 제사지내기 위해 서원에 왔으니 허리를 굽힌 채 작은 문을 드나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귀문 문턱을 넘어서면 도남서원의 전경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누각 정허루가 왼쪽 정면으로 보이고, 그 뒤로 강당이 높게 자리하고 있다. 물론 동재와 서재는 정허루와 강당 사이 뜰에 좌우로 선 채 마주보고 있다.

서원의 일반적 건물 배치 따랐지만 탁 트인 전망은 특별

도남서원의 강당
 도남서원의 강당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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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은 강당 뒤 더 높은 지대에 있다. 모든 건물들의 배치가 서원의 일반적인 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도남서원에는 여느 서원에서도 보기 힘든 특별한 경치가 깃들어 있다. 서원 앞을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의 장관이 정허루 위에서도, 강당 앞에서도, 사당 내삼문 앞에서도 막힘없이 보인다.  

누각에 올라 저 아래로 흐르는 낙동강의 물길을 바라보노라면 말 그대로 속이 다 시원해진다. 특히 창공이 푸르고 하얀 새털구름이 뽀얗게 떠 있는 풍경을 볼 수 있는 날이면, 그 상쾌함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다.

도남서원 강당의 좌우 두 방 문 위에 경재(敬齋)와 의재(義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들은 <선조실록> 1607년(선조 40) 5월 13일자의 '류성룡과 정인홍은 의논이 맞지 않았다. 정인홍은 (류성룡을 겉으로는 너그러운 체하나 속은 포악한) 공손홍 같은 인물이라며 배척하였고, 류성룡 역시 정인홍의 속 좁고 편벽됨을 미워하니, 사론(士論, 선비들의 생각)이 두 갈래로 나뉘어져 서로 물과 불처럼 공격했다.'라는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비슷한 내용은 <선조실록> 1607년(선조 40) 5월 15일자에도 나온다. 실록은 '정인홍이 류성룡과 크게 맞지 않아 양쪽 문인(門人, 선비)들이 서로 배척하였으므로 남북(南北) 당(黨)의 다툼이 더욱 심해졌다.'라고 증언한다. 정인홍과 류성룡에 이르러 남인과 북인의 다툼이 아주 심해졌다?

이황의 남인 제자들과 조식의 북인 제자들 사이의 갈등이 정인홍과 류성룡에 이르러 심화되었다는 표현이 가능한 것은 정인홍이 조식의 수제자이고, 류성룡이 이황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윤승훈이 1601년(선조 34) 10월 25일자 <선조실록> 발언을 통해 매우 함축적으로 풀이해준다.

경북 선비들은 학문 숭상, 경남 선비들은 실천 강조

도남서원으로 들어가려면 이 영귀문을 이용해야 한다. 문 왼쪽 뒤로 보이는 2층 누각이 정허루이다.
 도남서원으로 들어가려면 이 영귀문을 이용해야 한다. 문 왼쪽 뒤로 보이는 2층 누각이 정허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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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훈은 선조에게 "경상도는 본래 유자(儒者, 선비)가 많기로 이름나서 상도(上道, 경상좌도, 특히 경북 북부)에는 이황이 있어 학문을 숭상하였고(學問相尙), 하도(下道, 경상우도, 특히 경남 서부)에는 조식이 있어 절의를 높였기 때문에(節義相高) 풍속이 볼 만하였습니다." 하고 말한다.

윤승훈의 말은, 이황 계열의 남인은 사람이 자신을 갈고 닦기(修己) 위해서는 인간의 도덕적 정신인 경(敬)을 학문적으로 궁리(窮理)하는 데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조식 계열의 북인은 수기(修己)의 방법으로 경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실천의 문제인 의(義)를 매우 중시하는 특성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 결과 임진왜란 때 경상도 일원에서 크게 활약한 정인홍, 김면, 곽재우 등 주요 의병장들은 대부분 조식의 제자들이었다. 이들이 한결같이 창의에 앞장선 것은 '정자와 주자 이후의 학자들은 (두 분이 이미 성리학의 이론을 모두 규명하였기 때문에) 책을 저술할 필요가 없다'면서 '손으로 물 뿌리고 마당 쓰는 일도 못하면서 입으로는 하늘의 이치를 말하는' '도명기세(盜名欺世, 이름을 도둑질하고 세상을 속임)'의 행위를 하지 말라는 스승 조식의 가르침을 제자로서 실천에 옮긴 '의'였다.

그래서 임진왜란이 끝나면, 전쟁 중 생명과 재산을 나라를 위해 바친 대의명분에서 앞선 북인들이 권력을 잡게 된다. 북인들은 류성룡을 혹평한다. <선조실록> 1607년(선조 40) 5월 13일 기사는 그 사실을 보여주는 아름답지 못한 증거의 하나이다.

당일 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류성룡은 (앞서 언급된 칭찬 부분은 생략) 사람됨이 조금 좁고 마음이 굳세지 못해 이해가 눈앞에 닥치면 흔들렸다.'면서 '따라서 임금의 신임을 얻은 지 오래되었지만 바른 말을 했다는 평판이 없고, 나랏일을 결정하는 데 큰 권력을 휘둘렀지만 나빠진 풍습을 구하지 못했다.'라고 평가했다.

또 '기축년의 변(1589년 정여립 사건) 때 (중략) 착한 사람들이 잇따라 죽었는데도 일찍이 한 마디 말을 하거나 한 사람도 구제하지 않고 상소하여 자신을 변명하면서 구차하게 몸과 지위를 보전하기까지 하였다. 임진년과 정유년 사이에는 (중략) 화친을 극력 주장하며 통신(通信, 일본과 대화)하여 적에게 잘 보이기를 추구, 원수를 잊고 부끄러움을 참게 한 죄가 천고에 한을 끼치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의사(義士)들이 분개했다.'라는 참담한 문장을 남겼다.  

도남서원의 사당
 도남서원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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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류성룡에 대한 부정적 기술은 <선조수정실록> 1607년 5월 1일 두 번째 기사에도 실려 있다. 북인들이 <선조실록>을 편찬하면서 서인인 이이, 성혼, 박순, 정철, 그리고 남인인 류성룡 등에 대해 고의로 헐뜯어 놓았다고 판단한 서인들이 1643년 이래 새로 만든 <선조'수정'실록>에도 변함없이 류성룡은 비난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수정실록은 '류성룡은 (앞서 언급된 칭찬 부분은 생략) 틀이 좁고 지론(持論, 평소의 견해)이 넓지 못하여 붕당(朋黨, 당파)에 대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기와 의견을 달리하면 조정에 용납하지 않았고 임금이 득실을 거론하면 감히 대항하여 바른대로 말하지 못해 대신다운 면모가 없었다.'라며 <선조실록>과 비슷한 비판을 하고 있다.

게다가 수정실록은 <징비록>도 깎아내리고 있다. '류성룡은  일찍이 임진년의 일(임진왜란)을 기록하고는 <징비록(懲毖錄)>이라 이름을 붙였는데 세상에 널리 읽혔다. 그러나 지식인들은 (류성룡이) 자기만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고 하여 이를 비웃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엄청난 혹평을 퍼부은 5월 13일자 실록에는 아주 반대되는 내용도 실려 있어 후대의 독자들을 헷갈리게 한다. 실록은, 류성룡의 사망 소식이 한양에 전해지자 '3일 동안 조시(朝市, 조정과 시장)를 정지했다.'면서 '도성 각전(各廛, 여러 시장)의 백성들이 빠짐없이 묵사동(성북동)에 모여 소리내어 울었는데 그 숫자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라고 증언한다.

실록에 실린 류성룡에 대한 상반된 기록

도남서원 강당에서 내려다 본 누각과 낙동강의 풍경
 도남서원 강당에서 내려다 본 누각과 낙동강의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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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실록은 '묵사동에는 유성룡의 옛집 터가 남아 있었다. (중략) 시민과 서리(書吏, 하급 관리) 등이 본가(本家, 류성룡의 집)가 청빈하여 상을 치르지 못할 것이라 걱정하여 포(布, 삼베)를 모아 부의(賻儀, 상가에 보탬)하였다.'라며 당시의 민심을 생생하게 말해준다. 이는 앞의 혹평과 완벽하게 상반되는 내용이다. 같은 실록의 같은 날 기록이 이렇듯 다르니, 과연 어느 쪽의 평가가 사실과 부합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 아래 낙동강 물길과 창공의 푸르른 광채를 바라보며 한없이 시원했던 가슴이, 류성룡에 대한 실록의 상반된 기록을 읽으니 문득 답답해진다. 사실을 알고 싶은 순수한 마음을 떠나, '국정 교과서' 격인 실록이 이래서는 곤란하지 않나 싶은 안타까움이 뭉클 솟아난 탓이다.  

마지막으로, 류성룡이 이곳 도남서원에 모셔진 까닭에 대해 생각해 본다. 류성룡은 1580년 윤5월부터 1581년 1월까지 약 여덟 달 동안 상주목사로 재임하면서 유학 진흥에 많은 힘을 쏟고, 그 과정에서 다수의 제자들을 길러내었다. 류성룡과 함께 이곳에 모셔져 있는 정경세와 이준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운 인물로서 모두 류성룡의 제자들이다. 뿐만 아니라 류성룡의 3남 류진은 다시 정경세의 제자가 되었고, 스승을 따라 상주로 옮겨와서 살았다.

이는 정경세가 대구 최초의 서원 연경서원에 모셔진 것과 까닭이 같다. 류성룡의 제자인 정경세 역시 대구부사로 재임할 당시 지역 유학 발전을 위해 크게 공헌했다. 류성룡과 정경세 두 사람은 학자가 자신의 근무지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말해주는 모범적 사례로 여겨진다.


태그:#도남서원, #이준, #류성룡, #정경세,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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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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