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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도시락 '유부초밥 가득' / 수채일러스트
 소풍도시락 '유부초밥 가득' / 수채일러스트
ⓒ 권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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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에서 소풍 가기 이틀 전부터 아들은 설렘과 기대를 감추지 못했다. 목소리 톤은 흥분에 도취 되어 내내 엄마 마음마저 뒤흔들었다. 하원 시간에 맞춰 데리고 오는 차 안, 평소 차분한 아들의 낯빛도 목소리와 걸맞게 상기되어 있었다.

"선생님이 이틀 밤 자면 수목원으로 소풍 간댔어. 엄마는 도시락이랑 물 꼭 싸줘?!"
"으응. 엄마가 맛있는 도시락 싸줄게!"


소풍에 대한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듯 호기롭게 대답한 지 얼마 안 되어 또다시 아들의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표정이 자동차 앞 미러에 비쳤다. 기어코 운전하는 내 뒷덜미에 질문을 또 던졌다.

"그런데 도시락에 뭐 싸줄 거야?"

마침 골목 맞은편에 다른 차가 진입하고 있던 터라 예민하게 운전에 집중해야 했으므로 즉답을 피했건만, 엄마의 사정은 관심도 없는 터라 집요하게 똑같은 질문을 해댔다.

"도시락에 뭐 싸줄거냐구우."
"잠깐만. 엄마가 지금 운전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조금만 더 생각해볼게. 우리 아들은 뭐 싸가고 싶은 거 있어?"


어쨌거나 직접 먹게 될 아들의 도시락 취향을 고려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 생각되어 선택한 답변이었다. 분명 내가 물어봐 주면 신이 나서 싸가고 싶은 것들을 줄줄이 나열할 것이라 여겨졌는데 그 생각이 꼭 맞았다. 무엇을 싸가고 싶으냐는 물음이 끝나자마자 얼굴을 온 힘을 다해 일그러뜨리고 웃는 모습에는 행복이 가득했다. 마치 물어봐 주길 한참이나 기다렸다는 듯, 속사포 랩과 같은 대답이 이어졌다.

"소시지랑 사과랑 귤이랑 포도랑 김밥이랑 브로콜리랑 유부초밥이랑... 음... 또... 뭐가 있더라. 집에 키위도 있어?"

자기가 말해놓고도 종류가 너무 많아 민망한지 까르르 웃고 나서야 조금 차분해지던 녀석의 눈망울이 다시금 설렘과 흥분으로 빛나게 되는 일은 소풍 가는 날 아침까지 빈번했다.

당일 아침, 눈을 떠 부스스한 모습으로 품에 안기는 아들. "오늘 소풍 가는 날이다?!" 작게 속삭이니 달콤한 꿈에서 덜 깬 황홀한 표정으로 침실바닥을 풀쩍풀쩍 뛰던 모습은 녀석의 소풍 설렘주의보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이다.

심사숙고한 도시락 메뉴는 아들의 취향을 살리되 엄마의 편의를 고려해서 최종 선택되었다.

취향과 편의와 건강의 삼합, 소풍의 꽃 도시락은 주인공 아들이 진지하게 뜬 눈 앞에서 제작되었다. 김밥보다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유부초밥, 문어 모양으로 멋을 낸 데친 소시지, 사과조각 반 움큼, 귤 반 조각, 데친 브로콜리 몇 개. 소박하고 건강한 도시락이 완성되어 가는 동안은 꼬마 녀석이 먹어치운 여분의 소시지가 몇 개인지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유유히 도는 시계바늘에 맞춰 흐르던 시간은, 알록달록한 도시락 가방에 완성품을 채워 넣기까지 그리 얼마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쭉 지켜보던 아들은 엄마가 깜빡한 줄 아는지 다급히 말을 더했다.

"엄마, 물도 넣어야지!"

분명 잊지 않고 있었건만, 세심하게 자기가 먹을 물까지 챙길 줄 아는 아이가 기특해서 엄마는 연기자가 되었다. 깜짝 놀란 척을 하며 급한 듯 서둘러 푸른빛 작은 스포츠 물병을 꺼냈다. 보리차를 담아 열린 가방 문 틈새로 물병을 넣자마자 드디어 소풍 가는 게 실감 난다는 듯 환호하는 아이.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나 어릴 적 소풍 가던 날 아침이 가슴에 꽤 저릿하게 들이닥쳤다.

소풍하면 '김밥 냄새'

어릴 때 살던 집의 주방은 바로 내 방 옆이라서 엄마가 새벽부터 김밥 싸는 소리와 냄새가 새벽녘 반수면 상태의 내게 희미하고도 또렷하게 들렸었다. 고슬고슬 잘 된 밥에 소금간을 하고 고소한 참기름을 둘러 밥의 풍미를 더하고 나면 준비된 다른 속재료들을 곁들여 김에 돌돌 말고 있을 엄마 모습이 눈 감고도 그려졌다. 통통하고 긴 줄김밥을 잘 든 칼로 턱턱 잘라 왕접시에 차곡차곡 쌓을 신속하고 정성스런 손길도,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워 눈 감고도 읽었다.

그래도 결국 잠과의 승부에서 이기고 말았던 것은 후각이다. 더 자고 싶은 욕망을 이긴 김밥의 고소한 내음이 몸을 간신히 일으키게 했다. 냄새에 이끌려 침대에서 방바닥으로 턱 발을 내딛게 하는 순간은 소풍날 아침마다 매번 두근대고 짜릿한 설렘이 있었다. 목적지로 출발하려 단체버스에 몸을 실을 때도, 버스에서 잠들었다 눈 뜨고 도착장소의 풍광을 막 바라볼 때도 아닌 그 순간이었다. 소풍에 관한 가장 고조되었던 내 감정의 순간은 김밥 냄새에 몸을 일으킬 때였다. 어쩜 아들이 그걸 닮은 것일까.

도시락 싸는 내내 곁에서 이러쿵저러쿵 종알대다가도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흡족해하던 아들의 가을 소풍이 삶의 한 코너로 돌아 흘러갔다. 엄마 닮아 몸의 감각과 마음의 감정을 모두 열어두고 사는 아들의 소풍 설렘주의보도 잠시 물러갔다.

추억에 젖어 아이 마음에 동화되어 버렸나보다. 다음 소풍도 벌써부터 기대된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 http://blog.naver.com/rnjstnswl3 중복게재



태그:#아이소풍, #소풍도시락, #유부초밥, #어린이집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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