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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종주를 시작한 부산 괴정고개
 낙동정맥 종주를 시작한 부산 괴정고개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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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2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난 2014년 12월, 점심이나 먹자 하여 친구 류희문을 만났다. 점심을 먹기 전인지 먹고 난 뒤인지 류희문은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다.

"내년 4, 5월에 박근혜가 물러나는 환국(정치적 격변 사태)이 온다. 경제적으로는 IMF에 버금가는 대혼란이 올 것이고…."

류희문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광고회사에 다니다가 주역에 심취해 음양학자의 길을 가기로 작정하고 아예 사무실까지 낸 친구다.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박근혜 이야기만 나오면 눈꼬리가 가늘어지는 사람이지만, 박근혜가 설마 그렇게까지야 되겠나 싶어 그저 픽 웃으며 흘려들었다.

친구는 내 사주도 봐 주었다.

"너는 글 쓰는 길로 가겠다. 64, 65세에 대작을 내겠는데. 지금부터 쭈~욱 글 쓰는 일을 계속 해라."

그 얘기 역시 뜬금없이 들려 피식 웃고 말았다. 대기업 홍보실에서 근무하거나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잡문 쓰는 일을 오래 하긴 했지만, 이때는 글이나 책과 관련한 모든 일을 접고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물을 많이 먹일까 하는 과제에 몰두하던 생수회사 영업 임원이었기 때문이다.

산행 중에 만나는 예비군 훈련장
 산행 중에 만나는 예비군 훈련장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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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친구의 예언을 떠올리며 소름이 쪽쪽 돋을 정도로 경악하고 있다. 시기는 친구가 말한 때보다 좀 늦어지긴 했지만 친구가 얘기한 대로 박근혜가 물러나는 사태는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그러면 친구가 얘기한 내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나는 과연 글을 쓰는 쪽으로 갈 것인가.

낙동정맥 첫 구간 종주를 축하해 주는 듯 늦가을 햇살이 화사하게 비췄다.
 낙동정맥 첫 구간 종주를 축하해 주는 듯 늦가을 햇살이 화사하게 비췄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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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종주를 변화의 계기로

산행을 앞둔 날은 언제나 마음이 설렌다. 남자가 여자를 만날 때처럼 마음이 흥분된다. 낙동정맥 종주를 시작하기 전날도 그랬다. 점심을 먹고 나서 살짝 들뜬 마음으로 사무실 주위를 산책하던 중, 한 가지 단상이 퍼뜩 떠올랐다.

'그래… 낙동정맥 종주를 내 삶과 함께 버무려서 책을 한 권 써 보자.'

낙동정맥 종주는 꽤나 의미 있는 일이고, 내 삶은 밖으로 내놓을 것을 좀처럼 찾기 어려울 만큼 보잘것없지만, 보잘것없는 삶이 낙동정맥을 종주하면서 조금씩 변해 가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이야기가 되겠다 싶었다.

예순을 앞둔 나이에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은 놓치지 않고 있다. 사람 나이 예순을 넘기면 생각이나 습관은 절대 바뀌지 않으니 바꿔야 할 게 있으면 그 전에 모두 바꾸라는 선인의 말은 내 가슴을 아프게 콕콕 찔러 댔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는, 예순에도 또 그 이후에도 사람은 충분히 바뀔 수 있다는 작은 오기 역시 아파하는 가슴 뒤편에서 살그머니 얼굴을 내밀었다.

의미 있는 낙동정맥 종주에, 의미를 조금씩 붙이며 변해 가는 내 삶을 연결시켜 보고 싶었다. 낙동정맥 종주는 27구간으로 나뉘어 진행되고, 한 달에 두 번씩 산행을 하여 두 구간을 나아가니 27구간을 다 마치려면 1년하고도 한두 달이 더 필요하다. 54구간으로 나뉘어 진행된 백두대간 종주에 비하면 딱 절반이지만, 남한 땅 9개 정맥 중에서 낙동정맥은 가장 길고 험하기도 한 산줄기다.

부산 감천만 풍경
 부산 감천만 풍경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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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정맥 산줄기를 한 구간 나아갈 때마다 한 가지 결심을 하도록 하자. 내 삶을 뒤흔들 큰 결심도 있겠지만, 음식 맛을 돋우는 양념처럼 소중하지만 소소한 것일 수도 있겠다. 대단히 중요하지만 지키기 힘든 결심도 있겠고, 좀 만만해 보이는 작은 결심도 있을 것이다.

낙동정맥 27구간을 종주하면서 한 구간을 마칠 때마다 한 가지 결심을 하고, 그게 쌓여서 내 삶을 바꾸어 가는 일…. 그건 참으로 흥미진진하고 가슴이 뻑뻑할 만큼 큰 기대가 밀려오는 일이다. 내 눈의 동공은 동그래지고 가슴은 들숨 날숨으로 분주하며 심장 박동 소리는 너무나 커서 내 귀에까지 들린다.

솔숲을 지나면서 솔향기에 흠뻑 취하는 호사를 누렸다.
 솔숲을 지나면서 솔향기에 흠뻑 취하는 호사를 누렸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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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구간 종주할 때마다 한 가지 결심

책은 과정을 정리한 결과물일 뿐이다. 내가 낙동정맥을 종주하며 조금이라도 변했다면, 책은 단지 그 과정을 하나하나 적어 넣은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나는 책을 내겠다는 '결과'보다는 내가 변해 가는 '과정'에 큰 흥미를 느끼고 있다.

'과정'을 즐기고 '과정'에 흥분하고 '과정'에 낙담할 뿐이다. 어찌 보면 책은 나오면 좋고 나오지 않아도 그리 나쁠 것은 없다는 생각이다. 이제 낙동정맥 27구간의 긴 산행을 시작한다.

결심 1 / 낙동정맥 27구간을 종주하며 한 구간 산행할 때마다 한 가지씩 내 삶을 바꾸는 결심을 하겠다. 그리고 그 과정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내겠다.

오랜 세월에 봉화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봉화산
 오랜 세월에 봉화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봉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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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정맥 1구간 종주
날짜 / 2016년 11월 12일 (토)
위치 / 부산광역시
날씨 / 대체로 맑고, 기온은 15~16도여서 포근함(이만하면 날은 좋은 편이고 낙동정맥 출정을 하늘이 축복한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산행 거리 / 12.5㎞
소요 시간 / 3시간 40분
산행 코스(남진) / 괴정고개 → 봉화산 → 구평가구단지 → 아미산 → 다대포 → 몰운대
함께한 산악회 / 기분 좋은 산행

370㎞의 장쾌한 산줄기 낙동정맥

백두대간 피재 근방에서 갈라져 나와 부산 다대포 몰운대까지 이어지는 370㎞의 장쾌한 산줄기 낙동정맥. 백병산, 백암산, 가지산, 신불산, 영축산(앞 3개 산은 영남알프스라 불릴 만큼 아름답다), 천성산(도롱룡도 주인인 그 산), 금정산, 백양산처럼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은 산들이 낙동정맥 북쪽에서 남쪽으로 줄줄이 이어진다.

사실, 낙동정맥을 우리는 자라나면서 '태백산맥'으로 배웠다. 남한 땅의 등뼈를 이루며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산줄기 태백산맥…, 그런데 '산맥'은 지질학적인 의미를 담은 용어라 땅 속 지질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우리네 삶과는 연관 짓기 힘들었다. 이제는 우리 선조들의 삶과 애환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대간' '정맥'이란 낱말이 거부감 없이 널리 쓰이고 있다. 낙동정맥은 태백산맥의 남쪽 절반 정도에 해당한다고 보면 되겠다. 낙동정맥 서쪽과 백두대간 동쪽의 모든 물은 낙동강으로 모여 남해로 들어간다.

낙동정맥 첫 구간 종주를 부산 괴정고개에서 남쪽 방향으로 시작했다.

낙동정맥이 지나가는 구평가구단지
 낙동정맥이 지나가는 구평가구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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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갈래로 갈린 고개의 운명

백두대간이나 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정맥을 종주하다 보면 수없이 많은 고개를 만난다. 이 마을에서 산 너머 저 마을로 가기 위해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 강을 건너기 위해 나루터가 생겨나듯 산줄기에는 산을 넘는 고개가 생겨났다.

세월이 흐르며 고개들의 운명은 두 갈래로 갈렸다. 찻길이 된 고개와 찻길이 되지 못한 고개…. 찻길이 된 고개는 양 옆 산이 깎이고 길이 넓어지며 고개의 모습을 잃었고, 찻길이 되지 못한 고개는 사람의 발길이 끊기며 고개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낙동정맥 종주 출발지가 된 괴정고개는 앞의 경우에 해당한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숨을 헐떡이며 아픈 다리를 끌며 힘겹게 오르던 고갯길이었겠지만, 지금은 자동차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는 6차선 도로로 바뀌었다.

복원해 놓은 아미산 봉수대
 복원해 놓은 아미산 봉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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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설렘과 함께 시작한 낙동정맥 종주이긴 하지만 처음부터 멋진 풍경이나 웅장한 산줄기가 나온 건 아니다. 주택가 골목길을 올라가고, 김장이 얼마 남지 않은 듯 배추와 무, 파가 빽빽하게 자라난 채소밭을 지나고, 군필자들에게는 무척 익숙한 예비군 훈련장 각개전투 교장을 지난다.

철조망도 있다. 날아오는 적군의 총알을 피해 등짝을 땅에 납작하게 붙이고 한 손으로는 철모를, 다른 한 손으로는 총을 잡은 채 두 다리를 버둥거리며 허우적허우적 지나가야 하는 철조망…. 군대 얘기만 나오면 눈이 반짝 빛나는 '대한민국 남자'들이 한마디 안 할 수 없다.

"야~ 철조망이 땅에서 붕~ 떠 있네. 엄청 떠 있구만. 철조망 통과는 날로 먹겠는데…."

아닌 게 아니라 철조망이 높긴 높았다. 그래도 얼핏 지나가는 내 눈은 움푹 파인 땅도 놓치지 않았다. 수많은 예비군들이 이곳을 등으로 쓸고 지나가며 땅이 움푹 파인 것이다. 그곳 흙은 젊은이들의 등짝에 달라붙어 그들의 삶의 무게를 더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바다처럼 넓은 낙동강 하구
 바다처럼 넓은 낙동강 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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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반, 시가지 반

예비군 훈련장을 지나온 낙동정맥은 이 또한 넓은 찻길로 변한 장림고개를 건넌 뒤 봉화대도 없는 봉화산을 지난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 감천만 바다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것이 눈의 즐거움이라면 솔잎이 수북이 쌓인 오솔길을 걸으며 솔향기를 듬뿍 들이마시는 호사를 코는 누린다. 이맘때쯤 오른쪽으로는 멀리 낙동강 하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낙동정맥은 구평가구단지를 지나며 이 집 저 집 가구점을 기웃거리다가 아미산 숲길로 들어선다. 아미산 정상에는 복원해 놓은 봉수대가 하나 서 있다. 너무 번듯하게 만들어 놓아 얼핏 보면 경주에 있는 첨성대 비슷한 모양새인데, 첨성대는 구멍이 중간에 뚫려 있고 봉수대는 아래 뚫려 있다는 것이 다를 뿐 아무래도 옛날 모습은 아닌 것 같아 씁쓸한 느낌까지 들 정도다.

서울을 향한 고속도로처럼 조선조 때 전국 각지 변방에서 한양을 향해 달려오던 봉수로는 모두 5개, 그 중 하나가 이곳 아미산에서 시작해 경주, 안동, 충주를 거쳐 한양 목멱산(지금의 남산) 봉수대에까지 이르렀다.

다대포해수욕장과 바다 쪽으로 길게 뻗은 몰운대
 다대포해수욕장과 바다 쪽으로 길게 뻗은 몰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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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산(155m)과 아미산(234m), 두 개의 야산을 가볍게 몸 풀 듯이 넘은 낙동정맥은 이제 아파트 단지를 저벅저벅 걸어간다. 아파트 단지나 도로에서는 앞서 지나간 선두대장이 방향을 표시하며 깔아 놓은 쪽지(일명 "깔지')를 잘 살펴보며 걸어야 한다. 자칫 방심하는 사이에 깔지를 놓치고 '알바'(다른 길로 들어가 헤매는 일)를 한 뒤 돈을 받기는커녕 지친 몸만 더 축내기 때문이다.

오른쪽으로 바다처럼 넓어진 낙동강 하구를 바라보며 걷노라면 아파트 숲이 끝나고 다대포해수욕장에 들어선다. 송창식의 <철 지난 바닷가>를 읊조리며 걸어 보는 다대포해수욕장….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가족끼리 연인끼리 거닐며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풍경은 바라보는 이의 마음도 덩달아 따뜻하게 만든다. 바닷가는 그 자체가 이미 낭만인 것 같다.

다대포해수욕장을 지나면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 몰운대가 나온다. 몰운대는 600년 전까지는 육지와 떨어진 몰운도라는 섬이었다가 파도에 밀려오는 모래가 쌓여 다대포와 연결되면서 이름도 몰운대로 바뀌었다.

산책로를 걸어 바닷가 끝에 이르면 군 초소가 나온다. 여기가 낙동정맥의 끝이다. 저만큼 쥐처럼 웅크리고 있는 쥐섬이 보이고 그 뒤로는 그야말로 망망대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낙동정맥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곳에서 바라본 풍경. 오른쪽에 있는 게 쥐섬.
 낙동정맥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오는 곳에서 바라본 풍경. 오른쪽에 있는 게 쥐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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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낙동정맥은 백두대간 피재에서 시작하여 몰운대까지 남진하는 방법도 있고, 반대로 몰운대에서 시작해 피재까지 북진하는 방법도 있다.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북진을 선호할 것 같고, 부울경(부산, 울산, 경남) 사람들이라면 남진을 더 좋아할 것 같다.

이유는 단 하나, 산행을 계속할수록 내가 사는 지역에 더 가까워진다는 심리적인 안정감이 있기 때문이다. 한 구간을 종주하면 그 거리만큼 '우리 집'과 더 가까워지니 버스를 타고 왕복하는 시간도 줄어들 테고, 산행도 그만큼 더 여유롭게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부산 괴정고개에서 1구간 산행을 시작해 낙동정맥의 끝, 몰운대까지 왔다, 다음번에는 괴정고개에서 시작해 북쪽으로 종주를 이어 갈 것이다. 비록 오늘은 고작 야산 두 개에 시가지만 실컷 걸었지만 산행을 거듭할수록 낙동정맥은 몸집이 더 커지고 그 본래의 장쾌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이 성경 구절을 참 좋아한다. 낙동정맥 종주도 그럴 것이고, 낙동정맥 산줄기를 따라한 가지씩 늘여 갈 내 결심도 그럴 것이다. 하나씩 마음을 다잡아 결심하고, 다부진 마음으로 그 결심을 실천해 나가며 조금씩 변해 가는 내 모습… 생각만 해도 참 즐겁고 행복해지기까지 한다. 나이 예순에도, 또 그 이후에도 사람은 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다.


태그:#낙동정맥, #삶의 변화,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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