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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말고사를 끝으로 종강을 맞은 시끌벅적한 대학가의 술집 사이로 정갈한 서체의 간판이 붙은 가게가 들어섰다. 자유를 만끽하는 젊음의 축배가 가득하고 흥을 돋우는 음악이 쿵쿵거리는 참살이길 한 편에 홀로 고요하게 빛난다.

참살이길의 가지 골목 중 하나에 자리 잡은, 흰 바탕에 정갈한 검은 붓글씨가 인상적인 작은 서점, '지식을 담다(아래 지담)'가 지난 23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일상공간으로 들어왔다.

서점 앞을 지나가는 학생들은 신기한 듯 기웃거렸다. 그 중 한명이었던 나는 용기 내어 문을 열고 들어섰다. 유달리 추웠던 겨울날이었기에, 안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진 따뜻한 공기가 괜스레 반가웠다. 뒤이어 들린 사장님의 살가운 인사에 답하고 앉으니, 포도주로 만든 따뜻한 음료인 뱅쇼를 내어 주셨다. 지담은 카페를 겸하는데, 뱅쇼나 한라봉차 등 소소한 주전부리를 즐길 수 있다. 처음이었지만, 마냥 따뜻하고 포근했다.

인문·사회과학 서점 '지담'만의 매력

서점 '지식을 담다'
 서점 '지식을 담다'
ⓒ 최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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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은 알맞은 크기의 바구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담해 보여서 책이 몇 권이나 있을까 의문이 드는 바깥과 달리 안으로 들어서면 꽤 큰 진열공간을 볼 수 있다. 지하까지 터서 만든 움푹 파인 공간 안에는 책들이 말 그대로 '담겨 있다'. 1층과 이어진 작은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면 나무 색으로 짜인 책장이 160cm 남짓한 내 키의 세 배 만큼이나 높게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키 큰 책장에 소담하게 진열된 책들은 구경꾼을 압도하지 않는다. 다만 가만히 구경꾼을 감싸 안고 조용히 책의 세계로 인도할 뿐이다. 작은 서점의 매력이다. 대형서점에서 종종 느끼는 책에 눌리는 느낌은 온 데 없다. 각자 다른 제목을 단 책들이 서로 간의 조화를 이루며 그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누구든지, 책 특유의 안락한 느낌에 매료될 것이다.

책을 고르다 보면 주인장의 세심함도 느껴진다. 이곳 책들은 사장님이 직접 읽어 보거나 추천을 받아 엄선해 가져다 놓은 것들이다. '태백산맥'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사장님은 가장 잘 보이는 칸에 태백산맥 10권을 가지런히 꽂아 놓았다. 이 시국에 잘 어울리는 각종 사회과학, 정치학 책들도 즐비하다.

뿐만 아니라, 책의 분류 역시 고민한 흔적이 그득하다. 소설, 산문, 시, 인문, 교양, 사회, 경제, 여성, 철학, 정치, 환경, 사회 등으로 분류되는 서점의 책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능한 다양한 각도에서 사회를 조명하고자 했다는 느낌이 뭉근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 드문드문 비어있는 책장이 여유롭다. 책에 지치면 잠시 쉬어도 된다는 표지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사장님은 앞으로 빈 곳들이 서서히 채워져 갈 것이라 말하니, 어떤 지식이 담길지 기대된다.

90학번 선배들의 합작품, "진짜 책 접하게 해주고 싶어서..."

그렇다면 의문이 들었다. 대학가는 상업화된 지 오래다. 이는 조금은 낙후됐다고 여겨지는 고대 앞도 별반 다르지 않다. 술집을 비롯한 온갖 자본주의 논리에 충실한 가게들만이 늘어선 참살이길에 누가, 왜 잘 팔리지도 않는 인문학 서적들을 진열해 놨을까.

아무리 요즘 독립서점이 인기라지만 안암동은 상수동이나 망원동처럼 요즘 말로 '힙'해서 분위기로 먹고 살 수 있는 곳도 아니다. 취업 준비에, 진로 걱정에 바쁜 대학생들에게 인문학은 사치가 된 지 꽤 오래됐다. 서점 사장님의 가계가 조금 걱정이 됐다.

하지만 이 서점은 일반 서점과 그 목적이 조금 다르다. 고려대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지식을 선물하기 위해서 안암동 한 편에 서점을 연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탐구하는 대학의, 그리고 대학생의 역할이 축소되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느낀 김준수(고려대 사회학과 90학번), 이동주(고려대 경영학과 90학번), 두 동문이 합심해 만들어낸 작품이다.

이들은 평소에도 고려대학교 주위에 번듯한 서점 하나 없다는 것에 많은 아쉬움을 느꼈다고 한다. 서점의 이동주 공동대표는 말한다.

"내 딸이 고려대 13학번이에요. 그런데 어느 날 딸이 그러더라고. 학교 주위에 책을 살 만한 곳이 없다고. 그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죠. 대학이라는 지식의 보고 옆에 번듯한 서점이 없다는 게. 나 학교 다닐 때는 그래도 작은 서점이 여러 개 있어서, 읽고 싶은 책도 구하고, 거기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죠. 그래서 나는 지금의 후배들에게도 이런 공간을 주고 싶었어요. 정말 좋은 책들을 쉽게 접할 수 있고 또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90학번인 이들이 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학교 주위에는 인문과학서적을 파는 여러 개의 작은 서점들이 있었다. 때문에 학생들은 본인의 취향에 맞는 인문학 서적을 찾아 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경대 후문 등지에서 학생들과 함께 일상을 호흡하던 각종 서점들은 2000년대 들어서 점차 그 자취를 감췄다. 물론 고려대 안에는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각종 전공서와 대중서를 파는 서점이 있다. 하지만 이 서점은 오롯이 책의 가치를 실현하는 곳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지식을 판다기보다는 편리를 파는 것에 불과하다.

이에 두 대표를 포함한 90학번 친구들은 십시일반 힘을 합쳐 학교 앞에 인문학 서적을 판매하는, 오롯이 책이 목적이 되는 그런 서점을 열었다. 이 대표는 '지담'을 통해 후배들이 '진짜 책'을 접했으면 하는 바람을 밝혔다.

"학생들이 전공서나, 수험서뿐만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는 진짜 책을 접할 기회를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나는 내 후배들이 스펙을 위한 공부에 함몰되어 자본주의가 바라는 이상적인 기계 부품으로 자라는 것이 아닌, 필요할 때는 반문하고 토론할 줄 아는 진정한 어른으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 답이 인문학, 사회과학 책 안에 있다고 믿어요. 피케티의 책, 유시민의 책에서 우리는 불평등한 현실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찾을 수 있어요. 그렇다면 내 현실에 대입해, 더 나은 삶을 추구할 수 있겠죠"

진리에 대한 열망 담아낼 수 있기를...

이 같은 그의 후배사랑이 반영돼, 서가로 내려가는 계단 바로 옆에는 '선배들이 추천하는 책' 코너가 마련됐다. 이 점은 다른 독립 서점이나 인문·사회과학 서점과는 차별화된 부분이다. 선배들은 손때 묻은 본인의 책을 직접 선정하고 기부하며 후배들은 이 책을 시중가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게 된다. 한 공간에서 두 세대가 책으로 소통하다니, 꽤나 낭만적이지 않은가.

고려대학교는 자유, 정의, 진리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 교훈으로 정했다. 적어도 이 학교를 졸업한 학생이라면 자유로운 생각과, 정의로운 행동,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참된 진리를 발견해야 한다. 그것이 지난 시간 동안 선배에서 후배로, 또 다른 선배에서 후배로 계승된 고려대학교를 비롯한 이 시대 대학의 진정한 역할일 것이므로. 지담을 만든 선배들도 후배들에게 이 같은 가치를 전달하고자 함일 것이다.

나는 그런 선배들을 믿고, 또 우리 대학생들을 믿는다. 여전히 진리를 추구하고 공부하고자 하는 욕구가 남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담은 그런 우리의 열망을 담아내는 곳이 되길 바란다. 이 대표 역시 지금의 대학생 후배들에게서 희망을 봤다.

"책을 읽지 않는 세대라고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대학생들이 이렇게나 촛불로 모이고, 목소리를 내고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은 그들만의 진리를 탐구하고 있고, 진정한 지식을 담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렇기에 저는 우리 가게가 조그마한 도움이 될 것을 믿습니다."

한편, 개업 첫날, 이 공간을 찾은 임지우(고려대 기계공학과 15학번)씨는 "과거 선배들로부터 전해 듣기를, 이런 사회과학 서점이 학생들 간의 토론장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곳, 지담이 앞으로 우리 학생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더 많은 지식을 쌓을 수 있는 하나의 공론장이 되기를 바란다"며 소감을 전했다.


태그:#고대, #지담, #인문사회서점, #고려대, #지식을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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