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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황제’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웅장한 빌더케제((wilder kaser) 산과 초지
▲ 빌더 케제산 ‘거친 황제’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웅장한 빌더케제((wilder kaser) 산과 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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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금을 받아서 개조한 건물이라고요? 유럽에서는 가공장 등 시설을 짓는 건 축사 정도 말고는 농업보조금 지원제도가 따로 없다고 들었는데 그게 아니네요."

설명을 더 듣고 보니 오해가 풀린다. 정부의 보조금을 받은 게 아니라 특별히 유네스코(UNESCO)의 지원을 받은 것이다. 물론 농업의 부가가치를 높여 소득을 보전하라는 게 근본적 지원목적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오히려 500년된 농가주택 문화유산을 잘 보전하라는 의미가 더 크게 들린다.

알프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에서도 유난히 험해 '거친 황제'라는 이름이 붙은 빌더케제(wilder käser)산. 그 산 아래 빌더케제(wilder käser) 유기농 치즈공방·직판장(tiroler schukäserei)이 마치 고풍스런 갤러리 같은 외관을 하고 있다.

농촌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중세와 현대가 조화된 세련된 건물이다. 아니나다를까 EU, UNESCO가 농민의 기초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건축비를 지원한 이채로운 건축물이다. 오스트리아 티롤 키르히도르프(kirchdorf), 전형적인 초원 한 가운데 위치한 티롤 지방 전통 가옥으로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무려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살아 숨쉬는 농촌문화유산이다.

그렇다고 유네스코가 박물관이나 전시관 같은 관광객들의 구경거리나 짓자고 돈을 투자한 건 아니다. 오히려 문화적인 목적보다는 경제적인 목적이 더 크다. 지역 낙농가들의 유력한 소득원으로서 치즈공방이자 직판장으로 재생,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점은 티롤 지방의 500여 지역 낙농가들이 협력해서 공동으로 운영한다는 것. 일종의 공동가공 및 공동판매를 위한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한다. 저부가의 1차 농산물이 우유만으로 농가의 채산성이 맞지 않아 부가가치를 높이려면 가공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가공, 직판, 농촌관광을 함께 영위하는 티롤특산 치즈 테마 복합체험관이라 설명할 수 있다.

온갖 알프스 산약초로 키운 소의 우유는 값이 2배

UNESCO의 지원으로 500년 된 농가주택을 개조한 빌더케제 유기농 치즈공방
▲ 빌더케제 공방 UNESCO의 지원으로 500년 된 농가주택을 개조한 빌더케제 유기농 치즈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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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더케제 치즈공방에서 가공하는 우유는 100% 지역농가로부터 공급받는다. 500여 지역농가가 3만 헥타르의 광활한 고산 초지에서 1만 3000여 마리의 젖소를 자연상태로 방목해 키운다. 소 한 마리당 2헥타르가 넘는 자연운동장에서 자유롭게 뛰놀면서 건강하게 자란다.

그런데 겨울이 긴 알프스 자락에서 풀이 자라는 시기는 고작 4개월뿐이다. 5월부터 9월까지 농장 초지의 풀을 베어 겨울 양식인 건초를 준비한다. 그렇게 해도 농장 초지로는 사료 대신 먹일 풀이 늘 모자란다. 그래서 어린 소, 젖을 짜지 않는 소들은 120여 일 동안 고산지대 야생으로 올려보낸다. 일종의 자연순환 축산농법으로 방사하는 것이다.

5월쯤 산으로 올라가 여름을 지내고 9월 말쯤 마을로 하산한다. 이때 오스트리아 전통 의상을 갖춰 입은 목동들이 소 떼를 몰고 내려오면서 한바탕 마을 잔치가 열린다. "험한 산에서 잘 자라준 소들도 수고했고, 소들을 먹여 키운 자연에 감사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알프스의 온갖 산약초를 먹고 자란 소는 최고의 품질을 보장하는 우유를 생산한다. 빌더케제 치즈가공장에서는 사료를 주로 먹은 소가 생산하는 우윳값의 2배에 가까운 1리터당 55센트에 우유를 구매한다. 하루 평균 1200리터의 우유를 집유해 700여 개의 까망베르 치즈로 가공한다.

이렇게 가공하면 우유 원물 상태로는 고작 80만 원에 불과한 수입이지만, 치즈로 가공하면 350만 원가량의 고부가 소득이 창출된다. 1차 농산물을 가공한 2차 농식품이 농가 소득 보전 및 제고의 실질적인 해법이 될 수 있음을 실증하는 생생한 현장이다. 

5월에서 9월까지 알프스 고지대의 온갖 산약초를 먹고 자라는 자연방목 소떼의 하산축제
▲ 알프스 소 5월에서 9월까지 알프스 고지대의 온갖 산약초를 먹고 자라는 자연방목 소떼의 하산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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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더케제 치즈가공장에서는 모두 20여 가지의 치즈를 생산한다. 대표 상품 '알펜-벨치케제'는 2013년 오스트리아 치즈경진대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명품치즈로 전국에서 찾아온다. 치즈공방 사업장은 부부가 맡아 운영한다. 치즈가공 마이스터인 남편이 가공장을 맡아 치즈를 생산하면 부인은 직판장에서 내방객들에게만 직거래로 치즈를 판매한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최고의 명품 치즈를 만드는 농가들이 모였어도 농사만으로는 넉넉하게 먹고사는 농가경제 구조는 역시 아닌 듯하다. 1차 농업 생산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운 농민들은 2차 농식품 가공, 3차 농가 민박 등도 겸업해 부족한 수입을 보충한다. 특히 전통 농촌문화가 살아있고 천혜의 청정한 자연환경이 보전돼있는 티롤지방의 농가는 휴양객들은 위한 농박이 주요 수입원이다.

그런데 농가 민박을 하더라도 큰돈을 벌 수 없다. 욕심을 내지 못하게 하는 규정이 있다. 농박을 통한 연간 소득이 3000유로를 넘으면 안 된다. 미리 정해놓은 이 기준을 넘으면 농민이 아니라 숙박업자나 식당업자로 분류된다. 사업자나 장사꾼 취급을 받게되는 것이다. 농민으로서 세제 혜택을 받는 건 고사하고 오히려 사업자로 분류돼 세금만 더 내야 한다.

농민을 위한답시고 농민이라고 무조건, 더 우대해주지는 않는다는 게 오스트리아 농정의 기조이자 원칙이다. 한국처럼 '돈 버는 농업'을 부추기며 억대 농부가 될 수 있다며 선동하거나 겁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소수의 경쟁력 있는 스타 농민을 키우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농민이 농업을 포기하지 않고 농촌에서 능히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도다. 농민들도 다른 직업으로 먹고사는 일반 국민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맞춰주려 노력할 뿐이다.

국민들과 동등한 생활을 위해 '농민직불금'을 

치즈마이스터가 오스트리아 최고의 명품 치즈를 생산하는 치즈가공장
▲ 가공장 치즈마이스터가 오스트리아 최고의 명품 치즈를 생산하는 치즈가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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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정부는 일반 국민들과 동등한 농민 생활을 위해 직불금으로 농가 소득을 보전해준다. 농촌에서 떠나지 않도록 부족한 생활비를 국가와 정부가 채워주는 셈이다. 기본적으로 농지 1헥타르당 160유로의 직불금이 지급된다. 고산지는 일반적으로 500유로가 지급되는데 산세가 험한 대표적인 조건 불리 지역인 티롤 지방은 800유로를 지급한다. 자연과 기후를 보호하기 위해 소를 자연방목해서 키우면 소 한 마리 당 직불금을 따로 더 지급한다.

이러한 직불금으로 상징되는 오스트리아, 독일 등의 농업정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1999년 합의된 EU의 농업개혁(Agenda 2000)이다. 이때 직접지불에 의한 부분적 보상, 환경정책의 EU 공동농업정책 통합, 농업의 다원적 기능 접근방식에 의한 농촌개발 등을 농정의 기본원칙으로 정했던 것이다.

연수단 가이드인 독일교포 박동수씨의 설명에 따르면, 2010년을 기준으로 보면, EU의 총예산 1,229억 유로 가운데 농가지원 예산은 571억 유로에 달해 전체 예산에서 가장 비중이 큰 46.5%를 차지하고 있다. 농가지원 예산 가운데 76%에 달하는 437억 유로가 직불금으로 농가에 직접 지원되는 예산으로 편성할 정도다. 곧 직불금이 유럽연합의 농업정책을 가동하는 핵심엔진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지원내용을 보면, 독일의 소농 약 19만 농가들은 연평균 1,590 유로를 직불금으로 지원받는다. 총 3억 유로에 달하는 예산이다. 하지만 전체 농가의 1.5% 정도인 대농 5,690농가는 농가당 연평균 283,105 유로를 지원 받는다. 총 16억 유로 정도이다. 기본적으로 농지 1 헥타르 당 340 유로를 지급받는 꼴이다.

농민들이 사업 기회를 공유하는 지역공동시설을

 치즈마이스터의 부인이 운영하는 직판장
▲ 직판장 치즈마이스터의 부인이 운영하는 직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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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빌더 케제 공동가공장 같은 시설이 있다. 완주군은 로컬푸드 가공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자체 시설을 보유하고 운영하기 어려운 지역의 소농들이 농식품 가공을 위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유시설이다. 완주군에서 사업비 12억 원을 지원했다.

구이면에 자리 잡은 2호 센터는 495㎡ 규모로, 다양한 품종의 지역농산물 제철 가공이 가능하도록 교육실습실, 반찬가공실, 습식가공실, 건식가공실, 냉장보관실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품목·형태별로 생산 장비를 구비, 구이·이서·상관 지역의 농민들은 생산한 지역농산물을 다양한 로컬푸드 가공식품으로 개발할 수 있다.

아울러 거점가공센터에서는 농식품 가공창업 아카데미 교육도 시행된다. 약 4개월의 과정으로 반찬가공반, 습식가공반, 건식가공반, 소이푸드가공반 등 4개 과정으로 운영된다. 무엇보다 이 거점자공센터의 기대효과는 농민들이 개별적으로 따로 농식품 가공사업 허가를 받거나, 시설 설치비 등 사업비를 따로 투자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충남도는 '농산물 공동 가공센터 구축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농산물 공동가공센터 구축․운영, 창업보육지원 사업, 연계시설인 체험장 및 판매장 등 운영을 지원하고 있다. 이로써 농식품 가공기술 또는 아이디어가 있지만 가공시설을 자체적으로 갖추지 못한 농민들이 가공식품 시제품, 판매용 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지원 대상자는 생산자 단체가 포함된 사업단으로 법인 또는 협동조합과 5개 이상의 작목반, 그리고 농업인 150명이 참여해야 한다.

농식품부도농민들이 농식품 가공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시설 디렉터리 구축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어차피 6차 산업화를 제대로 수행하려면 제조·가공시설이 필수적인데 사업자마다 새로운 시설을 설치하기보다는 기존에 설치된 시설을 활용하는 게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라는 계산이다. 지역별로 기존의 종합 또는 거점가공지원센터는 물론 지역에 산재되어 유휴화된 각종 제조·가공시설을 6차산업화 사업주체들이 활용하도록 지원하려는 것이다.

빌더케제 공동가공.직판장은 농민들이 협동해서 공동으로 가공하고 직판하면 소득과 부가가치가 높아지는 실증 사례
▲ 빌더케제 빌더케제 공동가공.직판장은 농민들이 협동해서 공동으로 가공하고 직판하면 소득과 부가가치가 높아지는 실증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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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독일의 농부’ : 문화경관 직불금, 농업회의소, 협동조합, 가족농가, 유기농업, 사회안전망 등으로 국가와 정부의 돌봄과 보살핌을 받으며, ‘돈 버는 농업’이 아닌 ‘사람 사는 농촌’을 위한 ‘농부의 나라’를 지키며 살아가는 독일, 오스트리아 등 EU(유럽연합)의 ‘행복한 사회적 농부’ 이야기



태그:#오스트리아 , #치즈, #농가, #직불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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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詩人(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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