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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광성보(廣城堡)에 봄빛이 완연합니다. 광성보 문루인 안해루(按海樓)에서 시작되는 소나무길이 호젓합니다. 잘 닦여진 산책길은 걷기에 참 좋습니다. 우리 일행은 뒷짐을 지고 바쁠 것도 없는 걸음으로 천천히 걷습니다.

광성돈대. 광성보 안에 있는 돈대로 홍이포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광성돈대. 광성보 안에 있는 돈대로 홍이포가 복원되어 있습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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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의 용맹스런 전사들

광성보(사적 제227호)는 강화해협을 지키는 천혜의 요새입니다. 광성보에는 구한말 신미양요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1871년(고종 8년),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제독은 5척의 함대와 수십 문의 대포와 함께 1200명의 정예 병력을 이끌고 강화해협을 기습 침입하였습니다. 이를 지키기 위해 어재연 장군이 거느린 600여명의 우리 군사는 이곳에서 배수의 진을 쳤습니다.

어재연 장군과 휘하 병사들은 수륙양면작전을 전개하며 침입한 미국과 열약한 무기로 맞닥뜨렸습니다. 병력과 화력면에서 상대가 될 수 없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급기야 무기가 떨어지자 육박전에 돌입하고, 수많은 병사들이 장렬한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조선후기 우국지사 매천 황현(1855~1910) 선생은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칼을 들고 싸우다가 칼이 부러지자 납으로 된 탄환을 적에게 던지며 싸웠으며, 적의 창에 난자되고 머리를 베어갔다.'

우리 수비군의 우국충정 기상과 그 당시 전투상황이 처참하였음을 절절히 표현한 것 같습니다.

또한 미국 해군전사에는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48시간의 짧은 전쟁이었다.'면서 '비록 승리했다고 할 수는 있을지라도 이를 자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당시 광성보에서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였으며, 어재연 장군이 이끈 수비군이 얼마나 용맹하였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 수비군은 탄약이 바닥나자 돌을 던지며 저항하고, 급기야 더 싸울 수 없게 된 병사들은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결하거나 바다로 뛰어들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기개에 숙연한 마음이 듭니다.

신미양요 때 숨을 거둔 무명용사들은 신원을 알 수 없어 7기의 분묘에 합장하여 나눠 묻었습니다. 광성보에는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이라는 7기의 무덤이 있습니다.

또,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辛未洋擾殉國無名勇士碑)를 세워 당시 순국한 용사들의 넋을 달래고 있습니다. 비문 뒷면에는 한글로 신비양요가 일어났던 당시 우리 수비군의 활약상을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들과 함께 온 부부가 비문을 찬찬히 읽어가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아빠, 그 당시 미군은 왜 우리나라를 침범했지요?"
"너,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어?"
"역사시간에 들어보기는 한 것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어요."
"그 사건을 알아야 신미양요 때 미국이 우리를 침략한 이유를 알지!"

아빠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설명을 나도 따라 듣습니다. 아빠는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천주교 박해를 하던 1866년(고종 3년), 프랑스 함대의 침략이 있기 직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평양 군민들의 공격을 받은 배는 불태워졌습니다. 이른바 제너럴 셔먼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이 있은 뒤로 미국은 조선에 대해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고, 통상조약 수립을 요구할 목적으로 침략한 것이 바로 신미양요의 발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미양요로 인해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흥선대원군은 전국의 각 지역에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아니하면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이라는 척화비를 세워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광성보 쌍충비각에는 우국충정의 넋이 있다

광성보 쌍충비각입니다. 비각 안에 어재연장군 형제의 순절을 기념하는 비와 광성파수순절비가 있습니다.
 광성보 쌍충비각입니다. 비각 안에 어재연장군 형제의 순절을 기념하는 비와 광성파수순절비가 있습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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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는 가족끼리 소풍삼아 오면 딱 좋은 곳입니다. 너른 잔디밭과 아름드리 수목은 공원처럼 아름답습니다. 문화재 탐방으로 역사공부도 하고, 강화해협의 넘실대는 바닷바람을 쐬고 있으면 가슴이 확 트입니다.

처음 만나는 광성돈대에서 호젓한 길을 따라 가면 나지막한 언덕 위에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와 쌍충비각(雙忠碑閣)이 있습니다.

쌍충비각에는 신미양요 때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의 순절을 기념하는 비와 함께 당시 순국한 장병들의 충절을 기리는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가 있습니다.

어재연, 어재순 형제를 기린 문구를 해석해보면,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순국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凜乎忠勇(름호충용) 日月光輝(일월광휘) 兄弟賓從(형제빈종) 視死如歸(시사여귀)
'늠름한 충성과 용맹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형제가 서로 뒤따라서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 같이 하였네.'

兄死於國(형사어국) 弟死於兄(제사어형) 一門忠友(일문충우) 百世風聲(백세풍성)
'형은 나라 위해 죽고 아우는 형을 위해 죽으니, 한 가문의 충성과 우애, 오랜 세대를 두고 이를 날리리라.'

광성파수순절비에는 본영 천총(千摠) 김현경과 본진 별장(別將) 박치성의 추모 시문이 있고, 뒷면에는 전사한 병사 49명의 명단이 있는데, 마지막 구절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半百武士(반백무사) 一心殉國(일심순국) 危忠卓節(위충탁절) 千秋不泐(천추불륵)
'반백의 무사가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높은 충성 높은 지조와 절개를 긴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 없으리.'

쌍충비각 호젓한 산책로에 까치가 주위를 맴돕니다.
 쌍충비각 호젓한 산책로에 까치가 주위를 맴돕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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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충비각을 들여다보며 신미양요의 아픈 역사를 되새기고 있는데, 까치 한 마리가 비각 주위를 맴돕니다.

함께 온 일행들이 쌍충비각 처마 밑을 올려다보며 수상쩍은 말을 주고받습니다.

"아니, 까치도 처마 밑에다 집을 짓나?"
"뭔 소리여! 까지가 집을 짓다니!"
"저기 비각 처마를 보라구! 까치집을 짓잖아요!"
"그러게! 아까 본 까치 녀석이 짓는 걸까?"

쌍충비각 처마밑에 까치집으로 보이는 새집이 보입니다.
 쌍충비각 처마밑에 까치집으로 보이는 새집이 보입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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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처음에는 제비집인가 했는데, 제비집과는 다릅니다. 얼기설기 나뭇가지가 엮여 있는 것을 보니 까치집 같아 보입니다. 까치는 보통 높은 나무 꼭대기에 집을 짓는데, 처마 밑에 까치집이라니! 예사스럽지가 않습니다. 날짐승의 집짓기에 방해가 될까 우리는 슬그머니 자리를 떴습니다.

손돌목돈대입니다. 광성보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손돌목돈대입니다. 광성보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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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머리처럼 돌출된 해안가에 용두돈대가 있습니다.
 용의 머리처럼 돌출된 해안가에 용두돈대가 있습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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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광성보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손돌목돈대를 돌아 용의 머리처럼 돌출된 용두돈대에 다다랐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치를 떨었을 신미양요 무명용사들의 절규가 용두돈대 앞 거친 물살에 실려서 들리는 듯싶습니다.

한미동맹이 체결된 지 60년이 넘었습니다. 우리는 국가안보를 위해 한미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미국의 침략으로 이곳 광성보에서 발생한 신미양요의 슬프고도 아픈 역사는 잊지말아야 할 것입니다.

용두돈대 앞 강화해협의 모습. 이곳을 '손돌목'이라고 부르며 거친 물살이 흐르고 있습니다.
 용두돈대 앞 강화해협의 모습. 이곳을 '손돌목'이라고 부르며 거친 물살이 흐르고 있습니다.
ⓒ 전갑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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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신미양요, #광성보, #쌍충비각, #어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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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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