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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있어 누군가의 해석을 진리처럼 받아들일 경우엔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기록에 의지하는 역사 해석은 고고학적 발견 등으로 언제든지 해석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역사 해석은 잠정적 최종성을 가질 뿐이다. 그러나 역사를 대하는 일반의 자세는 최근 스타 강사 설민석이 일으킨 민족대표 33인 폄훼 논란에서처럼 해석의 일방성을 추종하려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다. 추종자들이 많을수록 그간의 해석을 뒤집거나 뛰어넘는 꼴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면에서 해석에 대한 열린 자세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한민국에서 로마 역사 읽기를 유행시킨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역사 해석이 유명 작가에 의해 어떻게 일방성을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시오노 나나미는 전체 15권 중 4~5권을 카이사르라는 제목으로 내놓고도 모자라 1에서 15권을 관통하며 카이사르에 대한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카이사르의 남성성에 대한 상찬과 정복자·강대국 중심, 일신교에 대한 강한 반감 등은 시오노 나나미의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에서 비롯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여과 없이 드러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큰 비판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한국사회가 미처 그의 극우성향과 엘리트주의를 간파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역사를 이야기로 엮어 감칠 맛나게 전달하는 역량이 탁월했기 때문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사료의 한계를 문학적 상상력으로 상쇄시켜 버렸다. <로마인 이야기>가 전문 역사서가 아님에도 역사서처럼 알려진 이유가 거기에 있다.

루비콘을 건너기 전 카이사르가 보인 위선

<루비콘> 톰 홀랜드 지음, 김병화 옮김
 <루비콘> 톰 홀랜드 지음, 김병화 옮김
ⓒ 책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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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콘>은 소설과 역사서 분야에서 많은 책을 집필한 영국 작가 톰 홀랜드(Tom Holland)의 작품이다. 이 책은 로마 공화정이 로마 제국으로 바뀌는 시기의 약 100년간을 무대로 삼아, 공화정이 죽어가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다.

저자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로마 공화국 최후의 날들'을 기록하면서 카이사르를 중심에 놓지 않는다. 비록 책 제목을 그 유명한 '루비콘'으로 정했으면서도 "주사위는 던져졌다"와 같은 카이사르가 남긴 말들에 기대지 않았다.

숱한 역사서들이 언급하는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는 식으로 루비콘 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던 카이사르의 변명을 날것으로 전달하려 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저자는 잔혹한 정복자의 위선적인 면을 부각시켰다.

"카이사르 본인은 부하들이 진용을 갖추는 동안, 오후에는 목욕을 하고 잔치에 참가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마치 온 세상에 자기가 신경 쓸 일이 전혀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저녁이 되어서야 그는 긴 의자에서 일어나서 어둠을 타고 지름길로 서둘러 달려가서 루비콘 강둑에서 마침내 자기 군대를 따라잡았다." - 398p.

독재자의 냉혹함을 전달하는 저자는 결코 카이사르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로마 경계인 루비콘 강을 건넌다는 것은 사실상 내전을 뜻했다. 로마 입장에서는 침략군이나 다름없었다. 본국에 들어올 때는 무장해제해야 함에도 카이사르와 그의 군단은 완전무장 상태였다. 그래서 카이사르의 진군 소식에 키케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게 로마의 장군인가, 아니면 한니발인가?"- 400p.

저자는 동족이 동족을 죽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목전에 두고도 카이사르가 너무나 태평한 일상을 즐겼다는 사실을 고발했다. '460년에 걸친 자유 공화국'에 종말을 가져온 존재는 그렇게 주사위를 던졌다고. 두려움과 함께 경멸을 담았던 키케로의 단발마적 외침은 카이사르에 대한 당대 공화파의 인식을 명확하게 드러냈다.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넘으로써 한 시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때는 지중해 전역에 자유도시가 흩어져 있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의 자유도시 주민은 자신을 파라오 또는 왕 중의 왕에게 예속된 신민이 아니라 시민이라 여겼고 노예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자유 연설, 사유재산, 법 앞에서의 권리 등으로 대변되는 자신들의 가치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그 후계자들의 제국이, 그 다음에는 로마 제국이 세워지면서 그런 시민의 독립성은 억압되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오직 하나의 자유 도시만이 남아 있었는데 그것이 로마였다. 그러다가 카이사르가 루비콘을 건넜고, 공화국은 결국 파괴되었다." - 10p.

로마는 폭군에 대한 적대적 정서가 일상화된 국가였다. 원정군 사령관으로서 본국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온 위대한 장군이라 해도 정해진 임기가 끝나면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들이 대중의 인기를 등에 업고 왕이 되려 한다면 그것은 반역이었다.

원로원은 모든 직위를 내려놓고 무장해제하여 로마로 복귀한 장군들을 공격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반역의 기운을 막겠다는 명분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프랑스 지역인 갈리아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로마 재정에 크게 기여한 카이사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로마인에게 지나친 업적은 축하할 이유뿐만이 아니라 경계할 이유도 될 수 있다. 공화국의 한 시민이 동료 시민들을 영원히 초라하게 만들게 내버려두면 안 된다." - 9p.

톰 홀랜드가 내세운 주인공은 승리자이자 정복자인 카이사르가 아니라 로마 공화정 시민이었다. 원로원이 카이사르에게 경계의 눈길을 건넨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처럼 저자는 시민이 변화하는 모습을 통해 로마 공화정 역사를 조망하며 시오노 나나미와 결이 다른 로마 이야기를 전한다.

공화정 자체와 시민에게 주목한다. 그것은 영웅 중심의 이야기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생소하면서도 배워야 하는 관점이다. 무엇보다 '한 시민'을 초라하게 내버려두면 안 된다고 했던 로마인들의 사고는 '시민주권'을 외치는 오늘날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건국 이후 몇 백 년 동안 공화국은 더 많은 사회적 격변과 시민 대다수의 시민권 확대 요구, 헌법 개혁이 계속 일어남에 따라 거듭 고통을 겪었다. 그런데도 이런 격변을 내내 겪으면서도 로마인들은 체제 변경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반감을 드러냈다. 공화국의 시민들이 보기에, 새로운 것은 불길한 의미를 담고 있다." - 26p.

저자가 공화국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해서 로마 공화정이 최고라는 것은 아니다. 로마 공화정은 카이사르 이전에 이미 이탈리아 전역을 점령했다는 면에서 제국이었다. 로마인이 생각하는 자유는 침략과 약탈로 얻은 열매였다는 점에서 공화국을 이상화하는 것은 분명히 경계해야 한다.

"공화국의 거점인 로마에서 정치는 전염성이 강했다. 반면 정복된 도시에서는 선거가 무용지물이었다. 다른 사회에서 정치 생활을 거세해버린 로마는 이제 세계적 야망과 꿈이 발휘되는 최고의 무대가 되었다." - 39p.

로마에서 시민은 역동성 그 자체다. 문제는 사회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었던 그들은, 사회변혁 그 자체보다는 거기에서 뭔가 이익을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는 점이다. 이익만을 추구하는 시민은 사회변혁의 동력이 아니라 반동이 되고 만다.

로마의 경험은 오늘날 촛불혁명으로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높아진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촛불이 이룬 업적을 자신들의 정치적 입신양명의 기회로 삼으려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반민주세력과 다를 바 없다.

"승리를 거둔 바로 그 순간 평민들은 자기들의 혁명적 동력을 파괴해버렸다. 기원전 367년에 평민들의 발전을 제약하던 법률적 제약이 철폐되자 부유한 평민들이 빈민들 편을 들어주어야 할 동기가 사라졌다." -53p.

혹자는 로마가 용광로처럼 엄청난 포용성을 지닌 것처럼 말하지만, 제국주의적 세계관이 지배했을 뿐이다. 그것은 정복자와 피정복자, 시민과 노예의 이분법적 세계관이었다.

"로마는 언제나 다양한 과거와 출신을 가진 사람이 로마인이 되고 로마의 가치와 신념을 공유하는 것을 허용했다. 물론 그런 가치 중의 으뜸이 비로마인에 대한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경멸이라는 사실은 아니러니였다." -87p.

로마인들은 영광을 기억에 새겼다. '자유 시민'이라는 자긍심을 가진 "어떤 시민도 노예가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이것은 로마 역사에 피로 새겨진 진실이었다." 심지어 로마인은 다른 사람에게서 호의를 받는다는 것을 고통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무력으로 법을 이겼다. 폭력이 지배하는 공화국은 도저히 공화국이라 할 수 없다.

"로마인이라면 자기가 이집트인이나 갈리아인이라고 상상할 가능성보다도 공화국이 몰락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더 어려웠다. 이들은 신들의 분노를 두려워했을지는 몰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을 두려워할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다." - 385p.

카이사르는 공화국을 무너뜨렸다.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에게 쏠린 의심을 걷어버리려면 정책보다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양한 술수로 시민의 환심을 샀다. 그는 황제가 아닌 시민들이 직접 통치하는 공화국의 '제1시민'을 자처했다. 카이사르는 오늘날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인들의 대 선배격이다. 포장된 이미지를 비판 없이 소비하는 시민은 로마 역사에 새겨진 진실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로마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가는 길을 연 카이사르는 승자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영국을 위시한 서구 역사학자들이 의존해온 사료는 공화정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쓰인 것이 태반이다. 카이사르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며 로마 공화정을 이상화하는 학자들이 주류를 형성하였다.

반면 한국에서는 시민과 공화정에 주목하는 관점이 생소하다. 어쩌면 한국 독자들은 강자·승자 중심의 서술에 지나치게 익숙하기 때문에 그럴지 모른다. 시민보다는 국가를 우선하는 사회에 너무 길들여져 왔기에 개혁형 폭군을 지향했던 카이사르를 영웅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그는 전쟁을 통해 국민에게 승리를 가져다주고, 법과 제도 등을 개선하여 국가 개조를 시도했다. 더불어 법과 시민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 권력을 추구했다. 카이사르는 공화국을 무너뜨린 자이면서도 큰 영광을 누렸다. 독재자들이 추앙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다.

독재자에 대한 향수가 있는 나라에서 시민과 공화정 중심의 서술은 어색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는 영웅적 서사만을 역사기술의 진리로 알고 있던 것이 개발독재, 군사독재를 했던 전직 대통령들의 치부를 가리려는 의도는 없었는지 살펴야 할 때다. <루비콘>은 승자 독식의 관점을 교정하는 데 도움이 되어 줄 거다.


루비콘 -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로마 공화국 최후의 날들

톰 홀랜드 지음, 김병화 옮김, 책과함께(2017)


태그:#루비콘, #톰 홀랜드, #카이사르, #로마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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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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