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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자리에 서서 심부름꾼이 되겠노라 하고 밝히는 분들은 으레 '서민 대통령'이나 '서민 군수' 같은 이름을 쓰곤 합니다. 이분들 스스로 '서민 눈높이'에 서서 '서민 마음을 살피는' 심부름꾼이 되겠다는 뜻일 테지요.

그런데 이제까지 치른 선거를 살피면, 스스로 '서민'이라고 밝힌 분들 가운데 옥탑방이나 반지하를 모르는 분이 있어요. 버스삯을 모르는 분이 있고, '서민 물건값'을 도무지 모르는 분이 있어요. 설거지를 해 본 적이 없다든지, 손수 밥을 지어 보거나 아이를 보살핀 일이 없는 분마저 있어요.

이런 모습이나 얼거리라면 그분들 스스로 밝히는 '서민'이란 어떤 사람인지 알쏭달쏭해요. 막상 서민을 모르고 서민하고는 동떨어진 채 살면서 '서민 살림'을 살리려는 정책을 어떻게 펼 만할는지 아리송하기도 해요. 스스로 서민으로 살아내지 않으면서 서민 눈높이에 설 수 없는 노릇이라고 느껴요.

겉그림
 겉그림
ⓒ 철수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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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에는 장독대가 있어요. 장독대는 간장, 된장, 고추장 독을 놓아두는 곳이에요. 예전에는 집집마다 장독대가 있었어요. 요즘에는 장독대가 없는 곳이 많아요. 하지만 우리 학교에는 장독대가 있답니다. (4∼5쪽)

새로 대통령이 되는 분한테 그림책 한 권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 그림책을 제가 한 권 더 장만해서 선물해도 좋을 테지만, 대통령으로 뽑힌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그림책 한 권 장만해 보시기를 바라요. 새로 한 나라를 이끌 분이라면 '서민살이'를 할 줄 아는 분이면서 '책 읽는 일꾼'이 되기를 바라요.

새로 대통령이 되는 분한테 들려주고 싶은 그림책은, 아니 함께 읽고 싶은 그림책은, <우리 학교 장독대>(철수와영희 펴냄)입니다. 남북 평화라든지, 사드 미사일이라든지, 빈부 격차라든지, 비정규직이라든지, 젊은 일자리라든지, 이런저런 굵직한 일이 많은데 웬 뜬금없는 '학교 장독대'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느냐고 여기실 수 있어요. 그럴 만하지요.

자, 그러면 한번 여쭐게요. 오늘 아침은 무엇을 드셨나요? 오늘 낮이나 저녁에는 어떤 밥을 드시려나요? 하루 세 끼니 가운데 된장이나 간장이나 고추장이 하나도 없는 밥차림이 있을까요? 빵이나 국수로 끼니를 삼는다면 된장·간장·고추장 없는 상차림이 되겠지요. 그러나 한국사람으로서 상차림에서 된장·간장·고추장은 빠질 수 없어요. 청와대이건 공공기관이건 여느 회사이건 여느 장삿집이건, 또 수많은 '서민 보금자리'에서까지 된장·간장·고추장은 둘도 셋도 넷도 없는 '밥상벗'입니다.

장은 누구나 담글 수 있고요. 우리 밥상에 빠지지 않는 중요한 음식이에요. 장 담그기는 다들 어렵게 생각하지만 라면 끓이기보다 쉬워요. (9쪽)

속그림. 장 담그기를 배우는 어린이
 속그림. 장 담그기를 배우는 어린이
ⓒ 철수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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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우리 학교 장독대>는 '누구나 담글 수 있는 장'을 이야기합니다. 어린이도 얼마든지 된장·간장·고추장을 담글 수 있다고 이끌어요. 이 책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분도 손수 된장·간장·고추장을 담갔다고 해요. 더욱이 이 책을 펴낸 출판사 대표(1인 출판사입니다)도 집에서 손수 된장·간장·고추장을 담갔다지요. 마흔 해가 훨씬 넘도록 '엄마 된장'만 먹던 분들이 마흔 살 훌쩍 넘은 나이에 처음으로 '내 손 된장'을 담가서 아주 맛나게 훌륭하게 즐겁게 멋지게 누렸다고 해요.

"준비물이 이게 다예요?" "네 가지만 있으면 장을 담글 수 있는 거예요?" 그럼요! 콩으로 만든 메주와 소금, 물, 그릭고 그릇인 장독만 있으면 되지요. "우리가 담가도 맛이 좋아요?" 할머니와 엄마가 담근 것보다 맛이 없을 수도 있어요. 할머니나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장을 담그신다면 우리는 두 번째로 맛있는 장을 담가 봅시다. (15쪽)

속그림. 라면 끓이기보다 쉬운 장 담그기!
 속그림. 라면 끓이기보다 쉬운 장 담그기!
ⓒ 철수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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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끓이기보다 쉽다'고 하는 장 담그기라고 해요. 자, 새로운 대통령은 라면을 끓일 줄 아시려나요? 아직 라면 끓이기를 모르신다면 장 담그기가 좀 어려울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라면은 끓일 줄 아신다면 장을 담글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통령을 비롯해서 국무총리도 국회의원도 청와대 비서도 청와대 경호원도, 공공기관 일꾼도 여느 회사 일꾼도 누구나 장을 담글 수 있어요. 돈으로 사다가 먹는 장이 아니라, 손수 담그는 장맛을 누릴 수 있어요.

학교에는 '학교 장독대'를 둘 만해요. 청와대에는 '청와대 장독'을 두지요. 청와대에 '청와대 장독'을 둔다면, 청와대를 찾아올 나라 밖 손님은 '청와대 한켠을 차지한 장독대'를 매우 궁금해 하리라 생각해요. "What's that?" 하고 물을 테고요. 이때에 한국 대통령은 "This is a Korean traditional sauce!" 하고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어요. 한국에서는 예부터 누구나 장을 담가서 먹으며, 대통령이라고 장을 안 담글 까닭이 없다고 '나라 밖 손님'한테 얘기할 수 있어요. 된장을 모르는 나라 밖 손님한테 된장 맛을 보여주고, 된장을 선물해 줄 수 있어요. 간장하고 고추장을 선물해 줄 수 있지요.

한국 문화를 나라 밖에 알리려고 굳이 돈을 안 써도 되어요. 청와대에 청와대 장독대를 마련하고, 대통령하고 비서관하고 경호원이 다 같이 장을 담그면 되어요. 청와대 밥상을 대통령 스스로 가꾸어서 빚으면 됩니다.

장을 담그는 독은 흙으로 만들어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구멍들이 많이 있어서 장이 발효될 때에 도움이 된대요. 잘 발효되려면 공기가 통해야 하고 햇볕도 잘 쪼여야 하지요. (17쪽)

"벌써 끝이에요?" 장독에 씻은 메주를 넣고, 소금물을 부으면 끝이에요. 우리가 장을 다 담갔어요. "어려울 줄 알았는데 정말 쉬워요." (26쪽)

속그림. 그림책은 '우리 학교 장독대'를 말하지만, 아직 학교에 장독대를 둔 곳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장독 있는 학교도 청와대도 나타나기를 빌어요.
 속그림. 그림책은 '우리 학교 장독대'를 말하지만, 아직 학교에 장독대를 둔 곳은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장독 있는 학교도 청와대도 나타나기를 빌어요.
ⓒ 철수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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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은 식량자급율이 매우 낮습니다. 아무리 엄청난 전쟁무기나 미사일을 이 땅에 들이더라도 밑바닥에 가까운 식량자급율을 살리지 않고서야 나라를 지키거나 일으킬 수 없는 노릇이에요. 배를 쫄쫄 굶으면서 전쟁무기만 거머쥔대서 나라가 평화롭지 않아요.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남녘 새 대통령이 북녘 지도자한테 '된장·간장·고추장' 선물을 할 수 있습니다. 북녘 지도자더러 전쟁무기에 그만 돈을 퍼붓고, 북녘 지도자도 몸소 나서서 장을 담그고 김치를 담그면서 '서민 살림살이'를 온몸으로 깨달으라고 넌지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북녘 지도자한테 <우리 학교 장독대>라는 그림책을 읽고 장 담그기를 배웠으니 그대도 이 그림책을 읽고서 평화로운 살림을 정책으로 펼쳐 보라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요.

대통령이 앞장서서 청와대 장독대를 마련해서 '청와대 된장'을 담근다면 이는 공공기관이나 학교에 아주 쉽고 빠르게 퍼질 수 있어요. 학교 급식도 훨씬 깨끗하며 좋은 상차림으로 달라질 수 있어요. 학교마다 '주차장 아닌 텃밭'을 마련해서 된장·간장·고추장을 자급자족할 수 있어요.

하나하나 따져 봐요. 공공기관하고 학교에서 '된장·간장·고추장'을 자급자족할 수 있다면 식량자급율은 꾸준히 살아날 만하겠지요. 콩이며 고추를 손수 심어 거두는 살림을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몸에 익힌다면, '밥 한 그릇이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제대로 헤아릴 만하겠지요. 삶을 살리고 살림을 살찌우는 길을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배우고 살핀다면 이 나라는 한결 아름답고 평화로울 수 있을 테고요.

"근데 언제 먹어요?" 장은 천천히 먹는 음식이에요. 우리가 할 일은 이제 기다리는 거예요. 음식을 만들 때에는 늘 기다림이 필요해요. 밥을 뜸 들이는 것도 기다림이고, 장을 담글 때에도 잘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지금 우리 3월에 장 담갔지요? 5월에 장을 가르고, 9월부터는 새 간장과 된장을 먹을 수 있어요. "3월에 담그고, 9월부터 먹을 수 있구나." (28∼29쪽)

속그림. 어디에서나 장을 담글 수 있는 평화로운 나라가 되기를 빕니다.
 속그림. 어디에서나 장을 담글 수 있는 평화로운 나라가 되기를 빕니다.
ⓒ 철수와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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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 담가 청와대에 장독 들이는 대통령"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새로 대통령 자리에 서서 나라살림을 이끌 분은 수수한 살림살이를 손수 지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장을 손수 담가 볼 적에 '성평등'을 비롯해서 '집안일'이란 무엇인가를 또렷하게 헤아릴 만합니다.

덧붙여 대통령이 못 된 분들도 이녁 정당에서 장 담그기를 해 보시면 좋겠어요. 여당도 야당도 모두 '장을 담글 줄 아는 정치인'이 되면 좋겠어요. 국회 도서관 옆에는 "국회 장독대"랑 "국회 텃밭"이 있어야 한달까요. 손수 장을 담그지 못하거나 않으면서 '서민 살림'을 말한다면 아무래도 팥소 없는 찐빵처럼 보입니다.

평화롭게, 즐겁게, 아름답게, 사랑스럽게, 집집마다 마을마다 나라 어디에서나 된장 내음이 구수하게 퍼지기를 바라요. "된장 담그며 서민 살림을 북돋우는 대통령"으로 거듭나 줄 수 있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덧붙이는 글 | <우리 학교 장독대>(바람하늘지기 기획 / 고은정 글 / 안경자 그림 / 철수와영희 펴냄 / 2017.4.15. / 12000원)



우리 학교 장독대 - 학교에서 쉽게 담그는 간장과 된장

고은정 지음, 안경자 그림, 철수와영희(2017)


태그:#우리 학교 장독대, #그림책, #대통령, #서민, #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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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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