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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평왕 28년(606)에 성주였던 찬덕장군이 지키는 가잠성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백제군의 100일 간 공격으로 성이 완전 고립됩니다. 식량과 물이 떨어지고 성안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목숨이 경각에 달리게 됩니다. 군사들과 백성들은 찬덕장군에게 항복하여 목숨이라도 보전하고 훗날을 기약하자고 간청합니다. 찬덕은 너희는 내가 죽은 후에 항복하라면서 내 귀신이 되어 원수를 갚겠노라면서 성안의 느티나무에 달려가 머리를 들이받고 자결합니다. 성주로서의 책임을 목숨으로 대신한 것이지요.

노회찬 의원의 비보를 접하면서 문득 찬덕장군이 떠오른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겁니다. 소중한 목숨으로 자신이 지은 책임을 다하려는 뜻이 거기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수억 아니 수백 억을 횡령하고도 오히려 고개를 쳐들고 활보하는 세상에서 부끄러움이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준 것이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무더위에도 조문을 하면서 한없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이지요.

삼국을 통일한 무열왕(김춘추)은 찬덕장군의 뜻을 기려 가잠성을 '느티나무 괴(槐)'을 붙여 괴양(槐壤)이라 부르게 합니다. 고려에는 괴주(槐州)로 바뀌었다가 지금의 괴산(槐山)이 됩니다. 그래서인지 괴산에는 느티나무가 많다고 합니다. 느티나무는 괴산의 상징이면서 자존심이라 할 만합니다. 2013년 괴산 탄생 600주년을 기념하여 300년된 느티나무를 괴산 군청으로 옮겨 심은 바 있습니다.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도 있지만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시종무관장 민영환은 '이제 죽어도 혼은 죽지 아니하여 구천에서 동포들을 돕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칼로 목을 찔러 자결합니다. 피묻은 옷을 둔 마루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는데 댓잎이 공의 나이와 같은 45개였다고 합니다. 당시 저명한 화가 양기훈이 현장을 보고 그린 '혈죽도'와 함께 그 내용을 <대한매일신보>가 특보로 실으면서 온 국민을 감동시킵니다. 일제가 조작이라 하여 조사했지만 진상을 밝히지 못하자 뽑아 버립니다. 부인이 혈죽을 수습하여 전해오다가 종손인 민병기씨가 1962년 고려대 박물관에 기증합니다. 목숨으로 나라 잃은 부끄러움을 만천하에 알린 것이지요.

그런 정신이 3.1운동으로 부활하고 4.19의거와 6.10 민주항쟁으로 이어져 나라를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을사오적의 후예들은 여전히 나라를 좀먹고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현대판 이완용을 아십니까?" 2018년 3월 15일 <CBS 김현정 뉴스쇼>의 제목입니다. 외국에 우리나라 기술을 팔아먹은 사람들을 을사오적에 빗댄 것이지요. 국정원에 의하면 2005년부터 2014년까지 10년 동안 우리의 첨단기술을 해외로 빼돌린 것이 드러난 것만 406건이라 합니다. 추정 피해액이 50조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 예로 현대중공업이 10년간 400억원을 들여 개발한 선박용 엔진기술이 중국으로 넘어갑니다. 2015년에는 현대기아차의 신차 설계도가 중국으로 유출되었는데 피해액만 700억원입니다. 드럼세탁기 기술은 세계1위인데 전체 모델 300종류의 설계도면과 핵심기술을 연구소장이 빼돌립니다. 한 연구원은 생산설비 설계도면을 비롯해서 6000개의 파일을, 다른 연구원 3명은 작업지도서와 도면을 중국기업에 팔아먹습니다. 이 제품이 중국에서 만들어져 우리나라로 역수출되었다고 합니다. 연구소장 A씨는 1억 6000만원에 주택과 차량제공을, 연구원 B씨는 3억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들도 자식이 있을텐데 나중에 너희를 위한 일이었다고 변명할까요? 을사오적이 다시 출현한 것이지요. 역사를 잊으면 미래가 없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이런 행태는 언제든 반복될 수 있는 일이지요.이 모든 일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양심인 '부끄러움'을 잊은 탓입니다.

전북 임실 오수리에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는 동상이 있습니다. 김개인이란 사람이 낮술에 취해 들판에서 잠들었는데 들불이 나 점점 번집니다. 함께 있던 개는 주인이 잠든 곳과 냇물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면서 털에 물을 적셔 주인을 구합니다. 사람은 살았으나 개는 그만 지쳐 죽습니다. 주인은 개를 정성껏 묻어주고 지팡이를 꽂아놓았는데 마을의 느티나무로 자랍니다. 이 나무를 개나무란 뜻으로 오수(獒樹)라 하고 마을 이름도 오수리로 바꿉니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고려 최자의 <보한집>에 실린 내용입니다. 오수리에는 개를 추모하는 비각과 함께 의견상(義犬像) 서있습니다. 흔히 개를 빗대어 욕을 하지만 함부로 입에 올릴 일이 아닌 듯합니다.

'느티나무 괴(槐)'는 '부끄러울 괴(愧)'와 유사합니다. 부끄러움 즉 염치(廉恥)는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덕성입니다. 볼테르는 '파렴치한을 분쇄하라'고 질타했지요. 박완서의 소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위선과 가식이 판치는 우리 사회가 부끄러움을 회복해야 삶의 진정성을 찾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윤동주 시인은 나라 잃은 죄인이 되어 쉽게 써진 시가 부끄럽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나 지금이나 사리사욕에 나라를 망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내로남불'의 지도자가 너무 많습니다.

노회찬 의원의 비보를 들으면서 찬덕장군을 함께 떠올려 봅니다. 개인의 실수와 성주로서의 책임감이란 점에 차이가 있겠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겠다는 엄격한 자기검열만큼은 공통점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동안 낮은 자세로 낮은 곳을 위해 살아온 삶의 역정을 보아도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  마음을 아는 듯 느티나무가 바람에 술렁입니다. 저 말없는 나무가 오늘은 참 많은 말을 들려주는 듯합니다. 노의원님의 명복을 빌면서 부끄러움의 의미가 저 느티나무 잎처럼 오래도록 푸르게 빛나기를 바랄 뿐입니다.


태그:#부끄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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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이데아의 그림자라면 이데아를 찾기 위한 노력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런 꿈마저 없다면 삶의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개혁이나 혁신이나 실은 이데아를 찾기 위한 노력의 다른 어휘일 뿐일 것이다. 내가 사는 방식이 교육이고 내 글쓰기가 문화라고 한다면 특히 그런 쪽의 이데아를 찾고 싶다. 물론 내가 찾는 것이 정답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정답보다는 바른답을 찾고 싶다. 이것이 내가 기자가 되고자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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