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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며칠 전에 가족 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얼굴을 조금 찡그리면서 한 손으로 입을 가리키는 사진이었다. 무엇인가 궁금했는데 바로 문자가 이어졌다. 방금 이를 뽑았는데, 두 시간은 물고 있으라고 했단다. 아내는 나보다도 먼저 많이 아프냐고, 지금은 어떠냐고 물었다. 나도 비슷한 질문을 했다.

딸은 통증은 없다고 했다. 지금은 괜찮다고 했다. 다행이다. 이가 좋지 않은 관계로 나는 치과를 요즈음 들어 가끔 가는 편이다. 치과에 다니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치과는 정말로 웬만하면 안 갔으면 하는데 그게 내 맘대로 안 된다. 고통이 너무나 심하기 때문이다. 늘 아픈 건 아니지만 치과에 간 첫 경험이 너무나 아팠기 때문에, 그런 인식이 머릿속에 박힌 게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 치과를 간 게 1984년 여름이다. 그 당시 서울에 있는 조그만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대학을 가고 싶어서 직장이 끝난 다음에 직장 가까이 있는 야간 대입 종합학원에 다녔다. 26세 때인데 지금 다시 그렇게 하라고 한다면 절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젊고 건강이 좋았기 때문에, 그 당시 주경야독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가 너무 아팠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 세대는 죽는 병이 아니면 병원에 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 미련스러울 정도로 참고 또 참았다. 그러다가 병을 키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며칠을 참았는지 모른다. 그야말로 도저히 통증을 참을 수가 없어서 윗사람에게 말씀을 드리고 근처에 있는 치과에 갔다. 그때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치과에 간 날이다.

의사는 사랑니라고 했다. 몹시 아플 거라며 지금 뽑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너무 두려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냐. 이를 뽑고 직장에 돌아와서 한참을 통증에 시달렸다. 얼마나 아픈지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몸을 편하게 하고 쉬기도 했다.

그 고통 속에서도 사랑니가 왜 나에게 별안간 생겨났는지 궁금했다. 의사가 무엇이라고 말했겠지만 그건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랑니'라는 세 글자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혹시 내가 요즈음 학원에서 누님을 너무나 사랑해서 이게 생겨난 것이 아닐까?

누가 들어도 웃음을 터뜨릴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그때는 진짜 그랬다. 나는 사랑니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좋아하면 생겨나는 것으로 여겼다. 학원에서 몇 달째 공부를 함께 하는 누님이 생각난 것은 나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누님은 나보다 여섯 살이나 위다. 처음에는 나보다 나이가 적다고 생각해서 이름 뒤에 '씨'를 붙였는데, 나중에 환경조사서 쓸 때 생년월일을 안 뒤부터는 꼭 이름 뒤에 '누님'이라고 하거나 그냥 '누님'이라고 불렀다. 3월 첫날에 우연히 맨 앞자리에 같이 앉으면서 누님과 나는 인연을 맺었다.

직장인 대상이므로 수업시간이 부족해서 일요일에도 특강 형식으로 수업을 보충했다. 누님은 나를 지하상가로 데리고 가서 점심을 사주기도 했다. 기분이 매우 좋았다. 내가 마음속으로 아주 좋아하는 누님이랑 한자리에서 대화를 나누며 밥을 먹는 것이 꿈만 같았다. 성인이 돼서 처음으로 여자랑 그런 시간을 가진 게 처음이라서 더욱 그랬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했다. 솔직히 말하면 내 미래를 위해서라기보다 누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렇게 파고들었다. 쉬는 시간이면 서로 모르는 것을 물어보고 웃음보를 터뜨리기도 했다. 금상첨화라고나 할까. 누님과 나는 집이 같은 방향이라서 밤 10시에 학원이 끝난 뒤에 같은 버스를 탔다. 누님이 먼저 내리고 내가 몇 정류장 더 가서 내렸다.

학원은 절대로 빠질 순 없다는 생각에 통증을 무릅쓰고 학원에 갔다. 공부가 될 리가 없었다. 그 상태에서 어떻게 공부가 되겠는가. 누님은 걱정을 많이 했다. 빨리 가라고 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건 무모한 행동이었다. 1교시가 끝난 뒤에 원장선생님께 말씀을 드렸다. 옆에 앉은 누님은 퍽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학원 문을 나와서 버스정류장에 갔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님이 뛰어오면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누님이 가방을 들고 버스정류장에 온 것을. 그리고 나에게 말했다. 머리가 아파서 오늘은 좀 쉬어야겠다고, 원장선생님께 급히 말씀드리고 뛰어왔다고 했다.

그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몸은 치통으로 인해서 많이 힘들었지만, 마음은 누님으로 인해서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학원 다닌 지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이른 시간에 버스를 탔다. 조금 가서 자리가 났을 때 누님은 나보다도 먼저 말했다. 앉으라고 했다. 이 아픈 게 머리 아픈 것보다 더 참기 어렵다고 하며. 나는 누님의 따뜻한 마음 덕분에 자리에 앉아서 누님의 가방을 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집까지 가는 40여 분 동안 나는 창밖을 바라보는 누님을 자꾸만 바라봤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누님한테 고백하고 싶었다. 내가 사랑니가 나서 이렇게 아픈 것은 바로 누님 때문이라고, 누님을 한없이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이렇게 사랑니가 난 것이라고. 하지만 차마 그 말은 누님에게 하지 못했다.

태그:#사랑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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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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