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6 20:07최종 업데이트 20.12.0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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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국에서 탄생한 필기구 제조사들을 손꼽을 때 보통 워터맨, 파카, 크로스, 쉐퍼 등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무대 위 주인공이 빛나기 위해선 그를 받쳐주는 동료가 있어야만 합니다. 발레에서 여성 무용수를 리프팅 해 주목받게 하기 위해서는 발레리노의 협력이 필수적입니다. 한 편의 연극 무대가 조화를 이루려면 주인공을 포함한 모든 배우가 제 몫을 해줘야만 합니다. 필기구계도 마찬가지입니다.

1858년 기업가 '리차드 에스터브룩(Richard Esterbrook)'은 '에스터브룩 펜 컴퍼니(Esterbrook Pen Company)'란 이름으로 미국 뉴저지에 공장을 세우고 필기구 시장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1832년 독일 하노버에서 탄생한 펠리칸이 만년필을 생산하기 이전에 먼저 잉크를 만들다 뒤늦게 합류한 것처럼, 에스터브룩은 창업 후 줄곧 펜촉분야를 주름잡다, 이미 만년필계에 입성한 워터맨과 파카의 뒤를 이어, 1910년대 중반부터 만년필을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펜촉 생산업체로 1858년 문을 연 에스터브룩(Esterbrook) ⓒ 김덕래



오로라가 분명 금촉임에도 특유의 사각거리는 필기감으로 필기구 애호가들의 취향을 저격했다면, 에스터브룩은 스틸촉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음에도 결코 금촉에 뒤지지 않는 - 마치 '적자(嫡子)'를 압도하는 '서자(庶子)'처럼 - 웬만한 금촉보다 더 매끄러운 필기감이 강점입니다.


어지간한 필압도 버텨주는 강성펜촉이지만 믿기 힘들 정도로 부드러워, 힘을 주고 쓰는데 익숙한 사용자들의 만족도가 높습니다. 낭창거리지 않으니 펜촉에 단차가 생길 확률도 낮습니다. 정속 주행하는 자동차의 연료 소모율이 낮은 것과 비슷합니다.

보통 서양 만년필은 다이어리 메모용으로 EF촉을, 일상 필기용으론 F촉을 쓰고, M촉 이상은 서명용으로나 사용할 정도로 선이 굵게 나오는 걸로 인식하지만, 제조사마다 편차가 있습니다. 마치 동일한 100size 티셔츠라도 브랜드마다 품과 길이가 차이 나는 것과 같습니다.

에스터브룩은 서양 펜촉치고는 그리 굵은 편이 아니니, 일상 메모용으로 M촉을 선택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신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만 같은 절정의 필기감을 맛보고자 할 때, B촉은 꽤 괜찮은 선택입니다.

한때 에스터브룩은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펜 제조회사였습니다. '미국의 스틸닙 최강 만년필', '스틸펜촉의 아버지' 등으로 불리며 상종가를 달렸지만 번영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960년 초까지 대중의 사랑을 받았으나 조금씩 쇠락하다, 1971년 문을 닫기에 이릅니다. 그렇게 영영 흘러간 역사 속에서만 회자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2018년 굳게 봉인된 그 문을 열고 부활했습니다.

다시 부활한 '스틸펜촉의 아버지'
 

2018년 부활한 에스터브룩(Esterbrook) ⓒ 김덕래



'에스터브룩 에스티 마라스키노 OS 레드(Esterbrook Estie Maraschino Oversize Red)' B촉. 이 펜은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에스터브룩의 야심작입니다.

흔히들 독일산 만년필을 거론할 때 빈틈없는 마감과 정교함을 이야기합니다. 일본 만년필이 특유의 섬세함을 내재하고 있다면, 이탈리아 만년필은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색감이 인상적입니다. 상대적으로 미국 만년필은 정통성과 우직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펜은 종합선물세트입니다. 반투명 아크릴 수지로 빚어낸 외형은 어떤 이탈리아 만년필보다 더 아름다워 시선을 잡아 끕니다. 빛깔이 고운 펜은, 굳이 쓰지 않고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잠시 마음의 짐을 덜어내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게 하는 마법 같은 힘을 갖고 있습니다.

빈틈없이 체결되는 캡과 배럴의 연결부는 일본 만년필 3대 축 중 하나인 플래티넘의 '슬립 앤 씰(Slip & Seal)' 메커니즘과 유사하지만 미묘하게 상이합니다. 플래티넘 만년필의 캡과 배럴을 돌려 잠그면, 별다른 저항감 없이 서로 결합됩니다. 그저 자연스럽게 캡 내부 이너캡 안에 펜촉이 안착했단 느낌에 가깝습니다. 잘 체결되었으니 잉크마름을 줄여줄게 분명하단 합리적 믿음을 갖게 됩니다.

반면 '쿠션 캡 클로저(Cushion cap closure)'라 불리는 에스터브룩의 메커니즘은, 보다 밀착감이 높습니다. 배럴과 그립부 사이의 수나사산과 캡 안쪽의 암나사산을 맞물린 채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서로 잡아당기듯 결합되는 구조입니다. 캡 내부 검은색 이너캡 뒤편의 스프링 장치가, 필기를 마친 펜촉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살짝 뒤로 후퇴하며 자리를 내어줍니다.
 

쿠션 캡 클로저(Cushion cap closure)라 불리는 메커니즘 ⓒ 김덕래



전쟁과도 같은 하루를 살아내고 나면, 우리는 모두 집으로 돌아가 몸을 누이고 재충전을 합니다. 핸드폰을 포함한 모든 디지털기기는 전원부의 전기적 지원을 받아야 채워지지만, 사람은 편히 쉬는 것만으로 회복이 됩니다. 만년필도 같습니다. 충전 케이블을 찾을 필요 없이, 필기가 끝난 만년필의 몸통과 뚜껑을 서로 돌려 잠그는 것만으로 컨디션이 유지됩니다.

이 펜은 결합도가 높아 천천히 배럴을 반시계 방향으로 돌려 풀다 보면, 슬쩍 뚜껑이 몸통을 튕겨냅니다. 마치 그만하면 푹 잤으니 미적미적 이불 끌어안고 늦잠 잘 생각일랑 말고, 얼른 일어나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라며 깨우던 내 어머니 같습니다.

오로라처럼 특유의 사각거림을 내세우는 브랜드를 제외한 대부분의 만년필 제조사들은 부드러운 필기감을 지향하고, 오늘날 만년필계 최강대국은 이견 없이 독일입니다. 몽블랑을 비롯한 펠리칸, 그라폰 등 강력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브랜드를 여럿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금촉을 채용해 가격대가 만만치 않은데, 에스터브룩은 스틸촉을 사용해 상대적으로 접근하기 용이합니다.

통상 만년필 애호가들은 부드럽단 이유로 금촉을 선호하지만, 예외인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만년필이 볼펜에 비해 훨씬 손에 힘을 덜 주고도 잘 써지는 필기구라는 건 알고 있지만, 오래된 필기습관 탓에 필압을 약하게 주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인 사람도 많습니다.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여유롭게 해주기 위해 쓰는 도구가 만년필인데 굳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사용할 이유는 없지요. 그럼에도 만년필을 사용하고 싶다면 다소 강성에 속하는 금촉을 선택하거나, 이 펜처럼 부드럽게 써지는 스틸촉을 고르는 것도 방법입니다. 스틸촉이라 어지간한 필압에도 낭창거리지 않고 잘 버텨주면서도, 웬만한 금촉을 압도하는 필기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내게 맞는 펜촉이 있을 뿐
 

심플하게 브랜드명, 탄생 연도, 촉 사이즈만 담아낸 펜촉 ⓒ 김덕래



수학문제는 딱 맞게 떨어지는 정확한 답이 있지만, 만년필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詩)에 정답이 없듯, 내가 좋다 느끼면 그게 전부입니다. 그저 나와 보다 맞는, 편한 것을 찾아가는 여정이 있을 뿐입니다. 그 과정이 내게 불편함을 준다면 다른 필기구를 쓰면 그뿐이고, 나름의 맛을 이미 감지했다면 그걸 즐기면 그만입니다.

'다름'은 '틀림'이 아닙니다. 반짝이는 금장 만년필이 누구에겐 세상 최고의 멋스러움과 동의어지만, 또 누구에겐 그저 올드한 구문화의 산물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화려한 문양으로 치장한 금펜촉이 최고의 필기감을 보증하는 궁극의 펜촉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다수인 것은 맞지만, 어지간한 필압도 다 받아주는 스틸촉의 넉넉한 인심에 마음이 더 간다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 이유로 내가 선택한 '것도' 최고 중 하나여야 맞지, 내가 고른 '것만이' 궁극의 가치라는 말은 무모합니다.

오직 '록(Rock)'만이 유일한 가치의 음악이 아님을, '재즈(Jazz)'나 '힙합(Hip Hop)'과 마찬가지로 존중받아 마땅한 음악 장르 중 하나일 뿐임을 인정하고 나면, 정작 편해지는 사람은 나입니다. 세상에 조금의 티끌도 없이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에 가깝게 다가가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있을 뿐이니, 과정 자체를 즐기면 그걸로 족할 일입니다. 완벽을 지향함에 있어 핵심가치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습니다.

수첩에 깨알같이 작은 글씨를 써도 뭉개지지 않고 적확히 표현되면서도, 세상 둘도 없을 부드러운 필기감을 품은 만년필은 없습니다. 그런 필기감을 맛보게 해줄 펜이라면, 정말 작은 글씨를 쓸 땐 아주 조금씩이라도 뭉칠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섬세한 표현력과 매끈한 필기감은 마치 오디오 좌우 밸런스 조절과 같아, 한쪽으로 기울이면 반대편 능력치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부당한 것이 아니라 마땅한 것이니, 온전히 받아들이면 됩니다. 밸런스 레버를 살짝 돌리면 그만입니다.

내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면, 오른쪽에 있는 사물과 그만큼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이치입니다 알면 알수록 만년필이라는 도구가 어렵게 생각된다면 곰곰 생각해보세요.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용인하면 자연스러운 이치가 되고, 그렇게 되면 수월해지며, 종국에는 편해집니다.

미국이라는 피자 도우에 일본과 독일이라는 토핑을 얹은 다음, 그 위에 이탈리아라는 붉은 소스를 먹음직하게 뿌렸습니다. 크게 한입 베어 물기만 하면 됩니다. 이보다 더 풍미가 좋은 음식을 떠올릴 이유는, 향기로운 요리를 생각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 앞에 놓인 나름의 맛과 멋을 즐기면 그뿐입니다.  

마치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펜 한 자루 ⓒ 김덕래




* 에스터브룩(Esterbrook)
- 1858년 '리차드 에스터브룩(Richard Esterbrook)'에 의해 탄생한 펜 생산업체. 한때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지만, 점점 작아지다 1970년대 초반 폐업. 역사 속에 매몰된 필기구 브랜드 중 하나로 기억될 줄 알았으나, 2018년 새로운 생명력으로 부활한 미국의 펜 제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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