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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언제 올라오세요? 기차 도착 시각 알려주면 차 가지고 나가겠습니다."

가깝게 지내는 목사님에게서 이런 전화가 왔습니다. 백기완 선생이 운명하셨다는 날 아침이었습니다. 꼭 가봐야 할 자리인데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자신이 없었습니다. 조문에 대한 마음은 반반쯤이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고 백기완 선생의 영정과 함께 붙어 있는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는 말은 그분의 유훈이 되어 남은 자의 가슴을 때리고 있다.
▲ "산 자의 따르라" 고 백기완 선생의 영정과 함께 붙어 있는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는 말은 그분의 유훈이 되어 남은 자의 가슴을 때리고 있다.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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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거주하는 후배들에게서도 내가 조문하는 일시로 맞추겠다며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 조문을 가야지. 젊은 시절 나에게 강력하게 영향을 미친 백기완 선생이 돌아가셨다지 않는가.'
 
백기완 선생은 30년 전 향린교회에서 있은 우리 부부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 사회에 도움되는 삶을 살라고 말했다.
▲ 30년 전의 결혼식 주례 백기완 선생은 30년 전 향린교회에서 있은 우리 부부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 사회에 도움되는 삶을 살라고 말했다.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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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도 거들었습니다.

"힘들어도 다녀와야지요. 그것이 사람의 할 도리라고 생각해요."

아내는 백 선생님이 우리 부부의 결혼식 주례를 맡아 주신 것만으로도 당연히 조문을 다녀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례 일정을 5일장으로 잡은 것도 시간적인 여유를 갖게 했습니다.

백 선생님이 2월 15일 새벽 4시 30분에 숨을 거두시고 2월 19일 장례식을 거행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장례식의 정식 명칭은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입니다.

2월 18일, 그러니까 장례식 전 날 KTX에 몸을 실었습니다. 김천에서 일을 마치고 오후 6시 25분 기차를 탔습니다. 7시 55분 서울역에 도착하니 박영복 목사님이 차를 대기해 놓고 있었습니다.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분위기가 애잔하게 느껴졌습니다.

늦은 시각이기도 하지만 조문객이 많지 않았습니다. 코로나19가 아닌 평상시라면 전국에서 모여든 조문객들로 장사진을 이루었을 텐데 말입니다. 외화내빈과 같은 형식을 싫어하는 백 선생님에게 어울리는 장례 일정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의전위원으로 봉사하고 있는 기태가 빈소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써주는 그가 고마웠습니다. 백 선생님께 마지막으로 올리는 인사라고 생각하니 울컥했습니다. 연붉은 장미 한 송이를 바치면서 속으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백 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저에게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젠 누구에게 의지하지요? 용기를 북돋아 줄 스승이 과연 계실까요? 만년 청년으로만 생각했던 선생님이 가시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훌훌 자유의 나라로 날아가세요. 남기신 유훈을 저희가 잘 감당해 내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상주들과 반절로 예를 차렸습니다. 백일(아들), 이종회(사위), 백원담(딸), 김세균(서울대 명예교수), 신학철(화가), 이수호(전태일기념사업회 이사장) 등 여러분들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외로운 투쟁을 해 오신 백기완 선생은 결코 외로운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습니다.
 
리본 형식의 종이판에 백 선생님이 남긴 어휘들을 선택해서 남은 자들의 다짐과 각오를 담아 빈소에 이르는 계단과 벽에 빼곡히 붙어 두고 있다.
▲ 유훈을 잊지 않겠습니다 리본 형식의 종이판에 백 선생님이 남긴 어휘들을 선택해서 남은 자들의 다짐과 각오를 담아 빈소에 이르는 계단과 벽에 빼곡히 붙어 두고 있다.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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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장례위원회 구성을 보니까 산술적으로 헤아리기 쉽지 않더군요. 고문 211명, 공동장례위원장 167명, 개인 6,104명, 단체 562개, 상임공동장례위원장 김세균 외 5명, 상임공동집행위원장 및 공동집행위원장 김소연 외 9명, 9개 실무 위원회 위원 81명... 어마어마한 규모의 장례위입니다.

그때 후배들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대학로 학림다방 바로 뒤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내일 내려간다는 말을 듣고 하루 묵을 호텔을 알아보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시계의 시침은 9시를 훌쩍 넘어 있었습니다.

고맙기가 그지없습니다. 코로나19로 음식점 영업이 밤 10시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함께 온 목사님 댁으로 갈 테니 내일 보자면서 양해를 구하고 통화를 마쳤습니다. 성기준 함용재 박규정 이혜숙 등 옛 서민련 동지들과의 관계는 30년 넘게 이어오고 있습니다. 신실한 후배들입니다.

백 선생님을 만년 청년으로 생각했다고 앞에서 말씀 드렸지요. 우리 나이로 90세면 천수를 다 누렸다고 해도 결례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선생님을 늙지 않은 청년으로 생각할까요. 두 가지 점에서입니다. 하나는 그분의 생각이 늘 청년처럼 신선하다는 것, 둘은 그 생각이 90성상을 거치면서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
 
백기완 선생이 일생(한살매)를 간추려 놓은 책자 '남김 없이'와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식순
▲ 책자 "남김 없이"와 노나메기 세상 장례식 식순 백기완 선생이 일생(한살매)를 간추려 놓은 책자 "남김 없이"와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식순
ⓒ 이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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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위에 변절한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추한 꼴을 보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젊었을 적의 파릇파릇한 생각을 헌신짝처럼 벗어 던지고 지도자연하는 이들을 떠올리면 백기완 선생의 삶은 갓 꽃피운 난초처럼 청초합니다. 그분에 대한 구체적 인생 여정과 사상은 따로 밝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고 백기완 선생 장례위원회 명칭을 '노나메기 세상'이라고 했습니다. 백 선생님은 거리의 투사였지만 틈틈이 연구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중 순수한 우리말 찾기에 기울인 노력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찾은 우리말이 적지 않습니다.

백 선생님이 찾은 순우리말의 예로는 지구(地球)→땅별, 안녕(安寧)→잘잘, 서클(circle)→동아리, MT→모꼬지... '노나메기'는 '너와 내가 바르게 잘 사는'의 뜻입니다. '노나메기 세상'은 '우리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의미하겠지요. 백 선생님의 사상을 담고 있는 순수한 우리말이라 할 것입니다.

백기완 선생 앞에 '고(故)' 자를 붙이려니 무척 어색하군요. 하지만 선생은 고인이 되셨습니다. 이제 고이 보내드려야 할 때입니다. 안식을 취하시기 바랍니다. 하늘나라에서 편안하게 쉬시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김천일보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태그:#고 백기완 선생,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선생 사회장, #고 백기완 선생 조문,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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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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