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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그리고 우리가 남았다>/한국과로사·과로자살유가족모임 지음,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획
 책 <그리고 우리가 남았다>/한국과로사·과로자살유가족모임 지음,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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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사와 과로자살로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들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직접 쓴 책 <그리고 우리가 남았다>가 출판되었다. 책 <그리고 우리가 남았다>는 과로로 인한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이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이 남은 이들의 치유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 서술한다. 

가족, 동료, 친구를 잃은 이들이 황망한 세상을 견디고 난 후 다른 이들을 위해 이 책을 쓴 이유는 과로죽음이 개인의 나약함이나 가족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사회적 죽음이며 재발을 막기 위해 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다. 국가별 연간 노동시간 통계 순위에서 늘 상위권을 기록하는 한국사회에서 과로를 멈춰야 한다는 유가족의 목소리는 과로를 권하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건강하게 일할 권리를 찾는 유의미한 시도가 될 것이다.


일터에서 쓰러진 아빠

지이이잉 지이이잉. 저녁 8시, 아르바이트 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다. 곧 있으면 퇴근이니 받지 않았다. 하지만 불안하게도 계속되는 전화. 부재중 전화 표시와 동시에 문자가 왔다. 'ㅇㅇㅇ부장님 회사 직원입니다. 부장님이 쓰러지셨는데 상태가 안 좋으십니다.'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몇 달 전에도 피곤해서 쓰러진 아빠를 모시러 갔던 생각을 하며 일을 마무리 하고 있던 중 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동생이었다. '누나, 아빠가 돌아가셨어.' 심장이 쿵 내려 앉았다. 너무 당황스러웠는지 눈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하필 말이 많으신 택시 기사님은 왜 병원에 가시냐며 대화를 이어갔고 그런 질문에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친지들과 지인들에게 부고 소식을 알렸고, 엄마는 경찰서에 가고 동생과 나는 병원에 남아 장례 절차를 계속 기다렸다. 아빠 친구분께서 회사에서 일하다가 돌아가신 것은 산업 재해(이하 산재)가 분명하니 산재 신청을 꼭 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아빠를 보낸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산재 신청을 준비하게 되었다.

아빠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 산재신청

산재 준비는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얼마 안 된 유가족에게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한다고 마음은 먹었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집 근처 노무사 사무실에 무작정 방문해서 물어보니 아빠의 사인으로는 승인 받기가 확률이 매우 낮다고 했다. 주위에서 그런 힘들 일은 하지 말라고 산재 신청을 말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준비하는 내가 힘든 것이고, 아빠가 열심히 일하시다 돌아가신 것에 비하면 힘든 일도 아니었다. 본인 몸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하다 돌아가신 아빠를 인정해드리고 싶었다. 아빠의 죽음을 헛되이 흘려 보내기 싫었다. 승산을 알 수 없는 이 제도에 우리 가족은 제대로 도전해 보기로 했다. 아빠를 위해서.

아빠의 흔적을 하나라도 놓칠까 아빠의 수첩, 노트북, 핸드폰을 샅샅이 뒤져가며 읽어도 알지 못하는 아빠의 업무 기록들을 하나 둘 모았다. 나 또한 회사를 다니면서 산재를 준비했기 때문에 퇴근을 하면 바로 자료 수집을 했고, 직업 특성상 야근이 잦았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모든 기록이 없어져버릴 것만 같아 모은 자료들로 어떻게 하면 과로를 시각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지 새벽까지도 고민에 고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몇 달 간은 계속 피로에 시달렸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가족이 과로로 죽어 그 죽음을 내가 증명해야 한다면 누구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1년에 15번 사용할 수 있는 휴가는 아빠 회사에 자료를 가지러 가거나 노무사를 만나는 일 등 산재 준비에 다 써버리게 되었다. 

SNS로 주변 사람들이 즐겁게 여행 다니는 사진을 보면서 부러울 때도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즐겁게 웃으며 여행을 다니는 일은 나에게는 사치였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준비에 임했고 몇 달의 시간이 흘러 우리는 과로사·과로자살 유족모임의 산재 승인 1호 가족이 되었다.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 아직도 산재가 승인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여러 감정이 들면서 준비하면서 힘들었던 일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우리가 남았다

산재 준비를 비유하자면 이유 없이 갑자기 바다 한 가운데 빠지게 되어 살려고 물장구를 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물 아래에서는 살려고 계속 발을 움직이지만 발버둥을 치는 모습은 물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물장구를 멈추면 그대로 바다 아래에 빠져 버리고 구조선이 나타나면 그 상황은 종료가 된다. 정말 이유 없이, 갑자기 이런 상황에 직면하게 됐고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빠져나가기 어려운 상황. 

한국형 앰뷸런스를 제작한 인요한 교수의 신성한 보복처럼 과로로 아빠를 잃었지만 사회에 과로사, 과로자살의 문제점을 알리고 산재를 겪을 뻔한 사람, 겪고 있는 사람 혹은 산재에 대해 몰랐던 사람 모두에게 도움을 주고자 이 책을 내게 됐다. 책의 제목대로 그리고 우리가 남았지만 경험하지 못하면 어디서도 알 수 없는 내용들을 전문가와 유족들이 슬펐던 그 때를 기억하며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다.

과로사, 과로자살은 사회가 변하지 않으면 계속될 것이다. 아직도 많은 회사에서 업무로 인한 가슴 아픈 죽음이 계속되고 있다. 더 이상은 이런 무고한 죽음이 없기를 바라며 열심히 인생을 살다 간 아빠에게 이 책을 바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과로사·과로자살 유가족모임의 채유경님이 작성하셨습니다.


태그:#그리고우리가남았다, #과로자살, #과로사, #한국과로사과로자살유가족모임,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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