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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와 사무금융노조는 2020년 '사무금융노동자 업무상 정신질환 실태 및 대응 연구'를 진행했다. 본 연구를 통해, 사무금융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정신건강 현황을 드러냄과 동시에, 금융업종 기업의 조직문화와 실적 중심의 일 문화, 감정노동과 정신질환 문제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금융업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노동자 자살 문제와 업무상 정신질환 문제가 노동환경 및 기업의 성과주의 시스템과 어떻게 연관되어있는지 구체화하고 의미를 해석했다. 총 5편에 걸친 연재는 연구 결과와 보고서를 바탕으로 기사화한 작업이다.[기자말]
증가하는 자살

금융노동자의 정신질환 프로젝트 일환으로 지난해(2020년) 금융노동자들을 자주 만났다. 증권, 보험, 카드, 캐피탈 등 다양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기억에 남는 건 다들 한두 건의 자살 사건을 직간접적으로 접했던 경우가 적지 않았던 사실이다.

금융노동자의 자살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그 수가 어떻게 되는지를 기존 통계 자료로는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통계청의 '자살 사망 통계'나 경찰청의 '변사자 자살 현황' 등 기존의 자살 통계는 업종별 통계를 내놓고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하여 우회적인 방법으로 기사화된 금융노동자의 자살 사건들을 파일화하는 방법을 취해 90년도부터 2020년까지 30여 년 간의 자살 추세를 보았다. 물론 기사화되지 않은 자살 사건도 많기 때문에 업종 전체의 자살 수를 파악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금융노동자 자살 사건은 총 109건이었다. 시기별로 보면 90년대 22건, 2000년대 32건, 2010년대 55건으로 자살 사건은 증가하는 추세였다. 2010년대 들어 증가 추이는 조금 더 가파른 곡선을 그렸다. 이러한 증가 경향을 위험 신호 인식하고 조직 전체 차원에서의 자살 대응이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나 싶다.

자살 사건의 빈도가 유독 높았던 시기들이 있었다. 한 시기는 2004~2005년도였는데 각각 10건, 6건으로 다른 해에 비해 눈에 띄게 높았다. 또 다른 한 시기는2011~2013년도로 각각 7건, 7건, 14건이었다. 각각의 자살은 지극히 개인적인 비극일 수 있지만, 일터의 절망 상태를 증거하는 일종의 집합적인 사회적 사실로 취급해 각 자살 사건에 관통한 공통의 구조적 요인을 끄집어 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두 시기의 경우, 인력 감축이나 지점 통폐합 등의 대규모 구조조정을 그 주요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업종 내에서도 빈도 차이가 발견되는데, 은행 노동자의 자살 사건은 시기 구분 없이 빈도 높게 발생했다. 10건을 기록한 2000년대는 90년대(14건)에 비해 자살 사건이 줄어드는 모양새를 보이기는 하지만, 자살 사건의 절대적인 수가 여전히 많음은 주지해야 할 사실이다. 또한 2010년대에는 19건으로 다시 증가하는 모양새였다. 

한편 증권 노동자의 자살 사건은 금융업 내 여타 자살에 비해 빠르게 증가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추세선은 2000년대를 지나면서 더욱 가팔랐다. 2000년대 12건, 2010년대 19건을 기록했다.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지점의 역할이 축소되는 상황에서 지점 통폐합에 따른 문제들이 극단적 사건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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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은 업무와 관련성이 없다?

자살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회사측 진술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서사는 '자살은 업무와 관련성이 없다'로 압축할 수 있다. 증거 방식은 '정신 질환', '범죄', '가정사', '개인 성향' 등 죽음의 원인을 개별화하는 논거들이 동원되고 있었다.

특히 우울증이 언급되는 방식은 자살의 원인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경향을 강화한다. "고인은 평소 우울증과 비슷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서 자살을 선택한 것 같다"고 하며 업무와의 연관성을 부정하는 진술이 대표적인데, "고등학교 때 목 매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었다"거나 "2년 전부터 우울증 증세로 병원치료를 받아오던 중이었다거"나 "평소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라거나 "빈틈을 전혀 안보이는 완벽주의자였다"는 등 다양했다. 이렇게 과거력이 등장하는 순간 모든 판단은 중지된 채 목숨을 끊은 이유가 꽤나 그럴듯하게 설명되는 것처럼 서술된다. 과거력으로서의 우울증이 자살 시점에서 왜 악화되었는지, 그 연유가 혹시 업무와의 연관성은 없는 것은 아닌지를 따져 묻는 질문들이 파고들 여지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1990년대의 경우 회사측 진술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점과 비교해서 2000년대 이후의 자살 기사에는 회사측 진술이 꼬박 들어가곤 하는데, '업무와 관련이 없다'는 패턴이 반복된다. 이는 자살 사건을 개인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여러 담론 가운데 하나로 상투적이지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회사측의 진술과 달리, 기사 텍스트만 보아도 업무와의 연관성이 높았던 자살 사건들이 적지 않다. 논쟁적인 지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업무 관련성은 산재 기준에 따른 것은 아니다. 일터에서의 절망 상태에 놓였던 망자의 고통을 드러내기 위한 차원에서 업무 관련성을 폭 넓게 본 것이기는 하다.

일례로 2010년대를 보면, 55건의 자살 사건 가운데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26건이 업무 관련성이 높은 자살로 추정된다. 업무 관련성에 대한 내용으로는 '촉박한 개발 일정', '할당 약정 스트레스', '고객과의 금전적 분쟁', '월급 값하라는 인격적 모독', '불완전 판매에 대한 고객 항의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 '실적 압박 스트레스', '실적 문제로 비롯한 여러 번의 발령', '지점 통폐합과 영업실적 압박', '손익분기점(BEP) 스트레스', '과도한 목표치'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는 실적 압박에서 비롯하는 자살 사건이 빈도 높게 발견됐다.

관행과 실적 그리고 자살 사이

금융노동자의 자살 기사에서 불법적 관행과 연관된 자살 사건들이 많았던 점도 논쟁적이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기사만 보면 금융노동자들은 불법적인 사람들이 많은 것일텐데, 그렇게만은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불법적 업무 관행을 조장하는 조직문화나 경영방식이 그 밑에 깔려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우울증 블랙홀'처럼 불법적 요소가 언급되는 순간 자살의 맥락에 대한 모든 판단은 중지되고 죽음의 원인 또한 개인적인 사유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치부되고 만다.

하지만, 불완전 판매나 불법적 관행이 경쟁적인 이윤 추구 경영방식과 사실상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싶다. 차명계좌나 지인명의, 보고하지 않는 매매 등이 실적 압박과 연관되는 지점이 강해 보이기 때문이다. 실적을 쌓기 위한 방법으로 위법적 관행이 방조되는 형국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관행들이 자살 사건으로 불거졌을 경우에도 그 책임은 오롯이 개별 노동자에게 전가된다는 점이다. 회사로부터 빚어진 불완전 판매 문제임에도 불거진 문제에 대한 책임을 개별 노동자가 떠안고 끙끙 앓아야 하는 실정이다.

고위험 고수익 상품을 출시하는 곳일수록 개별 노동자가 느끼는 실적 압박도 크고 만약 문제가 불거졌을 경우에 대한 책임이 개인에게 지워지는 경향이 강해 보인다. 금융노동자의 자살은 개인적 비극의 형태를 띄지만 그것은 실적 쥐어짜기식 조직문화가 방조한 비극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살 사건) 그건 실적 압박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죠'라는 어느 인터뷰이의 강조도 이를 뒷받침한다. 우리가 여기서 참조 삼을만한 대목은 대안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개별 노동자 수준의 상담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방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적 쥐어짜내는' 조직문화나 경영방식을 전환해내야 반복되는 자살의 행렬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 김영선님이 작성하셨습니다. <사무금융 노동자 업무상 정신질환 실태 및 대응 연구>의 보고서는 한국노동안전연구소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작은책(2020년 10월호)의 글 ‘관행과 실적 그리고 자살’을 수정한 것입니다.)


태그:#노동자자살, #업무상정신질환, #사무금융노동자, #증가하는노동자자살, #금융업노동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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